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7(2003)년 4월호 Vol.3,No.27. Date of Issue 1 Apr ISSN:1599-337X 

 

 

 

 

 

 

 

 

 

 두타행

범수

 출가자의 생활 원칙이었던 사의법(걸식, 분소의, 수하좌, 진기약)에 각각 예외 조항을 둔 것을 보면, 불교의 수행은 단순한 고행이나 원칙만을 고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두타행*'이라고 불리는 수행방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고타마 부처님 당시에도 존중되었던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란야처(兒蘭若處)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곳에 머문다.(번잡하지 않은 곳에 거처한다.)

 

2

상행걸식(常行乞食)

항상 걸식으로 생활한다.

 

3

차제걸식(次第乞食)

걸식할 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한다.

 

4

수일식법(受一食法)

하루에 오전 한끼만 먹는다.

 

5

절량식(節量食)

과식하지 말것.(음식을 조절한다.)

 

6

중후부득음장
(中後不得飮漿)

정오가 지난 후에는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7

착폐납의(著폐衲衣)

해지고 떨어진 옷을 입는다.(검소한 옷을 입는다.)

 

8

단삼의(但三衣)

상의 하의 외의의 세벌 옷만을 지닌다.

 

9

총간주(塚間住)

무덤 곁에서 거주한다.(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머문다)

 

10

수하지(樹下止)

나무 밑에서 머문다.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머문다)

 

11

노지좌(露地坐)

노지에 머문다.(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머문다)

 

12

단좌불와(但坐不臥)

항상 앉는 자세를 취하며 눕지 않는다.

 

 이상은 불교의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인 12두타행의 내용으로써 요약하면, 사의법의 '걸식, 분소의, 수하좌, 진기약'에 각각 해당된다. 위 인용문에서 ②③④⑤⑥은 의식주(衣食住) 가운데 식(食)인 걸식을 나타내며, 또한 그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이다. 다음 ①⑨⑩⑪⑫은 의식주 가운데 주(住)에 해당되며, 이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이다. 그리고 ⑦⑧은 의식주 가운데 의(衣)이며 이 역시 구체적인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단순히 제시된 항목만을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불교의 수행 방법은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러운 몸 동작이나, 음식을 끊거나, 행하기 힘든 행위를 조장한다든지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집착하여 그로부터 부림을 당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이것은 마치 진흙 속에 있더라도 물에 오염되지 않는 연꽃처럼 일상 생활에 물들지 않는 마음 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과 몸가짐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12두타행과 사의법이 제시되고 있는데, 임의로 이를 간략히 줄여 말한다면 지족(知足 분수를 지켜 족한 줄을 앎)일 것이다. 따라서 어디에 어떤 상황으로 거처하던 지족할 줄 안다면,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의 호(
26호)에서 " 제바달다의 제안은 원칙을 위한 엄격주의 내지, 고행만을 위한 고행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중도*의 원리에 입각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루셨다." 고 하였듯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올바른 생활방법은 형식에 따른 행위의 규제가 아니라, 자각적인 몸 가짐이다. 예를 든다면, 마을에 거처하던 산 속에 거처하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올바르게 제어(制御 조절)할 줄 안다면, 모두 선정(깨달음)을 위한 곳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세속 집에 거처하든지 사찰에 거처하든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주체적인 마음 가짐이 문제인 것이다. 이 역시 간단히 줄여 말한다면 주체적인 반성을 기초로 한 주체적인 몸가짐일 것이다.
 이상 '주체적인 반성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몸가짐과 지족할 줄 아는 삶'을 설명하는 사의법과 이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인 12두타행에 대하여 3회에 걸쳐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그러나 각자 처한 상황을 무시하거나, 현실 상황을 외면한 채, 일괄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한다든지, 무조건적으로 따라 하기란 분명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 등을 벗어던지고 수행을 통한 깨달음과 자비를 실천하고자 뜻을 세웠거나, 세상에 거쳐하며 고타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라면, 사의법이나 12두타행에서 제시하는 정신만이라도 유지 계승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 두타(頭陀)란 제거, 세척을 의미하는 두타의 음역으로, 어려운 수행을 감내하는 것이다. 특히 의식주 등에 대한 집착이나 번뇌를 버리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것으로, 이의 실천을 두타행(頭陀行)이라고 한다.

 

 

 

 흐르는 것은-

문옥선

  흘러가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젊음, 사랑, 대기(大氣), 물, 정보(情報), 상품(商品), 돈..........
청춘을 잃으신 분들한테의 흐름은 젊음일 것이며, 이별한 연인들에겐 사랑이요, 배고픔과 헐벗음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돈일 것이다. 바람 부는 강둑에 걸터앉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잎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이들에겐 물이요, 바람이며, 고뇌하는 기업가에게의 흐름이란 정보요 상품일 것이다. 만물을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와 그들을 통하여.... 또한 우리 몸도 흐름이 원활해야지만 건강하고 몸에 병도 없게 된다. 적당한 음식섭취와 규칙적인 배설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많은 식사량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그리고 배설의 고통을 말이다. 그런 일을 겪을라치면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면서도 다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망각은 또한 흐름의 원리가 아닐런지.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정이란 것이 흐른다. 그 정은 물론 서로 부딪치며 또 함께하며 쌓이기도 하고 정담을 주고받으며 깊게 쌓이기도 한다. 정은 또한 주는 마음 받는 마음이 함께 어울러져 따뜻한 강물이 되어 흐르는데 사람과 사람사이의 정이란 것이 참 묘한 것 같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지기 때문이다. 흔히들 부부사이에는 사랑보다는 정으로 산다고들 한다. 그러니 그 정이란 말에는 사랑도 미움도 질투도 배신도 온갖것이 다 포함된 세월의 흐름 덩어리일 것이다. 그 정은 또한 베게머리 송사는 없을지라도 오래 살다보면 눈빛으로 익숙한 언행으로 알게 되어지는 타인을 익는 마음에서 쌓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된 부부일수록 그런 말을 하기도 한다. 꼭 부부사이가 아니더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정만큼 따뜻하고 훈훈한 말은 없는 것 같다. 오래되어서 쌓이게 되는 정도 물론이지만 단 한번을 만나더라도 마음으로 인간의 깊은 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따뜻한 말 한마디는 속담에도 있듯, 천 냥 빚을 갚으리만치 가슴속의 응어리를 녹이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마도 상대를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에서이지 않을까 싶다. 오랜 만남으로 인하여 정이 쌓임은 당연한 이치겠으나 단 한번의 만남에도 그런 따뜻한 정을 간직하게 되었다 할라치면 그건 상대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남다른 탓이리라. 어쩌면 비슷한 내면을 지닌 사람들일수록 더 깊게 상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오래 살아온 것처럼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사람이 꼭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다고, 좋은 의복에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온갖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루를 굶더라도 단 한마디의 따뜻한 말에 더 행복할 수도, 누추한 곳에 살면서 문화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가슴속의 문화, 솔향기 풍기는 대화를 그리워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참 편안한 사람,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 함께 차 한 잔만을 나누었지만, 수없는 얘기가 오고 갔으며 살아온 얘기가 다 설명되어질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굳이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아도, 말하고 싶어지는 상대, 그런 사람은 내 삶을 이해하고 결코 비난하지 않으며 따뜻하게 감싸줄 것 같은 사람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나를 질려하지 않게 하면서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다.
 근래에 내게는 아주 귀중한 만남이 있었다. 가슴속 밑바닥의 마음이 우러나는 그래서 그것을 마음으로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그런 귀한 만남이... 이 만남은 먼 훗날 내가 많이 힘이 드는 어떤 날에 조금씩 추억의 뚜껑을 열면서 내 마음을 달래볼 수 있을 것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손끝에서 타인의 의중을 헤아리는데 둔하기만 했던 나였건만 절절한 고마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살아가면서 감동을 받는 경우는 참 드물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건 내가 그렇게 받아보질 못해서 이기도 하다.
 부끄럽게도 난 남에게 감동을 줄만치 상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본 적은 별로 없다. 삶이 고단하여 남의 의중을 헤아리고 베풀 만치 매사에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기에. 그러나 이런 마음은 꼭 생활의 여유를 가져야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눈을 조금 뜬 요즘에야 느낀다. 그건 지극한 마음, 넉넉한 마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마음,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란 것을. 또 한편으론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주고 싶은 마음도 받아주는 상대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날 이후 고맙고 감사하고 그리고 따스한 마음이 내 안에 감동을 느낀다. 그건 내가 그렇게 따뜻한 환대를 받은 까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타인을 배려하는 진실한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그처럼 높낮이가 없이 배려하는, 그처럼 진실하게 대하는 사람을 드물게 보아왔다. 사람이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믿고 존중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요즘 같은 세상, 누구나 색안경을 끼고서 바라보는 이 세상에 그렇게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은 큰마음이리라. 나 역시나 따스한 마음이 우러나게 대할 수가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그러나 이런 마음 역시나 흘러갈 것이란 것 잘 안다. 언제나 한결같을 수는 없다는 것,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은 물처럼, 대기처럼 흐르기에 언제나 항상하고 언제나 좋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날씨만 해도 해가 나거나 비가오거나 어느 한 가지만 좋아할 것 같지만, 해가 쨍쨍한 날이 좋을 적도 있고, 어두침침하고 흐릿한 날, 낮게 내린 하늘을 바라보는 것,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일수 있기 때문이다.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 갈잎 날리는 소리 오솔길에 낙엽 구르는 소리를 들려주는 그런 바람 부는 날이 있어서 좋다. 하늘가에 펼쳐지는 무지개 빛을 좋아하기도 하고 비 내리는 날은 소리 내어 울 수 있어서 좋다.  별스럽지 않은 추억일망정 눈 내리는 날은 주인공되어 흩날리고 싶기도 하다. 늘 해가 나는 맑은 날만이 나를 키우고 성장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달도 별도, 어둠도, 비도 바람도 좋아하고 말없이 바라보는 저 산도 흐르는 강물도 사랑한다. 날씨에 따라 입는 옷도 먹는 음식의 선호도가 다 다른 만큼 그 나름대로 즐기지를 않는가. 그런데 꼭 맑은 날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마치 낮만 있고 밤은 없으며, 삶만 있고 죽음은 없다는 이치와 뭐가 다르겠는가. 그건 살면서 맑은 날이 있는가 하면 비 오고, 눈보라치는 날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지 않는가.  똑같지 않다는 것,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흘러간다는 것. 또한 그 마음이란 것이 대기처럼 물처럼 어느 한 곳에만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 좋았다가 싫어지고 싫었다가 좋아지는 일들이 우리네 인생에서 반복되는 것이란것을 잘 안다.  그러니 어느 것에, 그 무엇에 집착을 한다는 말인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 그런 마음일 때는 받는 사람 역시나 그 마음을 헤아릴 것이다.  그건 주는 자의 마음과 받는 자의 마음이 함께 할 때 줄 수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리서 싫어질 때를 대비하여 조금만 좋아하고 반대로 싫다고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삶을 거슬리는 행동일 뿐 훗날을 위한 배려는 아닐 것이다. 싫어도, 좋아도 결국 나와의 인연이고 그 인연은 만나서 그 인연이 다할 때까지 내 주위를 맴돌 것이다. 불가에서 전하는 말 "오는 사람 잡지 말고 가는 사람 붙들지 말라"고. 올 때는 올만한 인연이, 갈 때는 갈만한 인연이 있는 것, 그래서 오고 가는 것, 이것이 우리네 인생사인 것 같다. 가는 인연에 연연해 너무 슬퍼함도 없이 마주치는 인연을 거부함도 없이 담담히 맞고 보내는 삶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이 잘 사는 방법일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함께 자리했던 이들한테 물어본 말이 생각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고선. 어떤 이는 "돈 많이 벌어서 폼 나고 재미있게", 또 다른 이는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직장생활에 충실하며 존경받는 남편과 아버지로 사는 것"이, 또 다른 이는 "훗날에 다른 이한테 저 사람 참 잘 산 사람이란 소리를 듣고 싶다"는 얘기도, 또 다른 어떤 이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고 도리어 물어보기도 하면서, 짐짓 장난스럽게 답들을 했으나, 요약을 하자면 이렇게들 말한 것 같다.  "잘 산다는 것은 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또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없는 일, 이룰 수 없는 일들을 더 갈구하고 더 큰 의미를 부여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누구나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보다는 자발적으로 내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일을 더 잘하고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나에게 불만스럽고 고통스럽다고 여기면 그게 바로 지옥 같은 삶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을 느끼면서 자기의 일을 즐겁게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뭐든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듯 흐르는 마음도 그런 것 같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서 존중한다는 것 말이다. 돌고 도는 세상이다. 따뜻한 마음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하는 일일까?  그렇다면 그것 또한 잘 사는 방법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일까. 나도 즐겁고 타인도 즐겁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나로 인하여 타인이 부담스럽다거나 불편하다면 그건 결코 잘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축적하는 것도 잘 사는 일일 것이요,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도 잘 사는 일일 것이다. 잘 사는 것을 나더러 묻는다면 난 공기 중에 무수히 떠도는 부를 잡으라고 말하고 싶다. 친절, 배려, 따뜻한 눈빛, 부드러운 말 한마디, 온화한 미소, 염려하는 마음들을. 그래서 허공 중에 떠다니는 그런 무수한 부의 덩어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 그런 부자가 되고 싶다. 마음이 너른 자가 되어서 힘들고 외로운 자에게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를 아끼지 않고 주고 베풀 수 있는 그런 가교가 되고 싶다. 따뜻한 봄날에 창가에 흩어지는 햇살을 바라보면서 문득 삶이 아름다운 봄날 같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성주

             불교의 보시(布施)사상과 사회복지
                                                       -성주-
Ⅰ. 서론
Ⅱ. 개념정의
Ⅲ. 불교사회복지사상과 실천방법
Ⅳ. 불교사회복지사상과 실천의 경전적 근거
 (1) 자비사상
 (2) 복전복리사상(福田福利思想)
 (3) 보시사상(布施思想)
Ⅴ. 결론

Ⅲ. 불교사회복지사상과 실천방법
 
 불교의 복지는 '불타(佛陀)의 사상을 바탕으로 민중들의 행복을 위해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고유개념으로 사용된다. 반면 불교사회복지란 일반적인 사회복지의 한 분야로 한정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존의 불교 사회복지사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교복지의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불교에서 복지(welfare, svastyayana)와 관련된 용어를 살펴보면, 팔리어(巴利語) 경전에 복지(sothana), 행복(sotthiya), 안태(siva), 길운(siri), 길서(Bhadda), 길상(Marigala) 등이 있는데, "행복은 외부로부터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후쿠하라 료겐(福原亮嚴)·스기모토 카즈요시(杉本一義),《佛敎福祉學》 京都: 永田文昌堂, 1967, pp.9∼10.> 이와 같이 불교복지의 개념은, 개인의 정신적 물질적 욕구충족에 중점을 두는 서구의 사회복지 개념과 사상적 차이를 가진다.
 불교에서는 업(karma)을 설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인과관계에 따라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초래하므로 노력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행복도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란 뜻으로 행복 창조의 행위를 복행(福行)이라고 한다.
 미치하타 료슈(道端秀)는 <중국불교와 사회복지사업>에서 불교의 사회복지이념으로 자비, 보시, 복전(福田), 보은사상 그리고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의한 생명존중, 평등사상, 방생의 사상, 대승의 보살사상 등을 설명하면서 각기 그에 대한 근거를 경전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모리야 시게루는 <불교사회사업 연구>에서 "불교복지의 사상으로 실천의 근간이 되는 자비사상과 자비의 실천에 목적을 두는 복전(福田)사상을 들고 있는데, 2복전, 3복전, 4복전, 7복전, 8복전 등 각각의 복전에 따른 구체적인 구제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모리야 시게루(守屋茂), <佛敎社會事業の硏究> 京都:法藏館,1971, pp.12∼16; pp.69∼78; pp.11∼117.  또한 자비의 실천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써 사제(四諦) 또는 사섭법(四攝法)이라고 하는 시스템을 강조하고, "불교성립의 근본은 자비로 일관되어 있으므로, 자선이나 구제의 행실을 전개한 자취를 찾는 일은 불교사회사업의 성격을 구명하는 것"이라 전제한다. 그리고 불교사회사업의 사상적 기반을 불교의 세계관인 연기관(緣起觀)에서 찾고 있는데, 불법의 핵심을 이루는 자비를 여러 경전에서 근거를 들어 그 실천적 성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불교사회복지의 의의'에서는 불교사회복지의 활동은 대승정신에 의한 사회복지활동이므로 현대사회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에 대응할 대승정신의 본질적 이해와 내면적으로 깊이 있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사회복지의 이념으로 무상관(無常觀)과 상호의존의 무아관(無我觀)을 인생관의 기점으로 전제하고 있다.
 개개의 인간은 관계의 경험적 영역 가운데서 부분적이고 의존적이며 일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고, 불안과 곤란이 발생하는 근원은 인간존재가 갖는 구조적 결함 때문임을 통찰한다. 이와 같은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됨으로써 서로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봉사하는 인격적 관계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진실되게 살려는 인간의 태도이며, 이때 비로소 종교인으로서의 정신적 태도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험영역 속에 부분적이고 의존적이며 일시적인 존재임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관심에 따라 여러 가지 경험에 부분적으로 전념할 뿐 전체를 잊으며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마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불교사회복지활동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이러한 인간관계의 상호의존성을 분명히 인정함으로써 공동체 속에서 인격적 관계를 지향하여 서로의 가치를 고양시키며 인간적 결합을 유지하고 확충하는 데 있다.
 불교사회복지가 지향하는 분야에 대해선 가정, 경제, 건강, 도덕, 종교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불타의 근본교설인 <아함경>을 정리, 연구한 <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을 살펴보면 "오손감(五損減), 오원만(五圓滿)"의 다섯 가지 불행과 행복을 설하고 있다. 즉, 친속손감(親屬損減)과 원만을 가정적 복지, 재부손감(財富損減)과 원만을 경제적 복지, 병손감(病損減)과 무병원만을 건강적 복지, 계손감(戒損減)과 원만을 도덕적 복지, 견손감(見損減)과 원만을 종교적 복지로 간주하고 있다. 이를 통해 불교복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가정복지를 우선으로 해서 계원만(戒圓滿), 견원만(見圓滿)의 정신적 복지를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인간의 정신과 육체 및 물질의 원만을 복지의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복지사상은 여러 요소가 있지만, 여기서는 3복업(福業)으로 복지의 행위를 설명한다. "복인(福因)이 복행(福行)에 의하여 복과(福果)를 초래하므로 이것을 복업(福業)이라 하며, 여기서 복업이란 복지(행복)를 의미하는 것으로 복업에는 3복업이 있다. 여기서 3복업이란 평등, 사유, 보시의 정신을 말한다." 東
晉 瞿曇僧家提婆譚,<增一阿含經> 券12, <<大藏經>> 2, p.602 中; "有此三福之業 云何爲三 施爲福業 平等爲福業 思惟爲福業."
 '평등(平等)의 정신'이란 죽이거나 훔치거나 하지 않고 악행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아서 저지르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기꺼이 아낌없이 보시하고, 언어를 유화하게 하여 타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 자신이 선행을 닦아서 망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지성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유(思惟)의 정신이란 사사유(邪思惟)에 대한 정사유(正思惟), 즉 진실한 도리를 생각하는 것으로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평등을 가치 있게 하는 것으로 사유와 평등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보시(布施)의 정신'은 심안(心眼)이 열린 사람이 성직자, 빈궁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 등에게 보시하여 음식, 의복, 의약 등을 필요해 따라 아낌없이 준다면 그것이 복업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시에는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의 세 종류가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실천의 종교로서 궁극의 행복을 구하는 그리고 복지를 위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복지와 관련된 불교사상을 추려 보면, 연기론을 바탕으로 자비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자비실천의 근거가 되는 복전사상과 복밭에 뿌리는 종자에 해당되는 보시사상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보은이나 생명존중사상을 언급한 경우도 있으며, 대승불교의 복지이념으로는 보살사상이 자주 제시되고 있다.
 (총 5회에 걸쳐 싣도록 하겠습니다. 5-3)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조혜숙

 "사회적 관계가 사회적인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영화를 보면 그 사회적 통념이라는 것,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 되어진 것은 결국 사회의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된다는 어쩔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윤락이 직업이긴 해도 나름대로 휴일엔 봉사도 하고 착하게 살고자 하는 한 윤락여성이 길에서 집단강간을 당하여 전치7주의 상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직업의 특수성을 들 먹이며, 수사에 무관심합니다. 상해를 당한 윤락녀의 동료인 고은비(예지원)는 여기저기 호소를 해보지만, 도리어 멸시와 조롱을 받고 억울하고 분해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마침 그 지역에서 여당과 야당의 원내 과반수확보를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보궐선거가 열립니다. 고은비는 그야말로 분한 마음

 하나로 아무배경이나 지식도 없이, 같은 동료인 강세영(임성민)의 도움과 자문을 받아가며,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게 됩니다. 하지만 윤락녀의 국회의원 입후보라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 사회적 편견과 냉대, 멸시와 모욕으로 고은비와 함께 동료들은 시련에 부딪치게 됩니다.
 자신들의 존엄성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그'사회적인 의식'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쳐 깊은 절망과 회의속에 빠지는 고은비 일행은 윤락이 직업인 자기들도 국민이며, 국회의원의 권력 역시 자신을 포함한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각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헌법 제1총강 제1조인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치면서 좌절을 딛고 한 걸음씩 힘겹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러가지 에피소드 중에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인용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포르노 배우 출신인 치치올리나, 윤락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에 대한 뻔뻔한 정당성, 윤락가를 깨끗이 청소하고 싶은 여성경찰서장을 통해 성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파는 사람도 있다는 입장, 이 사회의 진보적 역활을 한다는 386세대인 백성기라는 정치부기자를 통해 언론유착 등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정치인의 부패, 정치와 조폭, 언론과의 유착등등...
 최근 사회적으로 더욱더 강도 높게 형성되고 있는 비판의식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한 채 흉내내기 정도에 그쳤다고 치더라도, 윤락녀가 출마하여 혼탁한 기존 정치세력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파격적인 설정 자체는 유쾌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내용이나 결말보다, 풍자의 수위와 범위에서 사회문제를 상기시키며, 제법 많은 부분을 건드려 보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 북촌

도난주













  아침이면 창을 열고 밖으로 손을 뻗어 기온을 느껴봅니다. 마치 온도계를 끓는 물 속에 넣어 온도를 제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스웨터를 한 겹 더 껴입어야 할만큼 쌀쌀한가 아닌가를 판단하곤 합니다. 하지만 요즘같은 환절기 때는 잘 통하지 않는 방법이란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촉수로 느끼는 기후 때문에 가끔은 밖에서 오들오들 떨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교 기숙사에 있으면서 이 이외에는 달리 간단한 방법이 없어 오늘도 창을 열고서는 "아! 봄이다 따뜻하네"하고  또 한번 자신의 판단에 속아줍니다. 기분 좋게요^^
 
그 동안 연재하던 '창경궁'을 마감하고 이 번호부터는 서울 종로구 가희동(鍾路區 嘉會洞)일대, 일명 '북촌(韓屋群)'을 구성하고 있는 전통가옥(韓屋)과 화랑등을 둘러 보려고 합니다. 이곳은 봄바람이 불고 갑자기 먼 하늘을 쳐다보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 때 추천하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혹 종묘와 창경궁을 돌아보고 좀더 여유가 생긴다면, 인사동의 거리를 둘러본 다음 지하철 안국역 현대본사 건물 앞에서 시작되는 북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의 북촌'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릴 가운데, 먼저 이번 호에는 현재의 북촌과 같은 모습이 되기까지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었나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북촌은 600년 역사도시 서울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전통 한옥 촌입니다. 특히 경사면 위에 구성된 주거지라서 그런지 한옥의 처마곡선을 느낄 수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규모 현대식 건축물인 현대본사와 공공기관인 헌법제판소의 출현, 그리고 90년대말 풀어진 규제를 틈타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다세대 주택들 때문에 마치 한복 두루마기에 서양식 바지라고 할 만큼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북촌은 그 사료적 중요성 때문에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보존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주민들의 자발적인 동의하에 그와 같은 북촌의 미래상이 자리 매김 되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랍니다.
 1980년대 규제 위주의 정책(미관지구지정)은 북촌을 한옥형식 그대로 묶어 두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집들은 점점 노후화 되어갔으며, 덩달아 지가는 하락되고 결국 이러한 영향 때문에 불량주택지로 인식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 곳곳에서 일던 개발 붐은 오히려 북촌 주민들에게는 고통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유독 북촌만 개발에서 제외되고 또 그에 따라 재산권 행사마저 제약이 뒤 따르자 쌓여만 가던 불만은 결국 1990년대 말 서울시장과의 대화에서 폭발하였습니다. 다급해진 서울 시장은 잠시동안 북촌에 대한 규제를 풀어주게 되었으며, 이 때를 틈타 반 정도의 한옥이 사라지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다음호에서 그에 대하여 살펴볼 예정이지만 미리 말씀 드린다면, 북촌과 같은 전통 한옥지대에 어울리지 않는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선 것은 공공시설의 설립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제구제금융인 아이엠에프가 시작될 무렵
다세대주택은 북촌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나 개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경관과 전통적 장소성, 그리고 교통 등에 더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주민들에 의해 위원회가 결성되고, 또 서울시에 북촌의 전통적 장소성의 보존을 위한 지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서울시정 개발연구원과 도시개발공사와 함께 북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북촌의 고유성 유지로 가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옥을 서울시에 등록하면 최대 3000만원까지 내부 개조비용을 제공하며, 여러 공공시설들의 확보에 주력하는 해결방안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북촌을 거닐다보면 여러 곳에서 드르럭~ 거리는 기계소리를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보수하고 있는 한옥들이 많아서 이지요.
그럼 다음호엔 현대본사에서부터 시작되는 북촌을 여행해 볼까 합니다. 

 

 

 

 말레이시아(Malaysia)와 싱가폴(Singapore)

장남지

   올해 1월 25일부터 약 10일동안 말레이시아(Malaysia)와 싱가폴(Singapore)을 둘러보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2박 3일은 콰알라룸프(kuala lumpur)라고 하는 말레이시아의 수도를 둘러봤습니다. 짧지만 조금이나마 말레이시아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폴과 접해 있어서 싱가폴에서 출발하게된 저는 버스를 타고 약 4시간이 걸린 뒤 말레이시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시사철 더운 지방이라 말씀드리지 않아도 대충 짐작하시겠죠?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크다고 여겨지는 나무들이 그 나라에서는 그냥 보통 정도의 크기가 되더라구요.

 잦은 소나기로 말레이시아를 구경할 때 작은 우산은 필수랍니다. 전형적인 동남아 인들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모습 아시죠? 짙은 쌍꺼풀만큼이나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말이죠. 머리에 두건을 두른 사람들도 있었고 그냥 평상복차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언어는 쉽게 말하자면 영어의 발음상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비슷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한번 읽어보기만 해도 무슨 말인지를 대충 이해할 수 있겠더라구요. 예를 들자면 숫자 5에 해당하는 /five/가 /faiv/ 이런 식으로 말이죠.
  
말레이시아는 대체적으로 수출과 관광의 국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열대지방이라 과일이나 야채는 아주 많은 양을 생산하기 때문에 수출을 하고 있었고,

또 현지에서는 너무 흔한 과일들이어서 싼 값에 아주 신선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당도는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또 왠만한 상인들이라도 영어에 아주 능통 할만큼 이 나라는 관광 문화에 익숙한 것 같았습니다. 특히 수도인 콰알라룸프에는 볼거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Twins Tower와 수도를 대표하는 KL Tower도 있었고, 수도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차이나 타운도 없는 게 없을 만큼, 여러 가지 신기한 것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Twins Tower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하나씩 만들었다고 하니까 자부심도 아주 컸죠. 이 빌딩은 맞은편 빌딩으로 건널 수 있도록 중간쯤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루에 두 차례씩 시간을 정해 무료로 그곳까지 올라 갈 수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나라여서 인지 서비스도 좋고 사람들도 아주 친절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관광객들에게 적대감을 표하는 사람도 있고, 또 여행객들은 범죄에 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긴장 또한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제로 격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콰알라룸프에 대표적인 볼거리인 두 개의 타워 중에 KL 타워라는 곳을 방문하기 위해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은 늦은 오후이긴 했지만, 워낙 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한낮이라고 생각될 밝았습니다. 좀 한적한 곳이었지만, 친구와 지친 몸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엔 오스트리아인 가족 3명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겪은 상황이긴 하지만, 순간적으로 겪은 일이라 전후 상황을 확실히 기억하지 못해 친구가 이야기한 대로 전하겠습니다. 한 말레이시아 소년이 제 앞을 지나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손가방을 낚아채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이라 너무 놀랬고 가방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뒤에 있던 외국인 아저씨가 우산을 들고 와서 나를 도와주었고 결국 그 소년이 잡아 끌던 가방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그 소년은 앞서 기다리고 있던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도 가방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제 오른손에는 영광의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 후 친구가 그러는데 그 소년이 신문지 안에 감춰두고 있던게 칼같이 보였다고 하네요. 휴우~ 그걸 알았으면 가방을 놓아버렸겠지요....
 아주 위험한 경험이었지만, 한편으론 그 위험했던 만큼 느끼고 또 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너무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한 것같기도 합니다.  

 

 

 

 매화향기 안고서

황진희

   지리산 한 귀퉁이에 산청 매실 마을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그곳에서 농장을 하십니다. 작년에 매실 따러 가서 너무 좋았던 기억에 올해도 또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매화가 가득 핀 요즈음, 그 향을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깝다고 꽃 나들이 가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자동차 두 대에 8명이 나누어 타곤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산청. 매화나무가 맞는지, 매실나무가 맞는지 부터 시작해 매화의 향기는 코로 맡는게 아니라, 귀로 들어야 한다는 짧지만 알찬 강의를 머리에 새기며 농장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약간의 산들바람이 불자 아쉬움을 남기며 향기가 코 끝을 스쳐 갑니다.
 귀로들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안되는지 여자들의 탄성에 향기는 코로만 전해지고...그러다 깨끗한 공기와 발길이 드문 땅에서 솟아난 쑥들을 보자, 너나 할 것 없이 아줌마들은 쪼그리고 앉아 쑥을 캐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매화 향이 은은하고 좋다 하나 흥에 겨워 들뜬 마음엔 그 향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쑥 향기만 온 몸으로 젖어 들었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쑥을 캐고 나니, 들고 간 봉지마다 쑥이 그득하고, 모두의 얼굴에는  잠시나마 가족과 자잘한 생활을 잊은 듯 아주 평화로운 미소가 스며 있었습니다.
 직접 만든 메밀 묵과 부산에서 소문 난 떡집에서 해 간 떡, 과일...배가 불러 짜증을 내면서도 한 젓가락을 더 거드는 걸 보면서 아줌마의 힘이라는게 느껴 지더군요. 늦게 서야 집에 도착했지만, 다음날 아침 식탁에 올린 쑥국을 본 가족들은 오랜만에 진짜 쑥국 다운 국이라고 너무 맛있게 먹어 주는 바람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5월경엔 다시 매실을 따러 가야겠어요. 

 

 

受持
讀誦

 

 백유경

편집부

 

百喩經卷第一                                                                      尊者僧伽斯那撰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愚人食鹽喩 愚人集牛乳喩
 以梨打破頭喩 婦詐語稱死喩 渴見水喩 子死欲停置家中喩 認人爲兄喩 山羌偸官庫喩 歎父德行喩 三重樓喩 婆羅門殺子喩 煮黑石蜜漿喩 說人喜瞋喩 殺商主祀天喩 醫與王女藥令卒長大喩 灌甘蔗喩 債半錢喩 就樓磨刀喩 乘船失釪喩 人說王縱暴喩 婦女欲更求子喩

(五) 渴見水喩
過去有人.癡無智慧.極渴須水.見熱時焰謂爲是水.卽便逐走至辛頭河.旣至河所對視不飮.傍人語言.汝患渴逐水.今至水所何故不飮.愚人答言.君可飮盡.我當飮之.此水極多俱不可盡.是故不飮.爾時衆人聞其此語.皆大嗤笑.譬如外道 僻取其理.以己不能具持佛戒.遂便不受.致使將來無得道分流轉生死.若彼愚人見水不飮爲時所笑.亦復如是


 5. 목마른 사람의 어리석음
 옛날 미련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리석어 지혜가 없었다. 어느 날 목이 매우 말라 물을 찾았다. 마침 더운 때라서, 강물 위의 아지랑이를 보고는 그것을 물이라 생각하고 곧 강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강에 이르러서 그저 바라만 볼 뿐, 도무지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 이를 지켜보던 사람이 말했다. " 조금 전까지 몹시 목 말라 하더니, 지금 강가에 왔는데도 왜 물을 마시지 않는가." 그가 대답했다. " 그대가 다 마시고 나면, 내가 마시겠다. 물이 너무 많아 한꺼번에 다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크게 비웃었다.

 그것은 비유하면 이렇다. 편벽된 외도들이 자기는 부처님 계율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 결국 도를 얻지 못하고 생사에 떠돌게 되는 것과 같다. 저 어리석은 사람이 물을 보고도 마시지 않아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六) 子死欲停置家中喩
昔有愚人養育七子.一子先死.時此愚人見子旣死.便欲停置於其家中.自欲棄去.傍人見已而語之言.生死道異當速莊嚴 致於遠處而殯葬之.云何得留自欲棄去.爾時愚人聞此語已卽自思念.若不得留 要當葬者.須更殺一子停擔兩頭乃可勝致.於是便更殺其一子.而負之遠葬林野.時人見之深生嗤笑怪未曾有.譬如比丘私犯一戒.情憚改悔.默然覆藏自說淸淨.或有知者卽語之言.出家之人守持禁戒如護明珠不使缺落.汝今云何違犯所受欲不懺悔.犯戒者言.苟須懺者更就 犯之然後當出.遂便破戒多作不善.爾乃 頓出.如彼愚人一子旣死又殺一子.今此比丘 亦復如是

 
6. 두 아들을 죽인 아버지
 옛날 어떤 어리석은 사람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먼저 죽었다. 그는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도, 그대로 집에 버려 두려 하였다. 옆의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살고 죽는 길이 다른데, 빨리 장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거늘, 왜 집에 버려 둔 채 떠나려 하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였다. "만약 집에 두지 않고, 꼭 장사 지내야 한다면, 마땅히 아들 하나를 더 죽여 두 머리를 메고 가는 것이 보다 운치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곧 다른 아들 하나를 더 죽여 먼 숲에 이르러 장사 지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매우 비방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괴상히 여겼다.

 그것은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남 몰래 계율을 범하고도 참회하기를 꺼려 짐짓 모른 채하면서, 스스로 청정하다고 하다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알고는 "계율을 마치 진주를 보호하듯 이지러짐이 없어야 하거늘, 너는 왜 계율을 범하고도 참회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다. "진실로 참회할 바에는 다시 한 번 더 범한 뒤에 참회하리라." 그리하여 그는 계율을 깨뜨리면서 선하지 않은 짓을 많이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남에게 알렸다. 그것은 마치 저 어리석은 사람이 한 아들이 죽으니, 또 한 아들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진
공간

 

 

편집부

 

 

 

 

 <경남 통영시 중앙시장>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모루(anvil)위에서 다듬으며(단조 鍛造 forging),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모습입니다. 한편으론 정겹게 느껴지지만, 현대화 기계화라는 미명 아래 앞으로는 보기 어려워질 것을 생각하니 아쉽기도 합니다.

 

 

절기
풍속

 

 부처님 오신날 (음력 4월 8)

편집부

  불교의 교조(敎祖)이신 고타마(瞿曇悉達多Gotama Siddhartha, 釋迦牟尼Sakyamuni B.C. 624∼B.C. 544) 부처님은 중인도 히말라야 남쪽 카필라성(迦毘羅城 Kapilavastu)에서 전반왕(淨飯王 슈도다나Suddhodana)과 마야(摩耶Maya) 왕비 사이에 태자의 신분으로 룸비니(藍毘尼) 동산 무우수(無憂樹)아래에서 탄생하셨다. 이 날은 인류 역사상 고타마 부처님에 의해 전무후무하게 온갖 관념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존귀함이 천명된 날이기도 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
불기 2547년 부처님 오신 날은 5월 8일 입니다.
지혜와 자비의 등으로 세상을 밝혔으면 합니다.
 

*연등회(燃燈會 음력 4월 15)*
   등(燈)은 어둠을 깨고 진리의 빛을 밝히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자기의 등불을 밝히며, 법의 등불을 밝히어라.(自燈明 法燈明)" 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신과 같은 우상이나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기와 진리의 법을 의지처로 삼아 대 자유인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좋은인연

 

 

 慶北 慶州 南山 三陵谷 線刻如來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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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타행

 범수

 

 흐르는 것은

 문옥선

 

 불교의 보시사상과 사회복지

 성주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조혜숙

 

 서울 북촌

 도난주

 

 말레이시아와 싱가폴

 장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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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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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오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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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thly Web Magazine DHARMA(ISSN: 1599-33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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