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불교사
-삼무일종의 법난에 대한 고찰-


-梵水-




서론

  불교가 중국에 최초로 전래된 연대에 대하여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인도의 불교가 서역에 전래된 후 경전등이 서역어로 역출되고 다시 중국으로 전해져서 중국불교가 성립되었다는 점은 일반적인 견해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때에 많은 경전들도 함께 유입되었는데, 이 때를 편의상 전역시대라 부른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중국불교를 다섯시기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제 1기는 전한(前漢)으로부터 동진(東晋)의 초까지 이르는 전역시대(傳譯時代), 제 2기는 동진(東晋) 초로부터 남북조(南北朝)에 이르는 연구시대(硏究時代), 제 3기는 수당(隋唐)의 건설시대(建設時代), 제 4기는 오대(五代)로부터 명(明) 말에 이르는 계승시대(繼承時代), 제 5기는 청(淸) 이후의 답보시대(踏步時代)이다.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 사회, 문화 등과 다양하게 교류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전래된 후 중국 종래의 여러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특기할만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중국 종래의 종교와 권력으로부터 의도적인 탄압을 받은 일이다. 우리는 이를 '삼무일종의 법난'이라고 하는데 '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당 무종', '후주 세종' 때에 불교교단에 가해진 박해를 말한다.
 중국 불교사에서 일어난 4번의 법난은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박해였는데 이와 같은 법난이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대체로 위정자들의 정치적 의도와, 중국고래의 도교 유교와의 갈등관계, 그리고 한족의 민족주의에 입각한 우월주의, 불교교단내의 부분적인 병폐를 들고 있다.
 이 소고에서는 먼저 중국 불교사를 다섯 시기로 나눠, 각 시대별 불교의 사회구제 사업을 먼저 알아본 다음, 중국 고래의 유교와 도교와의 관계를 살펴 법난이 일어난 전후 사정과 그 당시의 법난이 단지 불교자체에 의한 문제 때문만에 일어 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회현상과 위정자들의 정치적 의도와, 도교, 유교와 갈등관계에 의해서 의도적이고 계획적 이였던 법난 이였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제 1 전역시대
 
 제 1의 전역시대에는 후한(後漢)의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雲迦懺)등을 필두로 하여 많은 역경승(譯經僧)들에 의한, 경전 전래와 역출(傳來譯出)이 이루어졌다. 이 시대는 오로지 번역(飜譯)에만 전주(專注)하였기 때문에, 불교의 연구가 일반인들에게까지 보급되지는 못했던 시대이다.

 1) 전역시대의 불교

 불교가 전한(前漢) 시대 말 애제(哀帝)때에 전래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전한의 불교계를 살펴 볼 수 있는 문헌상의 기록은 거의 없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된 연대에 대하여서는 이설 많으나 <후한기(後漢記)>의 "금인(金人)"에 관한 기록을 미루어 보아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후 7대 80년간 아무런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환제(桓帝)때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婁迦讖)등이 경전과 함께 도래했다는 <고승전(高僧傳)>의 기록이 남아있음으로, 이 때 이후로부터 불교가 정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후한 말 책융( 融)은 중국 최초의 불사를 건립하였으며, 또 불상을 조성하고 관불회(灌佛會)등을 열고, 사회 구제사업으로는 시반(施飯)을 공급 하였다.    
 후한이 망하고 오, 위, 촉(吳, 魏, 蜀)의 삼국(三國)으로 나뉘어진 중국에 계율수계(戒律受戒)가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단지 삭발(削髮), 송경만(誦經)할 뿐이었다.
 위(魏) 가평(嘉平) 년중(249~253)에 이르러, 중 천축(天竺)의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낙양에 와서 <승지계본(僧祗戒本)>을 번역하였으며, 정원(正元) 년중(254~255)에는 안식(安息)의 담제(曇諦)도 낙양에 와서 <담무갈마(曇無 磨)>를 번역하여 중국불교에 수계작법(受戒作法)이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드디어 수계작법에 의한 비구승이 정식으로 등장하였다. 이 때 득도한 주사행(朱士行)을 중국 최초의 출가승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주사행은 이후 범본을 찾으려 서역으로 갔으며, 또 위 나라 문제 동생인 진사왕(陣思王) 조식(曹植)에 의한 범패 성립은, 이 시대에 특기할 만한 점들이다.
 
  2) 도교와의 관계

 북방뿐만 아니라 남방의 무창(武昌), 교지(交趾)등에도 불교가 전파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일련의 일들이 있다. 그것은 모자(牟子)의 <이혹론(理惑論)>이 바로 이 지방의 소산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북방불교의 전래 계통과 달리 일찍이 해로를 통해서도 이 지방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혹론>의 저자인 모자는 모친상을 당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는데, 유학을 비롯하여 신선사상까지 연구하였다. 그리고 불교사상이나 유교, 노장사상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 삼교(三敎)의 융화에 힘 섰다.
 그러나 도교측에서는 '노자자화호설(老子化胡說)'을 주장하였는데 왕부(王浮)는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위작(僞作)하여, 불교를 이적(夷狄)의 가르침이라 하며 불교에 대한 도교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고래로부터 내려오던 토속신앙과 더불어 방사(方外之閑人)들에 의해 한(漢) 민족 고유의 종교를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후한 말 장각(張角)에 의한 태평도(太平道)와 장릉(張陵)에 의하여 창시되고 장노(張魯)에 이르러 조직 정비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도교의 성립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성립된 도교는 비록 노자(老子)를 조(祖)로 하였지만 종교사상은 중국고래의 민간 신앙의 잡다한 민속신앙에다, 노장(老莊)의 철학사상을 더하여 계통을 세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공리적(功利的)이며 현세적(現世的)인 종교로써 신선사상(神仙思想),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 복약(服藥), 장수법(長壽法) 등 일체의 속신을 혼합한 종교였었는데 점차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가자 이하(夷夏)의 구별이나 선후(先後)문제를 가지고 불교계에 논쟁을 일삼기 시작하였다.
 
 2 제 2 연구시대
 
 제 2의 연구시대는 교의연구(敎義硏究)에 정진한 시대로서 사회일반에 불교가 무엇인가를 알리고 연구 된 시대이다.
 동진시대(東晋時代)의 불도징(佛圖澄), 도안(道安), 혜원(慧遠), 각현(覺賢), 법현(法顯), 담무참(曇無讖)등을 필두로 하여, 이하 남북조시대의 고승석학(高僧碩學)들은 이 시대의 중심이었으며 불교연구에 많은 공적을 남기었다.
 이 시대에는 라집(羅什), 각현(覺賢), 담무참(曇無讖), 진제(眞諦)등, 중국 역경사(譯經史)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많았으므로 전역시대라고 할 수 있으나, 라집 이후의 역경은 종래와 같은 단순한 역경이 아니고, 번역(飜譯) 그 자체가 불교를 강술(講述)하는 성격을 띠였기 때문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단순한 전역이 아니고 전역과 함께 강술되고 연구된 것이므로  연구시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1) 불교의 사회사업
 
  후조 때 석륵(石勒)은 불도징(佛道澄)에게 감화되어서 아들들을 모두 사원에 맡겨 교육시켰었는데, 이는 사원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겸했던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당시 승려는 여러 방면으로 능통하였는데, 특히 북조의 국가에서는 고승을 모시기 위해 전쟁까지 일으킬 정도였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던 고승들은 불교의 자비정신에 입각하여 빈민구제, 치료사업등, 사회구제사업을 벌였는데, 무엇보다도 군주들을 교화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준 것은, 불교 사회 사업의 제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승려들에 의한 사회구제사업은 치료와 빈민구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불도징, 축법광(竺法曠), 단도개(單道開), 우법개(于法開). 등을 들 수 있다. 또 이와 함께 사원에 시료시설(施療施設)이 설치되어져서 구제사업이 매우 성하게 이루어졌다.
 불교계에 의해 시행된 이런 구제사업은 불교 본연의 자비정신에 따른 필연적인 것으로서, 보통 복전사상(福田思想)이라고도 한다.
 남북조에 있어 불교사회사업으로는 북위의 승지호(僧祗戶), 불도호(佛圖戶) 제도와 양 무제의 무진장(無盡藏) 제도 등을 들 수 있다.
 승지호는 북위 초기 사문도통(沙門都統) 담요(曇曜)의 요청에 의하여 설치된 것으로써, 그 속(粟)을 승지속(僧祗粟)이라 하고 빈민구제에 이용하였다. 즉 이 승지속은 빈민들에게 대여하였다가 풍년에 회수하는 제도로서, 사회 구제의 목적에 부응하였다.
 또 불도호(佛圖戶)는 중죄인 및 관노들로 하여금, 절의 청소, 전원의 경작 등, 사역을 통한 교화와 더불어 가람수호를 한 제도이다.
 승지속과 불도호의 제도는 당시에 사회로부터 매우 환영을 받아 널리 보급되어서 많은 사원이 이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사원에 질고(質庫)도 설치되어 서민계급의 금융에 부응하기도 하였다.
 양무제(梁無帝)는 13개소의 무진장(無盡藏)을 설치하여 방생(放生)과 보시(布施) 등에 이용토록 하였다. 이는 당대(唐代) 삼계교(三階敎)의 구제사업인 무진장원(無盡藏院)보다도 시대적으로 앞선 제도이다. 또한 사원뿐만 아니라 승려 개인에 의한 구빈(救貧), 구기근(救飢饉), 구병(救病)과, 식목(植木), 교량가설(橋梁架設), 무료 휴게소, 무료숙박소 등이 이루어졌는데, 이 모두 자비사상의 발현인 복전사상(福田思想)에 의한 사회구제사업이었다.

  2) 유교, 도교와의 관계
 
  동진(東晋) 성제(成帝)의 함강(咸康) 6년(340)에 성제의 사위인 보정(輔政) 수빙( 氷)은 사문(沙門)으로 하여금 왕에게 예배시키고자 하였으나,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 등 여러 신(臣)들이 극력 반대하였기 때문에 수빙은 이에 굴복하여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60년 후 안제(安帝) 원흥(元興) 2년(403)에 대위(大尉) 환현(桓玄)이 재상(宰相)이 되어, 다시 이 문제를 일으켰다. 이 때에도 역시 중군장군상서령(中軍將軍尙書令) 의양(宜陽) 등이 반대의사를 표방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환현은 당시의 여산(廬山)의 혜원(慧遠)한테 이 문제를 자문(諮問)하였는데 혜원은 이에 승려는 출세간인 것을 들어서 세간법에 준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다시 환현의 <진경왕자논(盡敬王者論)>에 대하여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작하여 반박함으로써 황현도 어찌 할 수 없어 이 문제를 중지하게 되었지만,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결국에는 승니사태(僧尼沙汰)를 단행하였다.
 이상의 사문불경왕자(沙門不敬王者)에 관한 문제와 더불어 이적의 가르침이라고 문제삼아 공격한 것은 도교와 유교사상(儒敎思想)에 입각한 불교사상(佛敎思想)의 배척이었다.  
 동진시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한 유교의 진전은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당시 불교에 대한 비판은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어 승도(僧徒)는 고등유민적(高等遊民的) 존재이며, 조부(租賦)를 도피하기 위한 것으로서 국가에는 하등의 이익이 없고, 더욱 사탑(寺塔)의 건립은 국비를 낭비하며, 또한 윤리적인 면에서는 부모와 처자를 버려 돌보지 않고, 거식(踞食)하고 단복(袒服)하며, 왕친(王親)을 불경(不敬)하는 것은 인도(人道)를 범하는 것이다, 고 비난하였으며, 사상적인 면에서도 신멸불멸(神滅不滅), 후세응보(後世應報)등의 문제로 불교계에 논쟁을 가했다.
 남북조시대에서도 역시 도교, 유교와 불교간 왕자불경의 윤리문제와 영혼불멸 및 인과응보의 교리문제로 오랫동안 갈등이 지속되었다.  
 유교는 '형신구멸(形神俱滅)'이기 때문에 후세의 과보가 없다고 주장하고, 불교는 신불멸(神不滅)이라서 삼세(三世)의 업보(業報)가 있다고 각각 주장하였던 것이다.
 흑의(黑衣)의 재상 혜림(慧琳)은 <백흑론(白黑論)>을 저술하여 불교를 공격하고 하승천(何承天)은 이에 찬동하여 <달성론(達性論)>을 지었다. 이에 대하여 백련사(白蓮社) 18현의 한 사람인 종병(宗炳)은 <난백흑론(難白黑論)>과 <명불론(明佛論)>을 저작하여 논박하였다. 그 내용은 신의 불멸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교를 빌려서 설명하였으나 유교를 반박 하고자 하는 것보다 유교와 불교를 조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제(齊), 양(梁)시대 범진(范縝)은 <신멸론(神滅論)>을 저술하여 무불(無佛)을 주장한 유학자 인데 무불과 인과설에 반대하여 자연설(自然說), 운명설(運命說), 우연설(偶然說)로 만유(萬有)를 설명하고자 하였으며 신멸(神滅)을 주장하였다.
 서진(西晋)으로부터 노장사상이 융성하여 청담(淸談)이 유행하였는데 그 시대에 있어서 불교는 노장사상을 빌려 불교를 설명하는 격의불교였고 도교는 불교의 교리를 빌려 도교의 교리를 수립하는 시대였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인해 도교는 불교교리를 모방하여 교리적인 기초를 이루었고, 특히 라집 등의 역경에 자극되어 그것을 모방한 많은 도교 경전을 위작(僞作)하기에 이르렀다.
 동진의 갈홍(葛洪), 송의 육수정(陸修靜) 등은 도교계의 대표자들로서 세력이 왕성해지자 불교계를 상대로 논쟁을 일삼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열을 따지며 그 근거로 거짓임이 밝혀진 <노자화호경>등 위작된 도교경전들을 가지고 불교반박의 논리적 근거로 삼았었는데 이후에도 도교 경전들을 많이 위작하였다. 이에 불교계에서도 도교측의 위경에 대처하기 위하여 위경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는데 곧 <법행경(法行經)>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법행경>의 내용 구조는 우위의 입장에서 도교와 유교에 대항한 동시에 삼교 조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한편 도교는 남북조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조직화되어 강대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계속적으로 도교 경전을 위작하였다.
 의례(儀禮)에 있어서도 불교를 모방하여 제정하고 교단확립에 큰공이 있는 구겸지(寇謙之) 등의 걸출한 도사의 출세로 불교계에 대항할만한 세력을 갖추게 되자, 불교계를 상대로 또다시 논란을 벌려 결국에는 불교 박해 사건을 초래시켰다.

  3) 법난
 
  북조는 북위의 도무제가 이미 동진시대에 건국(386)하여 5호 제국과 패권을 다퉜던 나라로써, 마침내 태무제에 이르러서 최후로 북량(北 )을 멸하여(439) 북방을 통일하고 대동(大同)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로부터 약 400년간 남방의 송(宋), 제(齊), 양(梁)과 대립하여 유력을 떨쳤다.
 이 시대의 불교교단은 남방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발전하였지만, 세조(世祖) 태무제(太武帝)에 이르러서는 '삼무일종의 법난' 가운데 첫 번째 법난을 당하였다. 이전에도 도교의 영향으로 인해 불교의 박해가 일어났지만 이번 법난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위서(魏書) <석노지(釋老志)>에 따르면 태평진군(太平眞君) 5년에 일어난 법난은 세조 무제의 북방통일 사업에 이어서 내정의 혁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즉 내정의 혁신에 이은 도교와 불교간의 논쟁, 북방민족과 한민족간의 투쟁, 국가재정상의 문제, 불교교단의 타락등이 법난을 시행하게된 원인이라고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제에 의해 자행된 법난의 발단으로써 협서(陜西)지방 개오(蓋吳)의 반란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들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도사인 구겸지와 그의 제자이며 한족의 명문 귀족 출신인 최호와의 종교적이고도 민족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구겸지는 도교 부흥에 일생을 바쳤으며, 한족은 호족(胡族) 아래서 신음하던 중 최호(崔湖)를 통해 문화적으로 정복자(征服者)를 다시 정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환언하면 구겸지로 대표되는 도교는 종교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자 하였으며, 최호로 대표되는 한족은 호족이 받들던 불교와 호족을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배척한 것이다.
 서위를 이은 북주(北周) 무제(武帝) 건덕(健德) 3년에 이르러 두 번째 법난이 일어났다. 이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폐불이 일어나기 전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쳤었는데, 환속승(還俗僧)인 위원숭(衛元崇)이 폐불을 제의하고, 여기에 도사 장빈(張賓)등이 가담하였던 것이다. 이 때 도교를 신봉하고 내심 불교를 배척하고자 하던 무제는 폐불의 구실을 찾기 위해 문무백관, 승려, 유학자, 도사 등으로 하여금 삼교의 우열을 논의토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교에 대한 박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논의 때  마다 도교는 오히려 불교계에 의해 논박 당하고 여론마저도 불교계에 호의적이자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 때 도사 장빈은 폐불을 단행하고자 결심하고 지현(智炫)과 필사의 논쟁을 벌렸지만(574) 오히려 논박을 당하고 만다. 무제는 이에 격분하여 직접 그 자리에서 지현과 대론을 벌이지만 그 역시도 논박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불교만 탄압할 명분을 찾지 못하게 된 무제는 할 수 없이 불교와 도교를 함께 배척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속뜻은 불교 탄압에  있었기 때문에 법난을 단행하면서도 통도관(通道觀)등을 세워 도교만을 암암리에 보호하였다. 이와 같은 종교정책은 건덕(健德) 6년(577)에 멸망 시켰던 북주의 불교마저도 탄압할 정도로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해는 불교계만 입었다.             

   (1) 북위(北魏)(386~534)

 북방의 이민족인 탁발(拓跋)부족이 몽강(蒙疆)에서 남하하여 화북에 건설(386)한 국가이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과 패권을 다툴 만큼 강성했던 북위는 이미 도무제(道武帝)가 동진(東晋)시대에 건국(386)한 나라로서 이후 세조 태무제(太武帝)때 북조(北朝)를 통일(439)하였다.  
 위는 중국 고래의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북조를 통일한 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국도를 낙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服), 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법(均田法) 등을 실시하는 등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하고 또, 기상과 무예가 넘치는(素朴尙武) 기풍은 오히려 쇠퇴하여,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마저 일어났다. 그리고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의 실정에 따라 국정이 어지럽게 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었다.
 동위는 550년 고환의 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다.

    ① 북위 태무제

 태무제(太武帝408-452)는 중국 북위(北魏)의 제3대 황제(재위 423-452)로써 성명을 탁발 도(拓跋燾)이다. 묘호 세조(世祖). 명원제(明元帝)의 맏아들로서 성격이 용무엄혹(勇武嚴酷)하였고, 즉위하자 외몽골의 유연(柔然)을 쳐서 큰 타격을 준 뒤, 이어 하(夏), 북연(北燕)을 멸망시켜 화북통일을 완성하였다. 또 동서교통의 요지인 감숙성(甘肅省) 지방을 확보하자,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등 서역에서 입공(入貢)하는 나라가 20여 국에 이르렀다.
 450년 송(宋)나라 친정(親征)에 나서 병력 100만을 이끌고 황하강(黃河)을 건너 송군을 격파하고, 과보(瓜步:江蘇省)에서 철군하였는데, 송나라는 이때 크게 타격을 받아 그 뒤로 쇠하여졌다. 한편 그는 도교(道敎)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였다.
 그의 불교 박해는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인 사대법난(四大法難)의 하나이며, 446년 조서를 내려 사탑(寺塔)과 불상(佛像)을 파괴하고 승려를 갱살(坑殺)하다가, 452년 환관 종애(宗愛)에게 피살되었다.

    (2) 북주(北周)(557~581)

 우문호(宇文護)가 세운 중국 북조(北朝)의 왕조(557~581)로서 서위(西魏)의 실권가인 우문태(宇文泰)가 죽고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뒤를 이었을 때, 그를 보좌한 우문각의 사촌 우문호가 서위의 공제(恭帝)를 제위에서 밀어내고 이 왕조를 세웠다.    서위(西魏)시대부터 고대의 주(周)를 본받았기 때문에 명칭을 북주라 하였는데,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이래로 한화(漢化)주의, 문벌(文閥)주의를 배척하고 북족존중(北族尊重)주의를 취하였으며, 소박(素朴)주의 정치를 지향하였다.             
 제3대 무제(武帝) 때 북제(北齊)를 평정하여 화북(華北) 통일을 실현하고, 불교를 폐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아들 선제(宣帝)가 폭군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 틈을 탄 외척 양견(楊堅)이 정권을 빼앗아 수(隋)를 세웠다.
   
    ① 북주 무제
 
 무제(武帝543-578)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의 제 3대 황제로서 (재위 560~578) 이름은 옹(邕)이다. 묘호 고조(高祖). 우문태(宇文泰)의 넷째 아들로서 형인 명제(明帝)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숙부인 우문호(宇文護)의 집정을 배제하여 친정권을 회복하고, 나중에는 유교에 기초를 두고 불교 ·도교를 탄압하여 574년에는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파괴하였으며 승려와 도사를 환속시켰다.
  무제에 의한 불교탄압은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 576년에는 동린(東隣)의 북제 토벌을 개시하여 이듬해 이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고, 남방 진군(陳軍)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578년 돌궐 친정(親征) 도중에 병사했다.

  3 제 3 건설시대

 제 3의 건설시대에는 전대에서 경, 율, 논이 역출되고 연구된 불교가 더욱 더 일반사회에 보급되었으나 수당(隋唐)에 들어와서는 이 연구가 결실되어 각 종(宗)이 독립 혹은 대성하였다. 곧 수대(隋代)의 천태(天台) 지의(智 )의 천태종, 가상사(嘉祥寺) 길장(吉藏)의 삼론종(三論宗), 신행(信行)의 삼계교(三階敎), 당대(唐代)에 도작(道綽), 선도(善道)의 염불종(念佛宗), 도선(道宣)의 남산율종(南山律宗), 신수(神秀)· 혜능(慧能)의 선종(禪宗), 현장(玄奬), 자은(慈恩)의 법상(法相) 유식종(唯識宗), 법장(法藏)의 화엄종(華嚴宗),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의 밀교(密敎) 등 실로 수당(隋唐)의 불교는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백화만개(百花滿開)의 양상을 띄었다. 따라서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 건설시대의 불교가 가장 화려한 시대였다.

  1) 사회사업

이 시대 불교에 의한 사회 구제사업으로서는 비전(悲田)과 양방(養坊)을 들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자비사상에 의한 중생구제로써 복전(福田)의 형태로 대변되는데, 당대의 비전원(悲田院)과 양병원(養病院)의 설립은 측천무후(則天武后)때이다.
 비전과 양병의 사회구제사업은 국가적인 후원에 의해 사원 내에 설치되었으며 비용은 관으로부터 지급받아 사원에서 전적으로 운영되었다. 또 이와 관계없이 승려 개인에 의한 사회구제 사업도 이루어졌다.
  사원 내에 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하고, 흉년에는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의복등을 나눠주었던 불교계의 사회구제 사업은 당시 일반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아 무종에 의한 법난이 일어났을 때도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
 불교계의 사회구제사업은 남북조시대부터 성행한 무차대회(無遮大會)와 같은 법회도 역시 포함되는데. 그곳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법회
 이름과 같이 평등하게 음식이 베풀어졌다. 이 이외에도 치수(治水), 교량건설, 식목등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각 사원은 일반 사회인들에게도 무료휴게소와 무료숙박시설인 숙방(宿坊)등을 제공하였다.
당대의 사회구제사업으로는 무엇보다도 삼계교(三階敎)의 무진장원(無盡藏院)을 들 수 있다. 무진장원은 사회구제사업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원경제의 기초로써 일반사회로부터 적극 환영받았다.  
     
  2) 도교, 유교와의 관계

  당 황실은 고조 이연(李淵)이 건국(618)하여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907년)되기까지 도교를 숭상하였다.
 이연은 노자(老子)와 동성(同姓)이라는 점을 들어 당(唐)의 조선(祖先)이라 하며 적극 도교를 보호하였다. 이런 상황은 당이 망하기까지 내내 이어졌으며 현종(玄宗)때에는 거의 국교처럼 받들어 졌다. 그리고 삼교 가운데 맨 처음의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제주(諸州)의 학생으로 하여금 <노자도덕경>등을 수학케 하여 과거 시험과목으로 보게 하였다. 또한 전국의 모든 군에 조칙을 내려(738) 개원관을 세우고 노자를 현원황제(玄元皇帝)라 하여 그 진용(眞容)을 그려서 개원관(開元觀)에 안치시켰으며 묘(廟)도 세웠다.(741)
 이처럼 당 황실의 보호와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도교는 일시에 세력을 넓혀 나갔는데, 결국 불교계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켜 회창법난이라는 불교탄압을 초래하였다. 이처럼 도교는 당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불교계에 대하여 압력을 가했었는데, 그 최초의 사건은 당 초기 무덕(武德) 연간(年間)에 일어난 부혁(傅奕)의 배불론(排佛論)이였다.
 부혁은 여러 차례 황제에게 자기의 주장을 받아 줄 것을 애걸하다 병사하였는데, 황제가 결정을 미루며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토론케 하다가, 무덕(武德) 9년에 돌연 도교와 불교에 대한 사태(沙汰) 조칙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에도 도교측은 지속적으로 불교계에 대하여 논쟁을 일삼았지만 논쟁에서 빈번히 논박을 당하자 결국에는 논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또 다시 도교경전들을 위작하기에 이른다.
 도교측에 의하여 논쟁이 야기되고 불교계는 이에 대하여 삼교화합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도교측의 압력과 허실에 대처하는 사이 그 틈을 타서 유교에서도 불교 배척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형세는 도교와 유교가 합세하여 불교를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도교측에서 이적(夷狄)의 가르침이라고 폄하했던 불교가 오히려 발전하는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유교도 마침내 합세하여 불교를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문필가(文筆家)로써 당송(唐宋) 8대가(大家) 중 한 사람인 한퇴지(韓退之)를 들 수 있다.  
 한퇴지는 <논불골표(論佛骨表)>와 <원도(原道)>등을 지어 불교 배척을 주장하였으나, 당시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송대에 이르러 황금시대를 이룬 유교계가 불교계를 공격할 때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3) 법난

 당 무종 회장 2년(842)에 삼무일종의 법난 중 세 번째의 난이 일어났다. 회창 2년에 승려가 되기 전 범죄한 자와 또 승려 가운데 수행하지 않는 자를 모두 환속시키고 사유 재산을 몰수하였다. 다시 4년에는 오대산을 위시하여 모든 절의 순례를 금지하고 사액(賜額)이 없는 절은 폐쇄하고 곳곳의 승려는 환속시켰다. 폐쇄된 사원의  수는 말할 것도 없고, 강제로 환속된 승려에게 양세호(兩稅戶)로 하여금 조세(租稅)를 부담시키고, 불상과 불구는 돈이나 농기구로 만들었다.
 회창의 법난으로 불교계는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가 되었는데 이와 같은 이유는 당 고조 때 부혁(傅奕)과, 무종 때의 도사 조귀진(趙歸眞)의 배불론, 그리고 국가 재정상의 문제와 사도승(私度僧)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불교교단의 융성에 따른 사탑의 건립은 국고에 부담을 주었으며, 국가세입의 감소는 병역과 조세의 의무를 피해 승려가 되는 이들이 늘어남으로써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아무튼 당대에서는 불교교단의 정리와 승려 사태(沙汰)에 적극적이었다.
 당대뿐만 아니라 전대로부터 불교 교단이 부패되었다는 빌미가 된 것은 병역과 조세를 피해 승려가 된 이들과, 조세나 병역을 피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개인 사찰과 사도승에 따른 병폐이다. 이들에 의해 저질러진 문제들은 결국 불교가 국가로부터 탄압을 당할 때마다 빌미가 되곤 하였는데 당대에서는 오히려 이를 조장한 일 마저도 있었다. 그것은 승적(僧籍), 시경도승(試經度僧), 도첩제도(度牒制道)등의 제도를 통한 승려의 자질과 불교교단의 정리를 단행하겠다던 황실에서 오히려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는 재정 충당을 위해 도첩을 민간에게 판매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사부(詞部)에서 도첩을 발급(747)한 이래 국가에 의한 출가득도와 교단의 통제는 오히려 불교교단의 청정성과 자주성만 잃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1) 당(唐)(618~907)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외적(外敵)이였던 돌궐(突厥)을 평정하여 국위(國威)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태종은 내치(內治)에도 힘써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의 ‘정관의 치세’에 비길 만한 ‘개원(開元)의 치세’를 열은 당 현종은 당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그러나 번영은 궁중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일 뿐, 그 이면에는 균전제(均田制)의 모순이 격심해지고, 농민은 변경(邊境)으로 강제 출병(出兵)되었으며, 중세(重稅)로 시달리는 등 현종 말기의 천보시대에는 당조(唐朝)의 와해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① 당 무종

 무종(武宗 814-846)은 중국 당나라의 제 15대 황제 (재위 840~846)로서 성명은 이염(李炎)이다. 목종(穆宗)의 다섯째 아들이며 문종(文宗)의 동생으로 어머니는 선의황후(宣懿皇后) 위씨(韋氏)이다. 821년 영왕(潁王)으로 봉(封)해졌으며, 840년 문종이 죽자 환관(宦官)인 어홍지(魚弘志), 구사량(仇士良)등의 옹립으로 황제가 되었으나, 이덕유(李德裕)가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밖으로는 침입한 위구르족의 격퇴에 성공하였으나, 내정면(內政面)에서는 도교(道敎)를 믿어, 불교 ·경교(景敎)·마니교(摩尼敎)·조로아스터교(拜火敎)를 탄압하였다. 845년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을 단행하여, 사찰 4600군데를 헐고, 26만여 명의 승려를 환속시켰다. 이듬해 단약(丹藥)을 먹다가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4 제 4 계승시대
 
 제 4의 계승시대에는 교학적으로 수, 당, 청대의 황금기와는 비교할 수 없으며, 특히 당 말기에 무종(武宗)의 폐불사건과 그 후 오대(五代)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폐불에 의하여 매우 쇠퇴하였으나, 송대(宋代)에 있어서 대장경의 대사업은 만큼은 불교계에 힘을 주어서 수당의 불교를 계승하여 보급함과 동시에 점점 민간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원대(元代)에 들어와서 나마(喇 )의 국교(國敎)는 타종교에 상당한 타격을 주기도 하였으나 선종을 위시하여 다른 종파의 불교가 보호되어서 그대로 명대(明代)에 계승되었다.
 계승시대를 교학적 측면에서 보면 점쇠시대(漸衰時代)라고 지칭되기는 하나,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결코 쇠퇴된 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나 수당시대의 융성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1) 사회사업

 당대에 불교 사원에서 행해졌던 비전, 양방의 사회 구제 사업은 이 시대에 이르러서 국가가 운영권을 빼앗아 국가 사업으로써 직접 자유국(慈幼局), 시약국(施藥局)등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승려들은 여전히 불교의 자비 정신에 입각하여 전대에서 해왔던 것처럼 구빈(救貧), 구병(救病), 교량가설(橋梁架設), 도로(道路) 조성, 무료 휴게소, 숙삭시설, 선착장(船着場) 건설 등을 했다. 또 이 시대에는 사원에서 누택원(漏澤院)을 운영하여 사체(死體)를 매장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대신 매장하고 명복을 기원하였다.  

  2) 도교, 유교와의 관계

 이 시대에도 도교는 여전히 불교교단에 대하여 논쟁을 일삼았는데 특기할 만 점은 도교측에서도 도교 대장경 격인 <운급칠첨(雲 七籤)>을 조성한 점이다.
 휘종(徽宗) 때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영소(靈素)의 설에 따라 스스로를 교주(敎主) 도군황제(道君皇帝)라 칭하고 불교를 박해했는데, 천하의 사원을 모두 도교화 하였다. 이는 실로 삼무일종의 법난에 버금가는 법난 이었다.
 도교 신자인 휘종은 불교계에 박해를 가하는 반면 도사(道士) 서지상(徐知常)과 임영소(林靈素)등을 가까이 했는데, 영소는 황제의 권력을 업고 불교 박해의 활동을 펼쳤다. 이때 사문 영도(永道)는 이러한 폐해를 보고 황제에게 직언 하였지만 도리어 유배당하였다.
 원래 영소를 황제에게 천거한 이는 채영(蔡永)이였지만 채영자신도 영소의 포악함에 도리어 황제에게 멀리할 것을 직언 하였지만, 이미 영소에 의해 마음대로 조정되던 황제는 오히려 영소만을 편애하였다. 하지만 황제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영소의 간악함을 깨닫고 불교계에 대한 박해를 그만 두었다.
 송대의 유교는 불교와 상당히 빈번한 교류를 가졌었는데 그것은 불교계를 방문하고 불교교리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송유라고 일컬어지던 명사들은 그 학풍이 한, 당(漢, 唐)시대의 훈고적(訓古的)인 학풍에서 탈피하고 성(性)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성리학(性理學)을 일으켜 유학을 일대 변혁 시켰었는데, 그것은 불교계의 영향을 받아 불교 교리를 연구함으로써 신흥 유학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의 교리를 직접 연구한 결과이기도 한데 송유(宋儒)의 한 사람인 주렴계(周廉溪)는 직접 불문에 나아가 불교교리를 배웠다. 이와 같이 유학자로서 불교에 나아가 불교를 배우는 이들이 많았는데 당연히 그들의 학풍도 문제(門弟)들에게 이어져 유학자였지만, 오히려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유생들은 전대 한퇴지의 불교 배척론을 근거로 하여 한편으로는

 불교 배척론을 주장하였는데, 한퇴지가 불교를 공격하는 법을 논하였다면, 구양수(歐陽修)는 불교를 이기는 법을 논한 것으로 이 둘을 통합하면 철저한 불교 배척의 취지이다.
 불교 배척을 주장했던 이 시대의 특징은 먼저 불교를 연구하고 이것에 의해 유학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유교와 상통되지 않는 사상에 대하여서는 배불론을 전개한 점과 둘째로는 유교의 사상에 불교 사상이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주장한 점을 들 수 있다.

  3) 법난

 오대(五代)의 난세와 더불어 불교계는 후주(後周) 세종(世宗)에 의하여 또 한번의 법난을 당한다. 바로 삼우일종의 법난 가운데 순차적으로 네 번째의 법난이다. 이미 북위의 태무제, 북조의 무종, 당 무종에 의한 불교 탄압으로 쇠퇴의 기운이 감돌던 불교계는 후주 세종의 폐불 정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국가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폐불정책으로 폐쇄된 사찰 불상은 주통전(周通錢)을 주조하는데 쓰여졌는가 하면 사원의 존폐와 승려의 출가 득도까지 관여하는 등 불교계를 유린하였다.
 폐불 정책의 표면적 이유가 재정 궁핍을 사원에서 보충하고자 하였던 어처구니없는 것으로서 또 한 번의 법난으로 불교계는 암흑기에 빠졌는데, 여기에서도 그 이면에는 중국 고래의 도교와 한족의 민족주의가 깔려 있었다.

   (1) 후주(後周)(951~960)

 주(周)라고도 한다. 태조 곽위(郭威)는 후한(後漢)의 추밀사(樞密使)였으나, 은제(隱帝)가 그의 세력이 강대해짐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 하자 대량(大梁:開封)에서 군사를 일으켜 후한을 멸하고 951년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고 하였다. 제2대 양자(養子) 세종(世宗:柴榮)은 5대 제1의 명군으로 일컬어지며, 근위군의 개혁을 비롯하여 권력집중책을 취하고 통일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도중에 죽었다. 아들 공제(恭帝)는 어렸기 때문에 장군(將軍)들이 최고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宋太祖)을 옹립, 제위를 양도하게 하여 결국 960년 후주는 3대 9년 만에 멸망하였다.

    ① 후주 세종

 세종(世宗)(921-959)은 중국 오대(五代)의 후주(後周) 제2대 황제(재위 954-959)로서 이름은 시영(柴榮)이며. 태조(太祖) 곽위(郭威)의 양자이다. 태조가 죽은 뒤 34세에 즉위하였으며, 오대의 여러 황제 중에서 가장 걸출하였다고 전한다. 직속 상비군인 전전사(殿前司) 및 시위사(侍衛司)를 강화하고 여러 왕조의 통일사업에 착수하여 양자강(揚子江) 이북을 거의 통일하였고, 북방의 요(遼)나라를 공격하여 위협하였다. 내정적(內政的)으로는 농정(農政)에 유의하여 권농(勸農)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민전(民田), 호구(戶口)를 조사하여 균세법(均稅法)을 시행하고 조세(租稅) 부담의 공평을 도모하였으며, <대주형통(大周刑統)>, <대주통례(大周通禮)>등을 편찬케 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불교를 탄압하여 승려의 득도까지 관장하는 한편 주도(主都) 개봉부(開封府)를 확장하였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6년 만에 병사하였다.
  
 5 제 5 답보시대

 제 5의 답보(踏步)시대인 청조 이후에 있어서 교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적 측면에 있어서도 점점 세력을 상실하여 승려와 사원도 약화되어서 오늘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였다.
 청나라 시대는 나마교가 성했는데, 역대 황제 모두 나마교에 대한 태도는 정중하였다. 이의 목적은 서장 및 몽고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정략적인 것과 신앙이었다. 고 한다. 그리고 또 이 시대를 거사 불교시대라 하는데 일반 사회인에 의한 불교 공부가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대한 불교는 다음을 기약하며 이 소고에서는 앞 시대 법난까지만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삼무일종 가운데 유난히 혹독했던 회창법난과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법난에 대하여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1) 한국의 법난

 회창의 폐불 사건은 회창(會昌) 2년(842)에 시작되었는데, 3년 후인 회창 5년(845)에는 "훼불사륵승니환속제(毁佛寺勒僧尼還俗制)가 발표되면서 전국적인 훼불이 단행되었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폐사된 사찰이 4,600 여 개소, 환속된 승려는 약 260,00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천만 경(頃)의 토지가 몰수되고 사노(寺奴)에서 풀려 난 인원이 약 150,000 명에 달하였으며, 장안과 낙양에는 4 개의 사찰만 남기고 승려도 30인만 주석토록 하였다. 그리고 각 주에는 하나의 사찰만 남기고 3등급으로 나누어서 20인 이하의 승려만 남게 하였는데, 이러한 훼불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왕조에 이르러 유사하게 나타났다.
 조선시대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배불정책(排佛政策)을 단행하였는데, 이런 풍토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이어졌으며 유생들도 폐불에 적극적 이였다.
 태종은 종파(宗派)를 병합하고, 사원(寺院)의 수를 줄이며, 승려를 환속시키고, 사찰의 토지를 국유화하며, 사원에 딸린 노비를 군정(軍丁)에 충당하고, 도승제(度僧制)를 엄하게 하며,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의 제도를 폐지하고, 능사(陵寺)의 제도도 금지하는 등 중국 불교사 속의 삼무일종에 버금가는 폐불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또 1402년 서운관(書雲觀)의 상언(上言)을 따라 성 밖의 70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원의 토지 및 조세(租稅)를 군자(軍資)에 영속케 하고 사노를 제사(諸司)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그밖에 사찰의 수도 대폭적으로 제한하였다.
 세종. 문종. 성종 때에도 억불정책이 시행되어 불교는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으며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선종(禪宗)의 본사(本寺)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敎宗)의 본사인 흥덕사(興德寺) 그리고 대원각사(大圓覺寺)마저 폐사(廢寺) 시켰다. 또한 삼각산 각 사찰의 승려들을 쫓아내어 빈 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성 안의 비구니 사찰마저도 헐고 비구니는 궁방(宮房)의 비(婢)로 삼았다. 또 승려는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거나 처를 얻게 하는 한편 사찰의 토지는 모두 몰수하였으니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큰 법난을 당했었다.
 중종 때에는 승과(僧科)를 완전히 폐지시키고 경주의 불상(佛像)을 부수어 군기(軍器)를 만드는 한편 원각사를 헐어서 그 목재는 민가의 건축재로 사용케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는 식민지 불교정책의 핵심인 사찰령과 외색 불교가 시행되어 불교말살 정책이 이루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는 대처승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한 또 한번의 법난이 일어났는데 불교정화로 왜곡된 법난의 발단은 한 정치인의 정권유지를 위한 욕망이 발단 이였다.
 대통령의 유시를 계기로 이에 부화하여 감행한 승단정화는 당시 정권 유지를 위하여 해방 이후 불어 닥친 서구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에 편승, 한국 최대의 종교인 동시에 반대세력인 불교조직을 약화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저지른 법난 이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광범히하게 수용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4시 총검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사회정화와 용공분자 범법행위자 색출을 명분으로 조계종총무원과 전국 주요사찰에 난입하여 당시 조계종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하여 스님과 재가불자 1백53명을 연행하고, 이 가운데 18명을 구속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권유린과 종교탄압이 발생하였다.
 불교계는 이후 이 사건을 법난으로 규정하고,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여 89년 12월 30일 강영훈 국무총리를 통해 정부의 사과를 받아냈지만 아직도 정확한 진상은 규명되질 않고 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즉 사찰의 운영은 물론이고 승려들도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했을 때, 사회의 목탁으로서 자리 매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주성과 청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속성을 분명히 알아서 스스로의 살을 깎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결론

  중국 불교 역사상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라고 부르는 네 차례의 법난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3무는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북주의 무제(武帝), 당의 무종(武宗)이고, 종은 후주의 세종(世宗)을 가르키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폐불(廢佛)은 당 무종에 의한 회창법난(會昌法難)이다.
  폐불이 발생하게된 동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지만 보통 법난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를 사원 소유의 장원이 증가함에 따른 국가 재정의 문제 발생과, 교단적으로는 승려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사도승(私度僧)과 위람승(僞濫僧)의 횡행을 들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폐불의 시초는 도교의 불교 배격을 위한 책모(策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교단의 발전에 따른 국가 재정의 문제 발생과, 승려의 부패와 타락을 들고 있지만 이 역시도 다시 반문해봐야 할 부분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대뿐만 아니라 전대로부터 불교 교단이 부패되었다며 빌미가 된 것은 병역과 조세를 피하여 승려가 된 이들과, 조세나 병역을 피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개인 사찰과 사도승에 따른 병폐인데, 사도승과 개인 사찰의 이면에는 조세와 병역을 피하고자한 귀족들과 부호들의 집단적이고도 계획적인 음모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저질러진 문제들은 불교가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을 때마다 빌미가 되곤 하였는데, 당대 황실에서는 오히려 이를 조장한 구조적인 모순점도 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불교계만 지기에는 무리가 있다.
 국가의 정치가 어려워지면 백성은 가렴주고의 생활을 피하기 마련인데 그들 중 일부가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반대로 그런 류의 사람이 늘어난 것은 정치의 실정에서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정치, 경제 등의 문제로 실업자와 노숙자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또한 경제 사범과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는 실정인데, 이 모든 것을 당사자에게만 책임 지우기에 앞서 정책 실정도 함께 다뤄져야 된다고 본다. 이런 점을 자각한 정부에서 실직자의 경제사범과 생계형 범죄에 대해서는 구제를 펴고 있는 실정이다.
 정책의 실정과 혼란으로 인해 심신 모두 피폐해진 백성들이 승려로 신분변화를 하였지만 원래 불도에 뜻을 둔 것이 아니라서, 승려의 신분을 이용해 수행자 본연의 의무보다는 오히려 세속적인 이권에 종사하여 불교교단에 피해를 끼친 그들을 놓고 단지 불교계에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재고해야 될 것이며, 불교교단 역시 이들을 자체적으로 정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책임이 있겠지만 하옇튼 이와 같은 훼불 사건의 빌미를 불교계가 제공하였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나 집단에 있다고 생각하는게 상식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