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7(2003)년 3월호 Vol.3,No.26. Date of Issue 1 Mar ISSN:1599-337X 

 

 

 

 

 

 

 

 

 

 

 

 제바달다(提婆達多)

범수

 고타마 부처님 당시의 출가자는 원칙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신자들이나 일반인들의 희사에 의지하였다. 즉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 활동인 생산이나 축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구육물(比丘六物)이라 하여, 수행자들이 평생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을 여섯 가지로 한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의(上衣)와 하의(下衣) 그리고 외의(外衣)인 세 가지 옷(가사)과,  공양
*(供養 식사)때 사용하는 발우(鉢盂 밥그릇), 좌선할 때 사용하는 자리 깔개, 물을 걸려 마실 때 사용하는 기구 녹수낭(녹水囊)의 여섯 가지이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으로 전파되면서부터, 시대나 환경에 따라 출가자들은 예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논쟁이 벌어져 결국 결집(結集)*에까지 이르게 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금, 은 등의 보배를 보시 받아도 괜찮은가, 전 날 받은 소금을 남겨 두었다가 다음 날 먹어도 되는가 하는 등의 문제인데, 이와 비슷한 일이 고타마 붓다 당시에도 있었다. 남방 율장의 <파승건도(破僧건度)>에 따르면, 제바달다(提婆達多)는 고타마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평생토록 산림에서 거주해야 하며, 마을에 거주하면 죄가 된다.

평생토록 걸식해야 하며, 청식을 받으면 죄가 된다.

평생토록 분소의를 입어야 하며, 거사의를 입으면 죄가 된다.

평생토록 나무 아래에서 거주해야 하며, 집안에서 거주하면 죄가 된다.

평생토록 고기와 물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며, 만약 먹으면 죄가 된다.

그러나 고타마 부처님은 이런 제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한다.

원하는 바에 따라 산림에 머물러도 좋고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

원하는 바에 따라 걸식을 해도 좋고 청식을 해도 좋다.

원하는 바에 따라 분소의를 입어도 좋고 거사의를 입어도 좋다.

1년 가운데 8개월은 나무 밑에서 좌와 해야 함을 인정한다.

스스로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거나 죽이는 소리를 듣거나
그런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먹어도 좋다.

 이 글을 접하는 독자들은 이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질런지 필자로서도 매우 궁금한 바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관념에 따를 것 같으면, 불교교단의 화합을 파괴하고, 여러 차례 반역을 저질렀던, 제바달다의 주장을 오히려 고타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제바달다의 제안에 대하여 중도의 원리에 따라, 위 인용문과 같이 분명히 답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결국 출가자의 생활인 사의법(四依法)에 관한 것으로, 제바달다의 제안은 원칙을 위한 엄격주의 내지, 고행만을 위한 고행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중도* 의 원리에 입각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루셨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에 대하여 짚어 보도록 하자. 그것은 고타마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인용인데, 흔히 말하는 '6년 고행'이라는 부분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던 싯달타 태자는 이의 해결을 위하여 개인적, 사회적 지위와 권력, 그리고 부를 뒤로 한 채, 출가하여 처음에는 그 당시 널리 행해지던 선정을 닦았지만, 목적과 방법이 전도된 것을 알고는 그와 같은 수행을 그만 두었다. 그런 후 다시 6년간 고행에만 힘쓰게 되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도저히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해결할 수 없음을 자각하시고는 이 역시 버리신다. 그리고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원리에 입각한 수행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깨달음의 본질이 고행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는데도 불구하고, 고행을 깨달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이루시고...."라고 고집한다. 이러다 보니 결국 잘못된 수행법을 고수하고, 또 전하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고타마 부처님 재세 당시, 일반적으로 행하지던 고행이나, 선정은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고타마 부처님 재세 당시, 인도 전통 사상은 우주의 근원이나, 인생의 근본을 유일한 범(梵)에 있다고 보거나, 또는 다수의 물질적 요소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두 이와 같은 사상에 입각한 선정(修靜)이나, 고행(苦行)을 수행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둘은 형이상학적 우주론(轉變說, 積聚說)에 입각하여 물심(物心) 이원론(二元論)적 입장에서 고(苦)의 근원을 육체에다 두고, 내세주의적(來世主義的)) 선정과 고행을 닦았으므로, 목적과 방법이 혼동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먼저 선정 주의자들에 따르면,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선정에 들어야 함으로, 선정은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고행에서도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욕심의 근본이라고 여긴 육체가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죽기 전에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당시의 상황에서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이같은 수행법을 모두 파기하고, 중도의 원리에 따른 수행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사의법으로 옮겨보자.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 공양(供養) 공양이란 부처님(불), 가르침(법), 스님(승)인 삼보(三寶)와 부모, 스승, 등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유 무형을  희사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신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행위까지도 포함된다.
* 결집(結集) 고타마 부처님께서 입멸에 드신 후,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데 모아 정리한 일을 결집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제2차 결집은 비사리(毘舍離) 결집 또는 칠백집법(七百集法)이라고도 불리는데, 고타마 부처님의 입멸 후 100년 무렵, 야사(耶舍)가 700인의 비구들을 비사리에 소집하여 계율에 관한 열 가지(十事)를 심의한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교단은 처음으로 순수한 하나의 교단에서 보수적인 집단과 진보적인 집단으로의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중도(中道) 중도란 단멸(斷)과 상주(常), 유(有)와 무(無), 고(苦)와 낙(樂) 등, 대립이나 차별 또는 이에 의거한 집착을 떠나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불교의 근본 행동원리이다. 그렇다고  대립되는 두 가지 개념을 적당히 섞은 것이 아니라, 극과 극에 대한 이중부정(二重否定)이 뒤 따르게 된다. 환언하면 대립되는 두 개념을 모두 초월하는 것으로, 고(苦)의 견지에서 낙(樂)을 바라보거나, 낙(樂)의 입장에서 고(苦)를 살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동시 부정을 통해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은 수정주의(修定主義)나 고행주의(苦行主義)가 아니라 연기의 이치에 입각한 중도이다. <雜阿含經>, 《大正藏》, 卷 2, p.86.上 "離此諸邊 說其中道 如來說法"

 

 

 

 사랑이 꽃피던 날

문옥선

   매화꽃 향기 찻잔으로 스미던 날, 초대받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수를 다녀왔다. 전날만 해도 봄비가 촉촉이 내려 내심 걱정을 했었는데, 아마도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는 비였나 보다.
 결혼식이 이뤄지는 예식장은 집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으나, 장소를 정확히 몰라 시간을 넉넉히 두고 출발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다행히 초대장에 그려진 약도만을 의지한 채 길을 나섰지만, 쉽게 예식장을 찾을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해맑아진 거리의 모습과 함께 사람들의 옷차림과 발걸음은 경쾌하고 즐겁게만 보였다. 
 결혼식을 하
기에 아주 좋은 시간대였을까, 예식장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으리만치 하객들로 붐볐다. 그리고 사람들도 좋은 날의 만남이라서 그런지 다들 곱고 화사했으며, 또한 기품과 여유마저 있어 보였다.
 
결혼식이 열리는 3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버튼 하나를 이용하여 오르는 엘리베이트 보다는 두 다리를 이용하여 천천히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것을 즐기기 때문인데, 가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살면서 어떤 큰 변화가 오지 않는 한, 내 두 다리는 사는 날까지 나를 지탱해줄 겁니다.”  이러다 보니 새것 보다는 오래된 물건에 더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사람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상대에게 첫눈에 반해 만난지 사흘만에 결혼했다는 얘기보다는, 초등학교 동창생과 결혼했다는 얘기에 더 감동을 받는다. 오랜 동안 변함없이 그나, 혹은 그녀에게 진실할 수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이지 않는가.
 
식이 열리는 3층에 도착하자 예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신랑은 그의 아버님과 나란히 서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신랑과 마주쳤을 때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시죠?” “네 고맙습니다.” 라는 짧은 인사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보니 우리는 오늘로 구면이 된다. 그것은 신부와의 인연으로 작년 늦가을 신랑을 만나게 되었고 오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 것이기에... 
 들녘의 억새풀이 장관을 이루던 어느 가을 날, 오늘의 신부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신랑감을 데리고 인사를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를 찾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상사쪽으로 향했다. 우리 셋은 목조로 지어진 식당에 들러 저녁을 함께 하고, 식 후에는 댐 주변을 거닐면서 그들의 인연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대기업체에 근무하는 오늘의 신랑은 바로 신부의 남 동생 학교 동아리 선배란다. 남동생이 선배를 지켜보다가, 누님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 여기고 선배에게 누나를 소개시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생도 그들도 모두다.... 아마도 후배를 보면서 그 누나에게 더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혼식 날 그녀를 보면서 그동안 몰랐던 점을 새로 발견했다. 내가 알아왔던 그녀는 무척이나 수줍어하고 자기표현을 절제하며, 양보를 미덕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진 동그란 눈, 한들거리는 풀잎 같은 외모에 조용한 말씨까지, 어느 한 곳 여성스럽지 않은 곳이 없는데다가 마음씨마저 예쁜 여자였다. 특히 그녀의 풀잎 같은 여린 외모는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었기에 더 후한 점수를 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런 그녀인 줄만 알았는데, 그 날의 그녀는 재잘거리는 소녀로 바뀌어있었다. 화장기가 없어도 맑던 얼굴은 엷은 화장에 더 화사했고 핑크빛 볼연지까지, 게다가 연보라 빛에 물든 속눈썹은 한층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쉼 없이 재잘거리며 얘기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난 미소 지었다. 그것은 사랑에 빠져있는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바라보는 나 역시 행복했었다. 그녀의 그도, 과묵한 것 같으면서 한번씩 씨익 웃어주는 웃음이 아주 상큼해 보였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그도 가끔씩 화답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난 그 날 수다도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날의 내 역할은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눈에 담아놓는 일이었다. 행복 또한 전염력이 강하니 나 또한 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청주에서 근무하는 그녀의 그를 위해서 우리는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헤어졌다. 그렇게 우린 만났었고 그때 말하기를 "내년 구정 지나면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 같다"고 했었다. 그녀의 나이가 그때 29살이었지... 잠깐 지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신부를 좀 만나봐야겠어요.” 신랑에게 말을 건넨 후 그녀를 보러 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모조 다이아몬드가 박힌 머리 장식은 불빛에 반짝이며 찬란함을 빛내고 있었다.  옆에 서있던 젊은이를 친 오빠라고 인사 시키기에 웃으면서 한마디 건넸다. “누가 보면 두 사람이 신랑신부인줄 알겠습니다.”  “예...” 그녀의 오빠는 화들짝 놀라며 웃는다. 그 때 이미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신부의 친구가 거든다.  “쟤한테 지 오빠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더니, 글쎄 다른 친구가 이미 찜해서 안 된다고 하는 거 있죠.” 우린 또 다시 웃었다. 그녀의 오빠는 참 반듯하게 생긴 젊은이었다. 
 식이 시작되자 난 신랑신부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신랑입장이 있었고 뒤이어 아버지의 손을 잡은 신부가 입장하였다. 식의 순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결혼식장을 찾은 것은 실로 몇 년 만인 것 같다. 초대장을 받더라도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축의금으로 대신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정작 참석해본 경우는 별로 없다. 참석하는 것으로 치자면,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에 비중을 더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초대장하면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너희들이 다음에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하시며 예스럽지 못한 경우를 예로 들어주셨다. “첫째, 초대를 해야 할 사람을 초대하지 않는 경우, 둘째, 초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가는 경우, 셋째, 초대를 받고서도 가지 않는 경우.” 예를 중요시하셨던 담임선생님이셨기에 그런 말씀을 강조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도 가능한 한 이런 경우에 속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초대장을 남발하는 요즘 세태는 예에서 많이 벗어난 행동들은 아닐까. 한번쯤은 초대장을 받고서 난처한 경우들은 없었는지, 가야만 했을 자리를 일을 핑계 삼아 가지 않은 것은 아닌지, 꼭 해야 할 곳에 하였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애경사라 하더라도 가까운 친지 외에는 이웃에게 부담을 준다고 일부러 알리지 않는 집들도 있다. 누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기에 물론 정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이웃을 볼라치면 마음이 따스해지고 고개가 숙여진다. 그건 아마도 그분들의 인품이 더없이 귀해 보이기 때문 일 것이다. 
 식순에 의해서 주례사가 묵직하게 전해지고 있었고 난 그 내용을 귀 기울여서 듣고 있었다. 어쩌면 주례사는 신랑신부의 몫이 아닌 하객들의 선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랑신부야 뭔 소리인들 제대로 들리겠는가. 
 간밤에 친구들과 날밤을 새다시피 한 신랑과 신부는 식사까지 걸렀을 것이고, 거기다 수많은 하객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몸과 맘이 떨리고 후들거리니 아마 어서 식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할 것이다. 주례사의 여러 말씀 중에서도 “귀한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시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는 말씀에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당신은 나에게 귀한 사람이요, 나는 당신에게 귀한 사람이라. 그 귀함은 곧 고귀함과 통하리라. 물건도 귀한 것은 아끼고 보듬고 하거늘, 살다보면 서로에게 무덤덤해져 말과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깊은 상처를 주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것은 아마도 귀하게 만난 인연을 잠시 잊은 까닭이리라.... 삶의 환경은 자신이 만들어가고 자신이 즐기는 것이라 했거늘.... 
   주례사가 끝나자 신랑 신부가 양가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순서가 이어졌다, 먼저 신랑이 신부 부모님께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무슨 연유에서일까, 신랑의 그런 행위가 그저 한없이 고맙고 감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랑은 곧 부모님께도 똑 같이 절을 했다. 이어서 신랑의 친구인 듯한 사회자가 “신랑은 신부를 번쩍 안고 나는 봉 잡았다를 크게 세 번을 외치십시오.” 하자 하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고, 신랑이 신부의 부모님께 절을 하던 모습으로 가슴 뭉클해져 있던 나 역시나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지 않은 키가 서로 비슷했으나, 결혼준비로 더 호리호리해진 신부를 다부진 신랑이 안기에 무리 없어 보였다. 잠시 멋쩍게 웃던 신랑은 신부를 살포시 안고서 “나는 봉 잡았다."를 아주 용감하게 외쳤다. 그때 신부의 표정이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미혼의 남녀들이 가장 부러워할 광경일 것이다. 그만큼 신랑은 만인 앞에 당당했고, 신부는 행복에 겨워했다. 여기저기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양가부모님도 모두 웃고 계셨다. 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교양도 떨쳐버렸다. 사실 젊은이들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했다. 한편으론 신랑이 부모님께는 좀 민망했겠지만 짓궂은 이 한마디가 신부의 부모님을 조금은 위로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마치 신부의 아버님이 속으로 “암, 봉이지 봉이고 말고, 귀한 내 딸을 데려가니..”하는 말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것은 식이 끝나고 바라보게 된 그녀의 아버지 표정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딸아이를 떠나보내는 쓸쓸한 아비의 표정만은 아닌 어떤 생동감 같은 분위기가 언뜻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 아주 보낸 것이 아니지, 언제든 내 딸을 볼 수 있고 말고.” 하시는 아비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한편 같은 상황에서 신랑의 어머님은 또 어땠을까, 생각컨대, “뭔 소리를, 새아가야 봉은 바로 니가 잡았다.” 혹 속으로 이러시지는 않았을까? 
   신부의 아버지는 처음 보는 나에게 눈길을 주면서 누굴까 궁금해 하는 모습이었지만, 난 그냥 나왔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군다나 주변머리라고는 없는 내가... 또 소개한들 “훌륭한 사위 분을 보셨으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따님이 오늘따라 더 고운 것 같습니다. 이제 보니 그 고운 자태가 아버님을 닮았나 보네요...” 이런 상투적인 말 밖에 초면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상황을 뒤로 하고 난 식당으로 향했다. 뷔페였다. 자리마다 일행들끼리 어울려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우며, 먹는 모습을 보니 잔치 집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결혼식에 오기 위해 애 낳은지 며칠만에 외출을 해서 얼굴이 푸석하다는 새댁. 난 사실 그녀를 보고서는 임산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성치 않은 몸으로 참석했다니, 그 성의가 얼마나 고마운가. 또 비행기로 내려왔다는 서울친구는 시댁에 알리지 않고 왔다는 얘기를 강조한다. 아마도 이곳에 내려왔지만, 근처에 있는 시댁에는 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은 시댁에 내려올 때는 열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여독으로 피곤함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친구 결혼식에는 비행기로 내려왔다는 미안함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을 신랑한테 맡기고 내려왔다는 서울친구에게 아이들이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이제 4살과 2살이라고 일러준다. 덧붙여서 말하기를 2살인데 6개월밖에 안되었다나.그러자 누군가 " 이 사람아 섣달그믐날에 태어나도 한 살이라네." 라고 그런다. 
 어제 신부 집에서 한 잔씩 했는데 술이 받질 않아 실수를 해서 망신스럽다는 친구. 그런데 보기에는 하나도 망신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잤는지 목이 삐끗해서 물리치료를 받고서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친구. 기어코 올 수밖에 없는 그 친구는 바로 그 오빠를 찜했다는 아가씨였다. 아버지가 이제 환갑을 지냈는데 아직 애인도 없으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냐고 푸념하는 아가씨. 그렇지만 그녀는 결혼이 별로 마음에 없는 아가씨 같이 보였다. 솔솔 부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결혼은 하게 되면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당돌한 이유였다.
그녀는 월수입의 거의 모두를 자신을 위한 투자로 쓰고 있었다. 부케를 받은 긴 머리의 소녀까지... 긴 머리 소녀하니, 그 옛날 종로의 다방이 떠오른다. 친구와 약속한 다방에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긴 머리소녀’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 당시 난 긴 머리의 소녀였다. 나를 위해 들려준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얼마나 가슴이 설레던지....참 아련한 추억이다.
 긴 머리의 소녀한테 물었다. “아까 부케 받으셨죠, 날짜를 잡으셨나요? 축하드려요” 했더니, “아뇨” 한다.  아마도 결혼은 희망 사항이었을까? 
 다들  친구의 결혼을 축복해주기 위해 이곳에 모였지만, 오늘 치러지는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기까지의 사연들은 참으로 제 각각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서 만나지는 한 쌍의 부부처럼. 
 
오늘 결혼을 한 두 사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두 사람 오래오래 사랑하세요.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울 때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삶 이어 나가길 바랍니다. 당신들의 아이가 자라나고 또 그 아이들이 두 사람처럼 사랑하고 두 사람처럼 아름답게 살아나갈 때까지 귀하고 곱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성주

             불교의 보시(布施)사상과 사회복지
                                                       -성주-
Ⅰ. 서론
Ⅱ. 개념정의
Ⅲ. 불교사회복지사상과 실천방법
Ⅳ. 불교사회복지사상과 실천의 경전적 근거
 (1) 자비사상
 (2) 복전복리사상(福田福利思想)
 (3) 보시사상(布施思想)
Ⅴ. 결론

Ⅱ. 개념정의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의 사회비보사업(社會裨補事業)과 각종 민간 자선사업이 활발하게 실시되었다. 그것은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후, 불교의 기본정신인 자비사상(慈悲思想) 등이 전국민의 의식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자연히 국가나 민간의 구제사업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불교와 사회복지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현대적 사회복지이념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치하타 료슈는 불교의 사회복지이념을 자비(慈悲), 보시(布施), 복전(福田), 보은(報恩), 불살생(不殺生)과 방생(放生), 보살(菩薩)사상에서 찾고 있으며, 복지를 실천한 사례로 재해구조, 빈민구제, 질병치료, 비전양병방, 범죄방지대책, 동물보호운동 등을 들고 있다. 또한 모리나가 마츠노부(森永松信)는 불교의 자선구제사업의 형태를 일반적 구제사업, 욕실의료, 동물애호, 지역개발사업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자선 구제사업과 지역개발 및 공공사업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사회복지의 시행사례를 고찰하면, 구제자가 피구제자에게 베푸는 종적인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지역주민의 생활이 소지역에 한정되고, 그 안에서 주민 상호간 접촉을 통해서 연대감에 의한 집단적인 응집성을 강화하여, 자조와 상호부조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불교 사회복지활동은 포교의 의미와 동시에 자선구제사업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선구제의 복지활동은 근대사회의 사회복지사업의 개념으로 비춰본다면, 불교의 독자성을 확보하였다고 하기에는 모지라는 점이 있다. 그것은 근대사회에서 사회복지사업을 '특정한 목적과 독자적인 대상을 지닌 구제, 보호 및 복지증진의 형태이고, 공사(公私)의 주체에 따라 행하는 조직적인 사회적 시책'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업이 하나의 전문분야를 이룬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대부터로 비교적 최근에 속한다. 그 전까지는 서구에서도 사회복지사업이란 자선(charity), 빈민구제(poor relief), 박애활동(philanthropy), 사회개량(social reform) 등의 구제사업의 역사로서 발전되었다.
 서구의 근대적 의미에서 사회복지는 자선, 구제의 단계에서 사회문제에 대응으로서의 사회연대에 의한 사회복지단계로 이행되었다. 이와 같은 서구의 사례에 비추어 불교사회복지를 본다면, 불교적 자선, 구제활동을 거친 후, 근대성을 가지고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 사회복지는 불교적 심정으로 생활개선을 원조하고, 개인이나 가족의 자립을 촉진하는 것을 총칭하는 개념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사회복지의 실천주체는 구체적인 교단이나 사찰 내지는 법인조직 혹은 비영리 단체일 것이다. 또한 대상설정에 따라 그 주체적 계기와 목표 과제가 정해지는데,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장애를 목표과제로 하여 불특정다수의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평등하게 복지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불교 사회복지사업의 대상과 목표가 된다.
 불교사회복지의 핵심은 "사회과학적 입장에 있는 복지사업에 단지 불교학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교학에 의해 해명된 인간과 세계에 관한 자각을 필요로 하는 "이다."
<모리야 시게루(守屋茂), “佛敎社會事業노の基本問題,”《印度學佛敎學硏究》15券, 1∼2號(1966∼1967), pp.218∼220.>  따라서 불교 사회복지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개념과 사상을 정리하고, 실천대상 및 과제의 범위를 설정하고, 현실사회에 적용할 때 부적합한 사례를 미리 검토하는 등 기본문제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현재 민간 복지부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계, 특히 불교사회복지사업이 소프트웨어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지서비스의 전문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불교사회복지가 사회복지의 실천현장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점을 미리 살펴보자.
 ① 불교사회복지의 실천에 있어서 국가의 사회복지제도 및 법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것이다.
 ② 불교 이념과 사회복지 전문성과의 결합에 관한 것이다.
 ③ 불교계 사회복지법인 시설과 그 실무자들의 불교에 대한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이다.
 ④ 불교 사회복지사업의 인적, 물적 자원조달방식과 법제도, 행정조직에 관한 시스템의 정비, 즉 불교 사회
     복지의 지원 및 전달체계에 관한 것이다.
 이점을 고려해 불교사회복지의 실천 및 연구방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불교사회복지의 특성을 살려 복지사업을 전개하는데 내적인 충실을 기하고 정신문화복지로서의 특성을
     살려 나가는 것이다.
 ② 불교계가 가진 자원의 총량을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도록  조사분석 및 설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③ 불교사회복지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공급할 수 있는 교육훈련 및 수급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④ 지방자치시대에 따라 각 지역사찰이 가진 잠재적인 자원들을 활용하여 지역사회복지를 실현하도록
     사업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정책을 잘 파악하고 복지정책결정과 집행과정을 감시하 고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사회복지학이 나아갈 방향은, 세계화, 정보화, 고령화 추세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응하며, 사회복지제도와 정책의 혁신, 그리고 새로운 사회복지의 이론과 실천방법에 대한 진보된 연구가 필요하다.

 

 

 

 불상

편집부

 충북 옥천군 소정리 산 자락에 작은 과수원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여느 과수원처럼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서면,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에 호기심과 경탄심이 절로 일어난다. 이유는 부처님 상이나, 보살상 등 불교의 성물(聖物)을 조성하는 광경을 직접 접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곳에서 불, 보살상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있는 분은 불모(佛母)이기도 한 금담(金談) 스님이다.
 스님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金山面)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에 오백라한(五百羅漢) 상을 모시는 등, 여러 곳에 부처님의 상을 조성하여 모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성물의 조성은 주로 스님들께서 직접 하였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저런 이유로 그런 경우가 드물다.
 성물의 조성은 단순한 조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처님을 모시듯, 이 땅에 부처님께서 화현하시기를 원하며, 불국토를 이루기 위한 염원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끌질 한번하는 것이, 마치 절을 한 번 하는 것과 같이 신중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성물을 조성하는 자체가 바로 수행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종교적 이해의 뒷받침 없이, 상업적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상과 또 생전 처음 보는 여러 가지 기구들 그리고 성물을 조성하는 모습에 마냥 신기해 할뿐이다. 한 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아하"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하고 또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제 각각이겠지만 , 아마 '불교용품점'에서 고무신짝 사듯 구입하는 줄 알았던 것에 대하여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성하고 또 모셔야 하는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인의 예배 대상인 거룩한 부처님을 실제로 모시듯 매일 기도하며, 부처님 상을 조성하는 것과, 규격과 재질에 따라 얼마라고 가격을 정한 후 자동화 공정에 따라 대량 생산하는 부처님 상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우문(愚問)인줄 알면서도 반문해보는 것은 이 글을 접하는 분들에게 만이라도
성물 오용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이다.
 요즈음 상업적인 목적으로 탑을 납골의 방법이나 조경 등의 장식품으로 전략시키는 경우와 또 원래의 목적과 전혀 관계 없이 불상 등을 함부로 다루는 경우가 허다한데, 간혹 이런 경우를 접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무지를 탓하기 앞서 오히려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필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은 흔히 말하는 토굴이라는 곳이다. 따라서 부처님 상을 모시거나 사찰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행사란 없다. 가끔 인연 따라 이곳을 찾는 이들 가운데 그런 사실을 모르는 분들은 "왜 불상을 모시지 않습니까" 하고 묻곤 한다. 그럴 때 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그렇고, 또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 따라 신심(信心 믿는 마음)의 차이를 나타내는 이들에게 말이나 글로 설명한들 이해할까 하는 마음에 그저 "예 인연 따라 되겠죠..."라며 얼버무리기 일쑤이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 가운데 혹자는 스님이 사는 곳이니 무조건 절이라는 하고, 혹자는 외형적인 건물만을 보고 절이 아니라고 한다. 절에 대한 개념이 안 서있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인 것 같다. 그러면 절이란 무엇인가?
 절(寺 Vihara)이란 '수행하는 곳'이다. 물론 일반 적인 의미에서 탑이나 불상 등을 모시고 스님께서 수행하는 곳이지만, 그냥 '수행하는 곳'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그러면 이 때 수행이란  무엇을 위한 수행일까? 그것은 바로 깨달음을 위한 것으로 해탈도(解脫道)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능이 이뤄지고 있으면, 장소나 외형과 무관하게 절이며,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장소나 번듯한  건물일지라도 아니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편 외형에 따라 신심(信心 믿는 마음)의 차이를 내는 사람한테서 이와 같은 이치를 이해할 것을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수행이란 때와 장소에 관계 없이 이뤄지는 것임으로 이 세상 부처님 도량(깨달음의 도량)아닌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바로 부처님 나라(깨달음의 나라)이며, 또 이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가 지금 여러분들에 여담 하나하고자 한다. 아마 이 이야기는 비록 절과 인연이 있더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또 인연이 닿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불상 조성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는 경우라면, 부처님을 조성하는 분의 부인을 보고자 한다. 그래서 부인의 성품이나 행동이 후덕하지 않던지,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이런 저런 핑계를 들어 다른 분과 인연을 맺어 또 다시 가정과 부인을 살피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릴 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보통 남자 아이는 남자를, 그리고 여자아이는 여자를 그리게 된다. 그리고 구체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자기 얼굴을 그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혼을 한 경우라면 여러모로 서로 상대를 닮게 마련인데, 마침 불상 조성하는 분이 결혼을 한 일반인이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인과 닮은 모습의 불상을 조성하는 경우도 생긴다. 따라서 가정이 화평하지 못하면, 불상 조성하는 이의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자한 모습의 부처님 상을 조성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불상을 조성하는 일에 대한 종교적 이해나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성물이 아니라 단지 조각품에 불과하다. 즉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불상을 조성하는 분이 일반이라면, 단지 그의 손 재주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마음 상태를 살피는 것으로 일의 시작을 삼는다.
 참고로 부처님의 상을 조성할 때는 조성자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전하는 부처님의 외형적 특징을 근거로 하는데, 이를 간단히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라고 한다. 그 내용은 중아함경(中阿含經)과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전하고 있다.

불교조각(佛敎彫刻)은 예배의 대상과 중생 교화를 위한 교리 내용이나,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예배의 중심이 되는 불상을 들 수 있다.
 불상을 모신 건물은 교리에 따라 본존불과 양 옆에 보살상이 불단(佛壇) 위에 모셔져 있고, 그 뒤와 좌우에는 불화(탱화)가 걸려 있다. 천정에는 천개(天蓋)가 있어 장엄함을 더하고, 대들보와 내벽 등에는 하늘을 날으는 용과 극락조(極樂鳥), 아름다운 연꽃과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많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으며, 불단 위에는 부처님을 공
양하기 위한 향로와, 화병, 촛대 등이 놓여져 있다. 이외에도 음식이나 물, 차를 담는 정병(淨甁), 다기(茶器) 등이 배치되기도 한다. 넓게는 이 모든 것들이 불교조각에 포함되나 내용과 형식에 따라 세부적으로 공예, 회화등으로 나눠진다. 

무불상 시대(無佛像 時代)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그를 따르던 제자와 일반 신도들은 부처님을 기리는 마음에서 사리(sarira)를 봉안한 탑을 세우고, 생전에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곳에 기념물을 세워 진리의 가르침에 예배 공양하였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의 동서남북 탑문(塔門)과 난간(欄干)에는 부처님의 생애나 전생이야기(本生談,jataka)를 부조로 새겨놓았으나, 직접적인 부처님의 모습은 표현하지 않았고, 대신 탑이나 성수(聖樹), 윤보(輪寶), 삼보표지(三寶標指), 불족적(佛足蹟), 불좌(佛坐)등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시기를 일러 미술사적으로 무불상(無佛像) 시대라고 한다.
 부처님을 대신하는 상징적 표현은 실재(實在)하는 부처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처님의 일생 가운데 특히 중요한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어, 기능면에 있어서도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동시에 설화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징물들은 부처님의 생애나 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설명하는 곳에 빈번히 나타나며, 이 때 다른 인물들은 모두 사람의 형상이나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모습은 상징적인 표현으로만 나타내는데 이것은 보다 큰 순수성과 정신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고 볼 수 있다.

불상(佛像)을 모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두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타마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널리 중생을 안락하고 평화롭게 하신 덕을 찬탄하며, 또 자신도 그와 같이 깨달음을 이뤄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이다. 다음은 불교의 수행 가운데 하나인 관법(觀)이다.
 관(觀)이란 범어 vipasyana의 번역으로 비파사나(毘婆舍那) 등으로 음역(音譯)하며, 관찰(觀察)이라고도 한다. 또, 지혜(智慧)로 객관의 대상(對境)을 비추어 본다(照見)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관찰에는 그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누지만 여기서는 그 가운데 하나인 관불의 의미만을 알아보자.
 관불(觀佛)이란 부처님(佛)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보는 것으로 요컨대 마음(心)을 오로지 집중(專心)하여  지혜(智慧)로써 부처님(佛)과 대상(法)의 일정한 부분을 관찰(觀察)하고 염상(念想)하여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불상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붓다-프라미타(buddha-pratima)라 하는데, 프라티마(pratima)란 말은 모방 또는 모사를 뜻하는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불상이란 말은 본래 부처님의 참 모습을 모방, 모사한 것이라는 뜻에서 부처님의 형상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나타낸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 불상을 포함하여 보살상, 신장상, 조사상 등 불교에 나타나는 모든 존상을 통틀어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것이 언제 어디서 처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이미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증일아함경> 등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하늘 나라에 올라가 마야 부인을 위해 설법하시는 동안 부처님을 사모하던 코삼비 나라의 우다야나(Udayana)왕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져 공양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미술사적인 입장에서 지금까지 얻어진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불멸(佛滅) 후 5세기가 지난 서력 기원 전후 인도의 간다라(Gandhara) 지방과 마투라(Mathura) 지방에서 각각 불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상 출현(出現)의 배경(背景)과 관련해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무간도

 조혜숙

  영화관람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 오면서 왠지 속이 쓰린 듯 갑갑하였습니다. 얼음을 가득 넣은 콜라 한 컵을 숨도 쉬지 않고 마셨습니다. 왜 속이 편치 않은 걸까.....그렇구나! 영화 속 진영인(양조위)의 눈빛 때문이구나!
 얼마 전 개봉된 영화  영웅에서 대의를 위해서는 진나라 왕의 암살까지도 포기하는 사색적인 검객(파검)에서 보여 주었던 그 눈빛. 그러니까 이 따뜻한 봄날 그 배우의 눈빛에 매료되어 그만 무기력증에 걸린 것입니다. 짙고 두터운 눈썹 밑으로 슬쩍 쳐진 눈매, 온몸으로 원하면서도 이미 어찌할 수 없으리란 체념과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한 가닥 희망이 간절하고, 무심함을 가장한 표정과 짙은 피로가 그늘진 절망의 눈빛은 관객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고 맙니다.

 경찰학교에서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고 황국장에게 발탁되어 철저한 신분위장을 한 뒤 갱조직을 돌며 스파이를 하는 진영인(양조위)과 삼합회 보스 한침의 명령으로 경찰학교에 들어가 경찰 내에서 갱조직의 스파이를 하는 유건명(유덕화).

  진짜 경찰이면서 갱내의 스파이를 하는 비밀경찰인 영인과 갱이면서 경찰간부로 신분보장을 받으며 스파이를 하는 조직원 건명은 같은 스파이이긴 하지만, 질적으로 두 사람이 느끼는 고통에는 엄청난 차이를 있습니다.
영화 페이스 오프에서처럼 두 주인공의 얼굴만 바뀐게 아니라, 진영과 건명의 삶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마약 밀거래의 현장을 체포하는 사건에 있어서 두 사람의 스파이 역할은 강한 극 전류가 흐르는 긴장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경찰과 갱조직에선 서로 내부에 첩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건명은 첩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황국장을 미행하는 과정에서 황국장이 죽게 되자, 건명 자신의 보스인 한침까지도 죽이고 맙니다. 그것은 갱조직의 스파이가 아닌 진짜 당당한 경찰로서 남은 삶을 살아 가고픈 희망이지요. 하지만 유일하게 자신이 비밀경찰임을 증명해줄 수 있는 황국장의 죽음으로 영인은 위기에 몰리게 되는데...
 1980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 팬들이 너무나 좋아했던 홍콩 누아르를 다시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액션도 총격씬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누아르답게 전체적인 어두운 톤과 선명하지 않은 암울한 느낌이 있습니다.
 유위강 감독의 말처럼 무간도에는 홍콩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드라마가 있는 영화입니다. 무간지옥은 영원히 고통이 계속되는 지옥을 말하지요. 진영과 건명 두 사람중에 누구를 따라 이 영화를 보는가에 의해 무간도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도난주

   그동안 연재하던 창경궁 소개를 이 번호로 마무리할까 하니 한편으론 아쉽지만, 여유로운 마음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양화당은 여러 임금이 기거했던 생활 공간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박람회를 열면서 개조하여 전시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부공간을 들여다보면, 현재까지도 굴뚝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다다미가 깔려있습니다. 그리고 양화당 오른쪽 언덕을 중심으로 계단이 나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 아래로 내려다보면 외전과 내전이 한눈에 들어오며, 시선을 조금만 멀리 하면 종묘와 남산 등 서울의 중심까지 시야에 들어옵니다. (사진: 양화당에서 자경전 가는 계단)

 발걸음을 다시 언덕 쪽으로 돌려 왼쪽을 향하면, 지금은 나무들만 우거진 자경전 터가 위치해 있습니다. 자경전은 현 서울대학교 병원과 창경궁 사이에 나 있는 월근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건축물입니다. 이 곳은 사도세자의 제를 모시던 경모궁(현 서울대학교 병원 위치)에 한 달에 한번 다녀 올 수 있도록, 그리고 보고 싶을 때 항상 볼 수 있도록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그의 아들인 정조가 선물한 곳입니다. (사진: 고궁과 담장 밖의 현대식 건물)

오른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면 해시계와 괴석이 보입니다. 해시계는 당시 사회에서 중시하던 농사를 위해 계절과 시간을 살피던 필수적인 기계였습니다만, 현재 설치되어 있는 것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언덕을 내려가 북쪽으로 시선이 멈추는 곳에 춘당지와 내농포가 보입니다. 여기가~ 마지막 코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보고 있기도 하고 벤치에 앉기도 합니다.~ (사진: 해시계)

춘당지는 궁궐 안에 있는 인공 연못입니다. 전통 건축에 있어 둥근 것은 하늘을, 네모 난 것은 땅을 나타내는 것으로, 땅을 이야기하는 연못은 항상 네모의 형태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현재 보이는 춘당지는 둥글둥글 곡선으로 만들어져 특별히 어떤 도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 개방을 염두해 두고 일부러 연못을 확대 시켰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왕조의 사치스런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원성을 자아내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춘당지)

 춘당지 오른쪽으로 내농포가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춘당지에 포함이 되어 있어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내농포란 농사중심의 사회에서 임금님이 몸소 농민들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임금님 전용의 논입니다.
 궁궐의 이곳 저곳에는 아직 일제 강점기 때의 잔재들로 원형이 가려진 부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다행히 역사적 사료가 남아 있어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여전히 묻힌 채 지나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권국가로서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과 안내가 더욱 더 확대될 수 있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그 동안 부족하나마 궁궐 이야기를 읽어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 드립니다.  

 

 

受持
讀誦

 

 백유경

편집부

百喩經卷第一                                                                      尊者僧伽斯那撰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愚人食鹽喩 愚人集牛乳喩 
以梨打破頭喩 婦詐語稱死喩 渴見水喩 子死欲停置家中喩 認人爲兄喩 山羌偸官庫喩 歎父德行喩 三重樓喩 婆羅門殺子喩 煮黑石蜜漿喩 說人喜瞋喩 殺商主祀天喩 醫與王女藥令卒長大喩 灌甘蔗喩 債半錢喩 就樓磨刀喩 乘船失釪喩 人說王縱暴喩 婦女欲更求子喩
 

(三) 以梨打頭破喩
 昔有愚人頭上無毛.時有一人以梨打頭.乃至二三悉皆傷破.時此愚人默然忍受 不知避去.傍人見已而語之言.何不避去 乃往受打致使頭破.愚人答言.如彼人者 교慢恃力癡無智慧.見我頭上無有髮毛 謂爲是石.以梨打我頭破乃爾.傍人語言.汝自愚癡云何名彼以爲癡也.汝若不癡 爲他所打.乃至頭破不知逃避.比丘亦爾.不能具修信戒聞慧.但整威儀以招利養.如彼愚人被他打頭不知避去.乃至傷破反謂他癡.此比丘者亦復如是

 
3. 배(梨)에 맞아 상처 난 머리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과일(배)을 가지고서는 이 사람의 머리를 두 세 번 때려 상처를 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맞으면서 단지 참을 뿐 피할 줄을 몰랐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는 말하였다. "왜 피하지 않고 맞아서는 머리를 상하게 하는가." 그러자 어리석은 이가 대답하였다. "저 사람은 힘만 믿어 교만하여서, 어리석어 지혜가 없다. 그는 내 머리에 털이 없는 것을 보고는 돌이라 생각하여, 배를 가지고 내 머리를 때려 상처를 낸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 " 어리석도다!. 만약 네가 어리석지 않다면, 왜 남에게 얻어맞으며 또 머리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피할 줄 모르는가."

 계율과 지혜를 닦지 않으면서, 오직 위엄만 갖추고 이익만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남에게 맞고도 피할 줄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머리에 상처를 입고도 도리어 남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과 같다.

 

(四) 婦詐稱死喩
昔有愚人.其婦端正.情甚愛重.婦無直信後於中間共他交往.邪음心盛欲逐傍夫捨離己서 於是密語一老母言.我去之後.汝可齎一死婦女屍安著屋中.語我夫言.云我已死.老母於後伺其夫主不在之時.以一死屍置其家中.及其夫還.老母語言汝婦已死.夫卽往視信是己婦哀哭懊惱.大적薪油燒取其骨.以囊盛之晝夜懷挾.婦於後時心厭傍夫便還歸家.語其夫言.我是汝妻.夫答之言.我婦久死.汝是阿誰妄言我婦.乃至二三猶故不信.如彼外道聞他邪說心生惑著.謂爲眞實永不可改.雖聞正敎不信受持

 
4. 거짓으로 죽은 여자
 옛날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자기의 부인을 진정으로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 부인은 진실하지 못하여,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였다. 그리곤 음탕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제 남편을 버리고 딴 남자에게로 가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어떤 노파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내가 떠난 뒤에 어떤 여자의 시체라도 좋으니, 그 시체를 가져다가 우리 집 방에 두고 내 남편에게 말하시오. 나는 이미 죽었다고." 노파는 그 여자의 남편이 없는 때를 엿보아 한 여자의 시체를 그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노파는 말했다. "네 아내는 이미 죽었다." 남편은 시체를 보자 그것이 자기 아내라고 믿고 슬피 울면서 괴로워했다.
 남편은 장작을 쌓고 기름을 부어 시체를 태우고는 그 뼛가루를 자루에 담아 밤낮으로 안고 있었다. 그 뒤 아내는 뭇 남자들이 싫어져 집으로 돌아와서는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아내입니다." 남편은 대답했다. "내 아내는 벌써 죽었다. 너는 누구인데 내 아내라고 거짓말을 하는가." 그 아내는 두 번 세 번 거듭 말했으나, 남편은 결국 믿지 않았다.

 이것은 외도들이 다른 사람의 삿된 말을 듣고 마음이 미혹해져,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한 나머지, 고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설사 바른 법을 들어도 믿고 받들지 않는 것과 같다.

 

 

 

절기
풍속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

편집부

*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며, 또 이 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한다.
삼짇날 놀이 가운데 화전 놀이(꽃 놀이)가 있는데, 떡과 술을 준비해 산수 좋은 곳에서 짝을 지어 노는 것으로, 일명 꽃놀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절음식으로는 화전(花煎)과, 수면(水麵)이 있다.  화전이란 진달래 꽃을 찹쌀가루에 반죽한 전을 말하고, 수면이란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꽃 물에 넣어 꿀을 탄 다음 잣을 넣어 만든 것을 말한다. 또 부드러운 쑥을 따, 찹쌀가루에 섞은 다음 쪄서 만드는 쑥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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