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에서 서북쪽으로 30 여 리쯤
되는 곳에 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팔공이다.
이 산에는 세 개의 봉오리가 있어 중봉, 동봉,
서봉 이라 부른다. 비로봉은 높이가
해발 1192m가 되고 그 모습이 가장 신령스러우며
능히 뭍 봉오리를 거느리고 있어, 가히 모든
산들의 주인이라 할 만하다. 개략적인
산세를 살펴보면, 그 맥은 보현산과 연해있고
멀리 백두대간(태백산맥)의 한 갈래가 되기도
한다. 또한 주변의 낮은 지대로부터 우뚝하니
높이 솟아 사방으로 널리 퍼져있으므로, 능히
한 지역의 중심이라 하여도 무방하다. 세 개의
봉오리로부터 비틀리듯 길게 뻗어 수많은 계곡과
산을 만들었으니, 산이 높아 계곡이 깊고 계곡이
깊어 물길이 길다. 이러한 이유로 예로부터
이름 난 스님들이 절을 짓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여겨, 골골마다 아름다운 곳에는 반드시
절 집을 지었다. 우리 영천문화원
부설 한문교실에서는 지난 봄 청송의 주왕산
국립공원 내 주산지에서의 소풍이후로 다시
모이자는 의논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런 저런 속세의 사정으로 인해 끝내 모임을
갖지 못하다, 이윽고 작년 10월중에 다시 모임을
갖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모든 분들이 소풍을
가기로 하여 좋은 날을 고르니 10월 27일이라.
멀리 가자니 혹 다른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
여러분들의 안을 절충하여 팔공산의 진불암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맑고 좋은 날 비 오고
바람 붐은 자연의 이치이며, 호사다마는 인간사의
속성인 것.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치다 아침
일찍 문화원 마당에 모였더니, 세찬 바람이
불고 차가운 비마저 간간이 내려 추운 날씨에
짙은 회색 구름마저 두터워 오늘의 모임이
잘못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었지만, 그러나
시간이 되자 반가운 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에
저으기 안도를 하였다. 영천과
신녕간은 거리가 50여리가 되며 또한 신녕과
진불암과는 거리가 30여리라 도합 80리 정도의
먼 길이다. 그러나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인하여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목적지로 향하였다.
자동차 속도로 한 시간여 만에 수도사의 앞마당에
차를 세우자 시간은 오전10시 정도가 되었다.
수도사는 팔공산의 북쪽에 있는 수도산의 동쪽
산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제30대 진덕왕
때 원효대사와 자장율사의 두 분 스님께서
처음 세웠다니 곧 서기630년이다. 그 후 고려
희종시 보조국사가 수리하였으며, 다시 많은
시간이 지나 조선시대 환암선사가 다시 수리했다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참 오래 된 사찰임을
알겠다. 절 안에는 다소의 집들이 있긴 하여도
그러나 모두 근래에 새로 지은 것들이었으며,
오직 수도난야, 해회루가 오래 된 듯 하다.
그 절의 주련에 이르기를 "한 조각 붉은
연꽃 바다 가운데 있더니, 오늘 아침엔 도량
가운데 있다네" 이상은 원통전에 걸려
있음, "석가세존께선 히말라야에 드셨지만,
한번 앉아 도를 얻지 못해 6년을 보내셨네.
샛별을 보심으로 인해 도 깨달음 말하시고,
삼라만상의 생김과 죽음을 말하시어 3,000세를
두루 하셨다네" 이상은 ‘수도난야’에
걸려 있음 "삼계는 우물의 물 길음과
같으며, 백천만겁도 먼지 쌓이는 것에 지나지
않네. 이내 몸 이제 경사로움 지향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생에 이내몸 건느련가? 진실로 도의
근원은 공덕이 근본이라, 길이 일체의 선근을
길러보세" 이상은 해회루에 걸려 있음
수도사에서 조금 휴식을 취한 후
혹은 이리저리 흩어져 산을 오른다. 좁은 산길
양 옆에는 수많은 나무가 밀생하였는데, 내가
모르는 나무가 오히려 많았다. 출발하기 전에
내리던 가랑비가 이젠 흰 눈으로 변하니 이제서야
높은 산으로 들어 왔음을 알겠고, 바람이 불어
눈이 날리어 내 얼굴에 덮이니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음을 깨닫는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같은 무리를 만들고 희희낙낙 즐기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 허리 숙여 발 아래를 굽어보니
아득한 절벽아래 폭포가 보인다. 한동안 가물어
비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물의 양이 자못 많음을
보니, 나는 알겠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름철의
계곡에는 (비가 많이 내림에도 불구하고)오히려
물이 적고, 가을의 계곡에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오히려 물이 많다"
더니, 그 이유인즉 여름철엔 비가 내림이 비록
많다지만 나무들이 물을 먹음이 또한 많으니
흐르는 물이 적음은 마땅한 것이며, 가을철엔
비가 옴이 비록 적다지만 그러나 나무들이
물을 먹지 아니하고 토해 냄이 또한 많아 계곡의
물이 많음은 당연한 것이며 이 또한 자연의
섭리리라. 계곡의 맑은 물을 한
모금 들이키니, 비록 차갑긴 해도 그 맛이
은근하고 그윽하다. 서로 앞뒤를 다투면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는데, 모든 나무들이
서리를 맞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혹은 아직
잎이 파랗고 혹은 붉은 단풍으로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점차 높은 곳으로 오르자
더욱 많은 눈이 내리니, 하루 동안에도 기후의
변화가 이렇게 심할 줄이야! 길을 걸은 지
한 시간여 만에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로봉의 7부 능선쯤에 위치한
암자는 이름 하길 “진불암”이다.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높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어, 한편으론
엎드려 절을 하는 듯도 하며 또 한편으론
보호하는 듯도 하여, 내 비록 풍수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곳이 능히 좋은 곳임을 알겠다. 권군이
나에게 "이 암자 이름을 진불이라 이름
한 것은 맞은 편은 관음봉으로하고 뒤는 비로봉으로
하며, 오른 쪽은 보현봉으로 하고 왼쪽은 문수봉으로
하였기 때문이네" 라고 말해 주었다.
‘관음’이라는 것은 관세음보상의 줄인
이름으로 곧 자비의 화신이다. ‘비로’라는
것은 비로자나불의 줄인 말로써 법화세계에
살면서 그 몸은 법계가 넘쳐나 온 세상에 빛을
주는 것이니, 천태종에서는 법신불.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 밀교에서는 대일여래불이 바로
이것이다. ‘보현’이라는 것은 보현보살의
줄인 말로써 부처님의 리.정.행의 덕을 관장하고
문수보살과 더불어 부처님의 시위보살이 된다.
‘문수’란 문수보살의 줄인 말로써 지혜를
관장하며, 오른 손에는 지검(知劍:지혜를 다스리는
칼)을 쥐고 왼 손에는 청연화(靑蓮華:푸른
연꽃)를 쥐고 있고, 법신과 반야(지혜) 해탈의
덕을 골고루 갖추었다 한다. 마침 암자 전면
문미에 기문이 편액으로 걸려있어 나는 손수
그것을 베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불암 불량등촉량 중건기 신녕 고을의 서쪽
30리 지점에 진불암이 있으니, 이는 신라시대의
오래 된 사찰이다. (그 곳은) 까마득한 비로봉의
주 봉오리 아래에 있고, 천 길 아득한 폭포
물 입구의 가운데에 있으며, 10층 높이의 기우제를
지내는 단소(壇所)에 있다. 수많은 산들이
겹겹이 서 있으며 수많은 골짜기엔 맑은 물이
흐르니, 일찍이 이곳은 모든 이들이 선(禪)을
하고 도(道)를 닦는 이름 난 곳이기도 하며,
보살들이 복을 비는 맑은 장소이기도 하며,
한 지역을 진압하는 정맥(正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려들도 쇠잔해지고 재물도 바닥이
나 거의 (절을 온전히)보존하기가 어려웠었는데,
신녕고을의 한공과 이공 그리고 의흥의 김공께서
이 절이 쇠잔하고 황폐함이 극심함을 안타깝게
여겨 뜻을 같이하는 사람 20여명과 같이 불량등촉량(佛粮燈燭樑:부처님께
밥을 드리고 향불과 촛불을 공양하는 집)을
만든 (다시 수리한) 지가 지금부터 17년이
되었다. (그후 다시) 논 수십 마지기를 팔고
(절지를 땅을) 영납(永納)받아 ‘불량등촉’의
자본으로 삼았으며, 대구 동화사의 자월화상의
오래 묵은 선근(善根)으로 또한 재물을 모아
절 집을 수호하고자 하는 성금을 헌납하심이
천금(千金)일 뿐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이
암자의 낡고 비 가 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기둥과 서까래가 무너지고 자빠지는 위태로움을
차마하지 못해 똑 같이 백냥(百兩)의 돈을
내어서 양운화상과 더불어 절을 다시 수리하여
그 공사가 완공되자, 나에게 기문(記文)을
쓰고 또한 (나무판에 기문을)새기게 하시기에
이윽고 명(命)을 받들어 (나의) 재주 없음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짧은 글을 썼으니, 이것으로써
훗날의 사람들에게 이 뜻을 밝힌다. 임금님
재위8년 동짓달 모일 사미승인 경문이 글을
쓰고 새기다』 위의 기록을 미루어
살펴보면, 다시 수리한 연도는 서기1840년이며
'진불암'의 다른 이름은 '불량등촉량'이다.
또한 다시 수리한 17년 후에 다시 수리하였으니,
바로 1857년 조선조 순종재위8년이 된다. 그러나
옛 자취는 사라져 단 하나도 존재치 아니하고,
무너진 담 장 아래에는 묵은 풀들만 어지럽게
돋아있다. 아! 슬프다. 하늘과
땅도 오히려 영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들이리요? 인간들은 오래고자 하지만 능히
하늘과 땅을 이기지 못하며, 하늘은 영원하고자
하지만 능히 세월은 견디지 못하는 것. 애오라지
우리 인생들은 일생을 순간이라 여겨 넓게
덕을 베풀고 사람들을 도와 이것으로써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계책으로 삼아야 하리라. 같이
가신 분들은, 나의 친구인 현보 권영주. 원정
최종윤 부부와 두 딸. 최순덕 최길자
김매옥 여사. 김락민 선생 부부. 황명희 장원식
모자. 총무 유혜숙. 나의 아내와 해웅이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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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佛庵探訪記
壬午菊秋 永邑西北約三十里許有太原,命之八公也.是山岑頭有三,曰中峰曰西峰曰東峰,夫東峰者,高爲四千餘尺,其象最靈,而能率諸峰,可以爲主顚也.槪觀山勢,脈連普賢,而遠爲大幹之支流也,又兀然特立,周布四方,能爲一區之鎭矣.自三峰行龍千里,能作萬壑千峰,山高而谷深,谷沈而水長也.是故,自古名僧,可以爲適處,谷谷勝區,必爲僧舍.我等永川文化院附設漢文敎室,昨春靑松周王山域內周山池會以來,再會之論不斷,然以彼此世情,終乃未成,已矣是歲壬午十月中,再發會論.於是詢問諸衆,選拔暇日,則十月二十七日也,欲往遠處,而或恐多事,以衷諸議,定乎公山之眞佛庵也.然晴良而易變者天也,好事而多魔者人事也.當日仲朝,到於文化院之庭,飄風疾馳,而寒雨間歇,氣勢凜洌,而灰雲重疊,余恐爽失今會,而時到全集,是亦杞憂而安堵焉.永與新寧,相距五十里餘,且新寧與眞佛庵,相距三十里餘,而都合八十餘里,其路程不爲不多矣,然唯有嘉懷,樂以出程.以車速時間餘,停車修道寺前庭,時卽午前十時也.夫修道寺,有公山之北修道山下東麓,羅代第三十代眞德王時,元曉慈藏兩師始創,則西曆六百三十年也.其後麗代熙宗時,普照國師重創,歷轉入鮮換庵禪師再重云,可知古刹也.雖然,今見寺內,猶有多少僧寺,而皆爲新創,唯於「修道蘭若」「海會樓」,古痕存之,使見者斟酌其實爾.『其柱聯曰「一葉紅蓮在海中,今朝降赴道場中」(以上圓通殿)「世尊當入雪山中,一坐不知經六年,因見明星云悟道,言詮消息遍三千」(以上修道蘭若)「三界猶如汲井輪,百千萬劫歷微塵,此身不向今生慶,更待何生度此身,信爲道源功德母,長養一切諸善根」(以上海會樓)』少休是寺,移足行步,散兮登山,俠路兩岸,叢林??,以余之淺見,不知名者多焉.出前細雨,素雪以變,而可知入山,因風飄雪,向顔驟來,而始覺節換.三三五五而就同人,嬉嬉樂樂而賞勝光.俯見足下,而便見懸河,小雨旱乾,而猶量頗多,嗚呼!我知之矣.古人有言,夏溪猶少,秋溪猶多.其故也則,於夏降雨雖多,而樹飮者亦多,當乎流量少矣,於秋雨露雖寡,而樹吐者亦過矣,當乎流量亦過,是亦攝理.於是飮乎澗水,雖有冷寒,其味隱幽,足爲甘露.相爭先後,經乎崎嶇,羅列草木,盡爲侵霜,或靑或紅,各示其情.漸登山瘠,降雪尤甚,一晝之間,氣變極甚.行路時辰餘,旣矣到定處.毘盧峰之七部許,一有庵子,名曰眞佛.以庵子中心,環圍諸山,一見俯揖,一見保違,余雖不爲勘輿,而能知吉地.權君於予曰,命名眞佛者,案爲觀音,背爲毘盧,右爲普賢,左爲文殊之故也.觀音者,觀世音菩薩之略名,卽慈悲之化身也.毘盧者,毘盧舍那之略名,居乎法華世界,其身充溢乎法界,光明遍照,天台法身,華嚴報身,密敎大日如來是也.普賢者,普賢菩薩之略名,管攝佛陀之理定行之德,與文殊以爲釋迦之協侍佛也.文殊者,文殊菩薩之略名,管攝智慧,右手持知劍,左手持靑蓮華,具足於法身般若解脫之德也.會僧舍前楣,扁以揭之,余以手謄書,其文曰『「眞佛庵佛粮燈燭樑重修記」新寧之西三十里許,有眞佛庵,乃羅代古社也.有億丈毘盧之主峰下,有萬?靈瀑之水口中,有十層祈雨之祭壇.千峰重立,萬壑證(澄)流,嘗是諸禪修道之名區,檀越祈福之淨所,一境鎭壓之正脈也.而僧殘財盡,幾至難保,本邑韓公李公義興金公,戀斯殘廢之甚,與同志者二十餘人,共成佛粮燈燭樑者,十七於此矣.買畓數十斗,地永納,爲佛粮燈燭之資,而大邱桐華寺慈月和尙,以宿世之善根,亦成財,獻誠守護佛宇者,不?千餘金.遂憐玆庵凡解浸漏之,不忍棟樑傾頹之危難,勻出百兩錢,與兩運和尙,重修訖功,而使我以爲記而且刻,故旣已承命,不揆不才,聊將尺寸之書,以明後來者斯志云爾.聖上卽位八年丁巳至月日沙彌敬文書刻』上書以考之,重創于西曆千八百四十年也,名曰佛粮燈燭樑.又重創十七年後再創,年卽千八百五十七年純宗在位八年也.然古蹟泯滅,一無存焉,毁垣之下,宿草亂生,嗟乎!天地尙不能久,而況於人乎?人欲長久,不能勘天地,天欲終古,不能勘光陰.聊將我等,一生以爲瞬息,廣濟報施,以爲子孫之計宜也.同參者余友玄甫權寧柱,元亭崔鐘潤夫婦及二女,崔順德,崔吉子,金梅玉,金洛敏先生夫婦,黃明姬張源植母子,總務兪惠淑,余之荊妻裵星美及海雄等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