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윤회, 해탈, 열반의 교망(敎網)
-업, 윤회, 해탈, 열반의 개념 정리-
                                                                                                              
   -梵水-





 서론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우리들의 업력(業力)에 의해 끊임 없이 윤회하는 고난(苦難)의 세계라고 간주하여 이것에서 벗어나는 해탈법(解脫法)을 가르친다. 그러면 고통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상황과 순차적인 문제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자아(自我)라고 하더라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자아 즉 자아의식으로부터 온갖 업(業)을 지어 고통의 세계에 윤회전생하게 되는데, 여래(如來)께서는 일찍이 무아(無我)에 의한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로 나아가는 해탈도(解脫道)를 보여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자아(自我)와 무아(無我)에 대하여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 소고에서는 우선 자아의식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업(業)과 이런 업력(業力)에 의해 육도(六道)에 전생(轉生) 하는 윤회(輪廻)의 개념과, 업과 윤회를 벗어난 해탈(解脫) 열반(涅槃)의 개념만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교리(佛敎敎理)는 너무나 잘 짜여져 있기 때문에 그물에 비유하여 교망(敎網)이라고도 하는데, 업과 윤회는 필연적으로 해탈과 열반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고에서는 필자가 관견(管見)이라 업과 윤회,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개념(槪念) 정리 차원에서 사전적(辭典的)인 의미와 간단한 관계만을 밝히고자 한다.
 

1 업

 
업은 범어 Karma의 번역으로서 갈마( 磨)라고 음역한다. 업에는 업의 체성(體性), 업의 작용(作用), 업의 종류(種類) 등 분류가 많지만,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개념 정도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업은 행위(行爲), 조작(造作), 작용(作用), 소작(所作) 등을 뜻하는데, 인과(因果)의 법칙은 어김 없기 때문에, 모든 업은 과보(果報)를 낳게 되며,  선업(善業)에는 낙과(樂果)가, 악업에는 고과(苦果)가 따르는 이치를 밝히는 것이 업 사상의 구조이다.
이와 같이 조작, 행위, 소작, 의지에 의한 심신(心身)의 활동 내지는, 생활을 의미하는 업에 대하여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불교사전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삼업(三業)
업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써 그 내용은 분류 기준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과, 입, 즉 말로써 짓는 구업(口業)과, 뜻, 즉 생각으로써 짓는 의업(意業) 등 세 가지의 업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그 가운데 의업을 제일 중요시한다. 의지가 있어야 업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2)
사업(思業) 사이업(思已業)
업을 의지의 활동인 사업(思業)과 사업이 끝나고 나서 행하는 사이업(思已業)으로 나누는 경우, 사업은 의업에 해당하고, 사이업은 신, 구 이업에 해당한다.

3)
표업(表業) 무표업(無表業)

표업(表業)이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마치 신체적 행동이나 언어적 표현들이고 무표업(無表業)은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없는 것으로 마치 정성이나 공과 같은 것이다.

4)
업인(業因) 업과(業果)
업이 원인(原因)으로 작용할 때는 업과(業果)를 받게 되는데, 선, 악업에 상응하는 고락의 갚음을 받는다. 만약 업이 현재에 있을 때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 미래에 어떤 과보를 받을 것인가가 결정되는데 이를 취과(取果)라 하고, 업이 지나감으로부터 결과에 영향을 미치어 결과를 현재에 나타나게 하는데 이를 여과(與果)라 한다.  

5)
인업(引業) 만업(滿業) 
인간계라든가 축생계등에 태어나게 하는 인업(引業)과 인간계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 개체를 완성시키는 것을 만업(滿業)이라고 한다. 인업의 갚음을 총보(總報)라 하고, 만업(滿業)의 갚음을 별보(別報)라고 하여, 이 이업(二業)을 총별이업(總別二業)이라고 한다.

6)
공업(共業) 불공업(不共業)
업에는 산하대지(山河大地)와 같은, 많은 생물에 공통되는 과보를 일으키는 공업(共業)과, 개개의 신체와 같은, 고유한 과보를 이끄는 불공업(不共業)이 있다.

7)
삼성업(三性業)
선심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심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과, 선악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8)
정업(定業) 불정업(不定業)
업은 그 갚음을 받는 시기가 각각 다른데, 이 세상에서 지은 업을 기준으로 해서, 이 세상에서 바로 받는 것을 순현업(順現業), 다음 태어날 세상에서 받는 것을 순생업(順生業), 제 3생 이후에 받는 것을 순후업(順後業)으로 하여 삼시업(三時業)의 구분이 있다. 이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불정업(不定業)을 더하여 사업(四業)이라고 한다.

9)
업도(業道)
업이 작용할 곳, 또는 의지할 곳이 되며, 유정(有情)을 고락의 과보(갚음)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는 것을 업도(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십선업도(十善業道)와 십악업도(十惡業道)가 있다.
이외에도 업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업의 주체에 대한 이론(異論)이 있었다.
삼업(三業)의 작용 즉 본체에 대한 문제에서 사업과 사이업에서 사업만 의업(意業=의지)이고 신, 구업은 색법(色法)이라 한데 대하여 대승에서는 모두 사(思=의지)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인과법을 설명하는데 이와 같은 업도 예외가 아니어서, 업은 업과를 초래하는데 이를 업력(業力)이라 한다. 그리고 악업(惡業) 때문에 생기는 장애(障碍) 또는 장해(障害)를 업장(業障)이라 하며, 숙업(宿業)에 의하여 벗어버릴 수 없는 중한 병을 업병(業病)이라고도 한다.
이상 위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차별의 세계에 태어나며, 생을 받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신의 운명은 자신에 의해서 창조되어지는 것으로서 그 사이에는 어떤 신과 같은 존재는 없다. 또한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자신이 돌려 받게 되는데 이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한다.

2 윤회(輪廻)

윤회는 범어 samsara의 번역으로써 승사락(僧娑洛)이라 음역하고, 윤회(淪廻)라고도 쓴다. 또 생사(生死)라고 번역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서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에 따라서 삼계육도(三界六道) 생사의 세계를 거듭하면서 돌고 돌아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업력(業力)에 의해 윤회하는 세계에는 육도(六道)가 있으며, 태어나는 형태로써는 사생, 그리고 생존의 형태로써 사유가 있다.

육도(六道)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天)의 육도(六道)로써 유정이 업력에 이끌려 생사윤회하는 세계이다.

사생(四生)
유정이 자신의 업력에 따라 태어나는 형태로서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사생(四生)이 있다.

사유(四有)
유정이 태어나는 순간을 생유(生有), 그로부터 죽음까지의 사이를 본유(本有), 죽음의 순간을 사유(死有), 사유로부터 다음 생유까지를 중유(中有)라고 한다.
6도 가운데 어느 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인 총체적인 업(業)에 의하는 것으로서, 선업에 의하여 선의 세계에, 악업에 의하여 악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3 해탈(解脫)

해탈(解脫) 범어 vimoksa 로써 毘木叉 ·毘目叉라 음역하며, 또 vimukti 毘木底라 음역하기도 한다. 해탈은 풀려오다. 또는 번뇌에 묶인 것에서 풀려, 미혹의 고(苦)로부터 풀려 나오는 의미이며, 혹은 미혹의 세계를 넘는다는 뜻으로 도탈(度脫)이라고도 한다.
해탈은 원래 열반과 같이 실천도의 구극(究極) 경지(境地)를 나타내는 말 이였다. 그리고 해탈의 경지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일미(一味)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해탈의 의미는  교리의 발전으로 인해 후세에 와서는 여러 가지로 분류되어 고찰하게 되어졌는데, 불교사전에서 소개된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위해탈(有爲解脫): 완전히 요달하여 인정하는 마음 작용, 곧 승해(勝解).
무위해탈(無爲解脫): 열반.
성정해탈(性淨解脫): 중생 본래의 모습으로 번뇌의 오염에서 벗어난 청정한 것.  
장진해탈(障盡解脫): 번뇌 때문에 오염되어 있어 번뇌를 끊고 해탈할 수 있는 것.  
심해탈(心解脫): 마음에 탐애(貪愛)를 없애는 것.  
혜해탈(慧解脫): 지혜에 의하여 무명 즉 무지에 벗어나는 것.
혜해탈(慧解脫): 아라한이나 아직도 멸진정(滅盡定)이 아닌 것.
구해탈(俱解脫): 아라한이 멸진정(滅盡定)을 얻는 것.  

이외에도 시해탈(時解脫), 불시해탈(不時解脫), 의 이 해탈(二解脫)과 번뇌해탈(煩惱解脫), 사견해탈(邪見解脫) 등의 십 해탈(十解脫)등이 있는데, 이 모두는 인간의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종교와 인생의 궁극 목적으로 해탈을 생각하였다. 즉 범부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業)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해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구원은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 즉 반야(般若)를 증득(證得)함으로써 스스로 이루는 것이라고 하는 데 특징이 있다. 결국 번뇌의 속박을 떠나 삼계(三界: 欲界, 色界, 無色界)를 탈각(脫却)하여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1
)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삼십칠조도품은 열반에 이르기 위해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서 도품(道品)은 실천하는 방법의 종류를 뜻하고, 삼십칠(三十七)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 일곱 가지 수행방법을 합친 것이다.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마음을 두는 곳으로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를 이른다. 이것은 범부가 지닌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치우친 견해를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몸은 부정한 것이고, 받아들이는 모든 인식은 고통이며,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법은 무아관(無我觀)으로 통찰하라는 것이다.
사정근(四正勤)
선을 키우고 악을 버리는 네 가지의 바른 노력을 말한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악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을 끊기 위해 노력하며,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이 나타나도록 노력하고, 이미 나타난 선을 키우기 위해 노력함을 말한다.

사여의족(四如意足)

네 가지 여의족을 이르는 말이다. 여의란 일을 뜻대로 할 수 있는 신통력으로 정(定)을 얻는 수단을 말한다. 네 가지 여의족 중 욕(慾)은 선정을 얻으려는 노력을, 염(念)은 높은 경지에 바르게 머물고자 함을, 진(進)은 쉬지 않고 정진함을, 사유(思惟)는 사유하여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오근(五根)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안(眼)), 코(이(耳)), 귀(비(鼻)), 혀(설(舌), 몸(신(身))을 닦는 것으로서, 감각 기관의 감성력을 키우는 것을 말하며 신근(信根), 근근(勤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이 있다. 이 가운데 근근은 사정근을, 염근은 사념처를, 신근은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정근은 사선(四禪)을, 혜근은 사성제(四聖諦)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오력(五力)
오근을 닦을 때 얻어지는 힘으로, 능력이 확고하게 성장한 상태이며 악을 쳐부수는 신(信), 진(進), 염(念), 정(定), 혜(慧)의 다섯 가지가 있다.  

칠각지(七覺支)
각지(覺支)라고도 하며, 지혜로서 진(眞), 망(忘), 선(善), 악(惡)을 분별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이르는 말이다. 염지(念支), 택법지(擇法支), 정진지(精進支), 희지(喜支), 경안지(輕安支), 정지(定支), 사지(捨支)가 있다.

팔정도(八正道)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 수행법을 이르는 말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새김(正念), 바른 정신통일(正定)이다. 초기에는 이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4 열반(涅槃)

열반(涅槃)은 범어 nirvana의 音譯으로서 탐(貪), 진(瞋), 치(痴), 세 가지 독심(毒心)을 끊고, 고요해진 평정의 경지로써 3독심(탐, 진, 치(貪, 瞋, 痴))이 왕성한 중생의 마음은 마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과 같지만, 깨달음을 얻어서 해탈한 마음은 번뇌의 불꽃이 모두 사그라진 재와 같아서,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된다고 한다.
열반은 니왈(泥曰),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등이라 쓰고, 멸(滅), 멸도(滅度), 적멸(寂滅)이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택멸(擇滅) 이계(離繫) 해탈(解脫)등과 동의어로 쓰인다. 이외에도 반열반(般涅槃), 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불어 끈다 뜻으로 불어 끈 상태, 곧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멸진(滅盡)해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생사(生死=미(迷)의 세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으로 표방되는 만큼, 고타마 부처님 생존시부터 삼법인(三法印)의 하나로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제시되어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삼법인(三法印)을 살펴보자.

1) 삼법인(三法印)
불교 사상의 특징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불교가 외도(外道)의 교리와는 다름을 알 수 있게 하는 3종의 증표와 같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행무상(一切行無常),
온갖 물(物), 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불변(不變), 상존(常存)하는 것처럼 생각하므로, 이 그릇된 견해     를 없애 주기 위하여, 모든 것이 무상(無常)한 이치를 밝힘.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
만유(萬有)의 모든 법은 인연(因緣)으로 생긴 것이어서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實體)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아(我)에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므로, 이를 없애 주기 위하여 무아(無我)인 이치를 밝힘.

열반적정(涅槃寂靜).
생사(生死) 윤회(輪廻)하는 고통(苦痛)으로부터 벗어난, 이상(理想)의 경지인 열반적정.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인(印)이란 인신(印信)· 표장(標章)의 뜻으로서 일정하여 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키며 , 이 세 가지 법으로써 부처님의 말씀과 마군(魔軍)의 말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는다. 위에서 보았듯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원리를 알게 되면 실체에 대한 고집이 없어지고 고집이 없어지면 고뇌가 없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고통이 없는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이외에도 열반에 관한 여러 설이 있으므로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부(有部)에서는 열반이라 함은 번뇌를 멸하여 없앤 상태라 하고, 여기에 유여의 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2종 열반을 세웠다.

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번뇌는 끊었지만 현재의 몸이 아직 있다는 의미로 여의(餘依) 또는 여(餘)라고 함.

②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회신멸지(灰身滅智)의 상태로서, 모든 것이 멸무(滅無)로 돌아간 경우. 또 유부(有部)등에서는 열반을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 실체적인 경지로 생각하였지만, 경량부(經量部)등과 대승에서는 열반은 번뇌가 멸한 상태에 대한 가칭적인 명칭으로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대승에서는, 열반을 적극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사덕(四德)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을 유위(有爲)열반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이 사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無爲)열반이라 하여, 이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또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과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 열반(無餘依涅槃)과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4종 열반으로 나누었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또 본래청정열반(本來淸淨涅槃), 또는 성정열반(性淨涅槃)이라고도 하고 모든 것이 본래의 모습(相)에 있어서는 진여적멸(眞如寂滅)의 이체(理體) 바로 그것이라고 하여 진여(眞如)를 가리켜서 이와 같이 말한다.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 함은 지혜에 의해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여의었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에도 정체(停滯)하지 않고, 또 대비를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迷)의 세계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는데, 이는 대승불교 열반의 특색을 잘 나타낸 것이다.

결론  

업에 의하여 연기되는 현상계의 모든 법은 주관체(主觀體)와 객관계(客觀界)로 나눌 수 있는데 업(業)의 작자(作者)는 바로 일체 중생인 우리이다. 라는 <증일아함경> 에서 업설(業說)의 주체를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 윤회하는 세계는 육취(六趣)인데 이를 의보(依報), 즉 객관계라 하고, 사생(四生=태난습화(胎卵濕化))의 다름과 그에 따른 모습을 정보(正報), 즉 주관계라 한다. 이 모두 중생 각자의 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업설에 따르면 그 사이에 어떤 초월적 존재나, 항상(恒常)하여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업을 짓게 되고, 또 그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과보(업과)를 받아 끝없이 생사의 세계에 윤회하는 것이 바로 업설과 윤회설의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업과 윤회설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이것만이 아니라 무명번뇌에 의해 업을 짓고 그에 따라 끝없이 생사의 세계에 윤회는 삶으로부터 초월 즉 해탈과 열반을 나타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 자신의 업에 의해서 육도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우리 삶을 결정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밝히는 것으로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이 있는데, 현재 삶의 모습은 전생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내생의 삶은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내용으로 육도 윤회를 벗어난 삶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생사의 세계에 끝없이 윤회하는 것은 무명 번뇌에 의한 업력(業力)이지만, 수행을 통한 해탈 즉 열반을 이룰 수 있는 길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바로 업설(業說)과 윤회설(輪廻說)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