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9(2005)년 6월호 Vol.5,No.53. Date of Issue 1 Jun ISSN:1599-337X 

 

 

 

 

 

 

 식(食)

범수

 wellbeing의 바람이 널리 부는 것 같다. 그 가운데서도 식생활에 대한 인식변화가 두드러진 것 같은데, 언론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내용을 볼라치면 필자의 입장에서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다. 간단명료하게 말해서, 음식재료는 자연식, 식습관은 적절, 식생활은 품위를 두고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다. 하여튼 그 동안 잘못된 식생활에 따른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반성과 전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관점에서 웰빙에 따른 일련의 변화를 환영한다. 그것은 식 재료의 자연식 선호로 농약 등에 따른 오염문제 등을 줄일 수 있으며, 적절한 식습관은 이차적인 음식 쓰레기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품위 있는 식생활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웰빙에 따른 순 기능과 함께, 역 기능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논외로 하자. 한편 요즘 크게 유행하는 요가가 요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단지 체조로 전략되었듯이 웰빙의 바람 역시 그렇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것은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 여러 현상들이 본질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인 부분에 치중하며, 이른바 '묻지마' 식의 따라하기 부류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참 살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필자의 관견을 간략하게 피력하고자 한다. 
 필자가 거처하는 곳에 이런 글귀가 있다. “사찰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음식을 받아 먹는 법이 없으니, 공양전이거나 후이거나 도우세요.” 이 글을 보는 상태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마치 훈계식의 글귀를 붙여 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사찰에서 식사(공양)를 할 때, 예절뿐만 아니라 가치관마저 다르다는 것을 자주 느끼기 때문인데, 그것은 아마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익혀온 것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찰에서는 음식을 먹는 것, 역시 수행으로 본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소심경>에 간략하지만, 잘 설명되어 있다. 그 가운데 ‘오관게(五觀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음식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정성을 생각해 볼 때, 부족한 나의 덕행으로 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쁜 행동과 말, 그리고 생각(貪嗔痴)을 다스려, 몸이 병들지 않도록 하는 약으로 생각하며, 깨달음을 이루기 위하여 이 음식을 받도록 하겠습니다.(計功多小量彼來處 忖己德行全缺應供 防心離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姑 爲成道業應受此食)”
  결제 때 스님들은 가사와 장삼을 입은(守護) 채, <소심경>을 외우며, 식사(供養)를 한다. 무더운 여름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여러 옷을 껴입고 밥상도 없이 밥그릇(鉢釪)을 바닥에 깔아 둔 채 <소심경>을 외우며, 절도 있는 식사를 하다보면, 쌀 한 톨에 들어간 정성과 공덕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서 밥을 받아 먹는다든지, 음식을 남긴다든지, 또는 편식내지 불평을 한다는 것은 사찰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경계하는 대목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단순히 음식재료와 종류, 식사예절과 방법 등의 외형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인식 변화도 반드시 뒤 따라야만 '참 살이'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오욕(財物慾, 色慾, 食慾, 名譽慾, 睡眠慾)이란 것이 있다. 그 가운데 식욕의 한 모습을 보자.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느긋하게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편식을 하면서도 허겁지겁 먹으며, 꼭꼭 씹지도 않는다. 또한 입 속에 음식이 가득 들은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씹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연신 젓가락으로 이 반찬 저 반찬을 집기 바쁘다. 허리 역시 꾸부린 채이다. 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자극적인 음식을 섭취한다. 
 경전(南本 大般涅槃經)에 따르면 먼저 "음식을 만들 때 정갈하여 더럽지 않아야 하며, 가벼워서 잘 조화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음식을 만들 때, 바르게 만들어 한다."고 한다. 한편 음식을 섭취하는 시간에서는 "천신은 이른 아침에 식사를 하고, 수행자는 정오 때, 그리고 축생인 짐승들은 오후, 귀신들은 늦은 밤에 식사를 한다."고 한다(天食時, 法食時,  畜生食, 鬼神食. 以上稱爲四時食.) 또한 식사의 종류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누는데 이를 사식(四食)이라 한다.
 사식 가운데 먼저 ① 단식이란 끊어(씹어) 먹는다는 뜻으로 향기, 맛. 촉감(香味觸)등의 것을 기본이 되는 음식이다. (段食, 卽以香味觸等色法爲體之飮食, 資益諸根. / 段食又分粗細二種 ; 前者如普通食物中之飯麵魚肉等, 後者如油香氣及諸飮料等.)
② 촉식이란 정신의 주체가 감각기관을 따라 대상을 인식할 때 생기는 주체적인 심리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심리 작용을 의지하여 감각이나 의지를 기르기에 식(食)이라고 한다.(觸食, 卽精神之主體透過感覺器官, 由取外境(客體)時所起主客接觸作用的心之作用, 依此能長養感覺意志, 或資益肉體, 故稱爲食. / 例如觀戱劇終日不食亦不感饑 ; 又如孔雀鸚鵡等生卵畢, 則時時親附覆育溫暖之, 令生樂觸, 卵則受此溫熱而得資養, 故又稱溫食. 人之衣服洗浴等亦爲觸食.)
③ 사식이란 의지의 작용인 생각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존재의 상태로 유지하거나 만들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존재의 상태가 연속하는 까닭에 이 역시 식(食)이라고 한다. (思食, 卽意志之作用(思), 期求自己所好者存在之狀態;以其能延續生存狀態, 故稱爲食. / 若彼諸卵思母不忘便不腐壞, 若不思母卽便腐壞 ; 又如人之望梅止渴精神食糧等.)
④ 식식이란 정신의 주체를 가르키는 것으로써 앞의 세 가지 식(食)의 세력에 의지하여 미래의 과보를 조작하여 그것으로 목숨(身命)의 주체를 삼기에 식(食)이라고 한다. (識食, 指精神之主體. 依前三食之勢力能造作未來果報之主體, 以其爲保持身命之主體, 故稱爲食. / 以第八阿賴耶識爲體, 支持有情身命不壞者, 如無色界及地獄之衆生以識爲食.)
 위의 네 가지는 음식과 정신 작용으로 우리들의 육신을 양육하여 존재하게끔 하기에 식(食)이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우리의 식생활은 주로 단식이다. 그러나 정신활동의 범위가 높아 질수록 식(食)의 단계가 높아지며, 네 종류의 식(食) 모두에는 '끌어당기다.(牽引)', '기르다(長養)', '보존해 나간다(持續)'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섭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삶의 의미와 방법에 목적을 두는 것으로,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음식이란 단식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정신적 작용인 것을 미루어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맛을 기준에 두고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기보다는, 어떤 관점에 먹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필자 나름대로의 참살이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물을 답을 알고 있다>를 읽고

김지민

 과학의 달을 맞아 나는 아빠의 추천 책인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읽어보았다. 이 책은 의학박사 에모토 마사루씨가 물을 얼려 다양한 물의 결정 사진을 찍은 후 그 모습을 설명한 것으로, 신비로움에 끌려 꼭꼭 새기며 읽었다.  "물이 무슨 답을 알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물음에 대한 첫 번째 실험은 종이에 글을 써서 물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먼저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각국의 언어로 글을 써서 물에게 보여주었다.

 언어에 따라 형태는 다르지만 정돈되고 깨끗한 결정이었다. 기분 좋게도 한국어의 '고맙습니다.'의 물의 결정 형태는 목련꽃이 활짝 피어있는 형태였다.
 따뜻한 마음이 스며있는 '고맙습니다.'가 물의 느낌도 밝게하여 환한 결정을 나타나게 한 것 같다. 반면에 ‘망할 놈’ ‘짜증나네, 죽여 버릴거야’ 등 사람을 저주하고 공격하는 말을 본 물은 결정이 부서지고 마치 어린아이가 폭력을 당하는 듯한 파괴적인 형상을 나타냈다. 사람이 저주적인 언어에 얼굴이 비뚤어지듯이 물도 얼굴이 비뚤어진 것 같다.
 이번에는 글 대신 소리로 결정 실험을 해 보았다. 물이 든 유리병을 스피커 사이에 두고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곡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하트모양을 띤 귀여운 결정이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대한 물의 결정 형태였다. 가녀리면서도 아름다우며, 형형색색의 무지개 빛 같은 결정이 생겼다. 무지개 빛은 마치 희망의 빛 같아 보여 날 더욱 감탄케 했다.
 그 다음의 결정 실험은 전자파 실험이었다. 텔레비전, 컴퓨터, 핸드폰, 전자레인지 주위에 물이 든 유리병을 놓아두고 전자파를 작동시켜 보았다. 결정은 나타났지만, 찌그러진 결정이었다. 특히 전자레인지의 증류수는 악마와 비슷했다. 이는 전자파가 얼마나 해로운지, 자연의 일부인 사람의 몸에도 해를 끼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다.  이처럼 물의 결정은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어떤 것에 접촉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흘러 다니는 물에게도 이런 반응이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결정실험에 안타까움을 전해주는 결과가 생겼다. 각국의 수돗물로 결정실험을 했을 때 한결같이 결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 인위적인 독소가 들어있어서 순수한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보아 자연이 바로 생명인 것을 알겠다. 물에 대한 경이로운 사실을 확대시켜 보면, 사람과 사람간에도 따뜻함, 불행함, 행복함, 냉랭함이 결정모양으로 서로 전달되어 알려줄 것 같다.
 이 책은 비 물질 적인 것이 물질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의 결정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해 주었다.

 

 

 

 꿈을 담은 교구(敎具)

장남지

<사진 1>
 오늘은 지체부자유 아동의 책읽기를 돕기 위한 학습교구입니다. 학습교구는 삼각대, 낱말우산, 교정볼펜, 자석 책과 자석막대가 있습니다.

<사진 2>먼저 학생들에게 친근함을 주기 위한 개구리 그림이 그려진 삼각대는 앉아있기 불편하고, 엎드린 채 팔꿈치로 지탱하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리고 학생에 따라 조정할 수 있도록 각조정이 가능하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딱딱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이불이나 푹신한 것을 하나정도 깔면 더욱 편안하게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겠지요.

<사진 3> 다음은 낱말우산입니다.
삼각대에서 책을 보는 용도 외에 단순히 누워있어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고안된 것으로 우산모양으로 낱말들이 돌 수 있게 제작되어 학생의 어휘발달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 4> 세 번째 교정볼펜은 연필을 쥐는 힘이 부족하거나, 쥐는 법이 서투를 수 있는 아동, 또는 꼭 세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쓸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볼펜에다 매직 고무를 사용에서 일정한 모양을 만들어 말리기만 하면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겠지요.

<사진 5> 마지막으로는 어느 책이나 응용할 수 있는 것인데요.
책 넘기기가 불편한 아동들을 위해 책에 자석을 붙여주고, 자석이 붙은 막대를 사용해서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페이지가 많은 책의 경우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지만, 책읽기를 막 시작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에게는 책읽는 재미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모두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자동차에 오토아시죠? 오토로 된 자동차도 처음에는 장애인을 위해 고안된 차였다고 합니다. 교구를 만들다 보면, 처음에 의도는 장애인들을 우한 도구로  만들었는데 막상 만들고 보면 장애의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혈의 누

조혜숙

 

 지금까지 살아오던 모든 것에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1800년대 조선말기 혼돈의 시대가 배경입니다.
 섬의 주인인 강객주는 제지소를 운영하는데, 햇볕과 물이 좋아 질 좋은 종이를 만들어 조정에 공물로 바치며, 사적인 부와 공적인 덕을 누리며 살아 간다. 그러다 서학을 했다는 음모에 휘말려 다섯명의 가족이 5일간 다른 방법으로 처형된다. 객주는 가장 잔혹한 방법인 거열, 가족은 효시, 육형, 석형, 도모지 등의 방법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7년 뒤 이 섬에 공물을 바치려던 배가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이원규(차승원)와 최차사(최종원)일행이 도착하면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행이 도착한 첫 날 장학수란 사람이 죽창에 꽂힌 채 발견되고, 둘째 날은 호방의 시신이 물에 삶겨져 나오고, 셋째 날엔.... 이런 식으로 7년전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그 방법 그대로 살인은 계속 이어진다. 크고 작게 던져지는 단서와 설정들은 정확하게 인과관계로 맺어져 있고, 섬사람들은 7년전 억울하게 죽은 강객주의 원혼이 진노한 것이라 여기며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나만 살고자 하는 이기심이, 내 욕심만을 채우려는 탐욕이, 탐욕 뒤의 두려움이,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비겁함이, 그 모든 어리석음이 이 살인을 공모하고 저지르는 범인이다.
 영화 '혈의 누'는 적당한 추리와 호기심, 긴장감을 치밀하게 엮어내면서 그럴 듯 한 숲속의 추격신도 흥미 진진하다. 또 시대극의 고증인 반상의 엄격한 말씨 또한 품격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미는 극 중에 흐르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1악장과 쇼팽의 왈츠 3번인 것 같다.
 피아노와 목관악기를 뺀 채 현악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만들어져 영화에 삽입되었는데, 김대승 감독은 "영화의 템포가 빨라질 땐 느린 음악을, 템포가 느릴 땐 빠른 음악이 쓰였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말했고 그에 맞춰 음악감독은 영화 전체적인 호흡을 관객이 쫓아가는데 무리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지금껏 보통의 영화가 지향해왔던 영화의 말미에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하는거다'라고 은근히 강요해왔던 유교적이고 도덕적인 방향에서 슬쩍 비껴 나와 , 이 영화에 대한 각자의 생각은 감독의 생각이 아닌,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강변의 유채 꽃

문옥선

  “꽃이 피었는데 어째서 한번도 안 들리나.”라고 하시는 스승의 전화를 받았다. 제자가 먼저 안부를 여쭙는 것이 도리일진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으니, 변해가는 것이 세월만이 아님을 필시 느끼셨을 것만 같다. 지금쯤 교정에는 꽃향기가 어울러져 눈이 부실 터이다. 봄날의 꽃 색깔은 유난히 곱고도 화사하다. 벌써 철쭉꽃도 한창이다. 그런데 철쭉꽃만이 아니다. 지금 강변에는 유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을 강이랄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강이 내 마음속에 자리한 뒤로는 맑은 물이 넉넉히 흐르는 곳을 보면 강이라 여긴다. 그러니 강인 것이다.
 제주도의 유채꽃밭을 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언젠가 유채 꽃이 피어있는 꽃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이었다. 해질 무렵, 더위도 식힐 겸해서 강변로를 갔었다. 그런데 그곳에 거짓말처럼 유채 꽃이 피어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잘 가꾸어진 강변로를 따라 족히 이십여 분을 걸어갈 만큼 꽃길은 길고도 예뻤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이제 생각하니 유채를 심기 위해서 그때 일군들의 손놀림이 그렇게 부산했었나 보다.  그 이후로 이곳에 처음이었다. 그렇더라도 씨를 뿌리고 잎이 핀 것도 보지 못한 나는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오묘한 조화이지 싶었다.  손길만 닿아도 일렁일 것 같은 유채 꽃은 한번의 비가 흩 뿌리고 간 뒤로 어깨높이까지 피어올라 간간히 불어대는 바람결에도 넘실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꽃길 따라 걸으며 도란거렸다. 걷고 싶었던 길을 걸을 수 있는 나는 참 많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가 좋아해서 자주 갔던 강변길이 있었다. 그곳은 강변도 아름다웠지만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있었기에 운치를 더했었다. 일상에 쫓기면서부터 그 길과는 멀어져 무척이나 아쉬웠는데, 지금 이곳이 나에겐 그 길 못지 않은 기쁨을 대신해주고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 지듯이 내 주변의 경관이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곳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니,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어 보인다. 아름다운 주변 환경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서있는 내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새삼 느낀다.
 날이 갈수록 알음알이가 쌓여져 가는 내가 아닌, 오히려 비어져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해가는 일상에서 남은 시간의 귀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모른다는 것이지. 세계의 인구 60억 중의 하나인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안다 해도 겨우 세상의 60억분의 1만을 아는 것이잖은가.” 은사님은 이런 말씀을 끝으로 보리밥을 먹게 한번 들르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사람만으로 얘기를 하더라도 이럴진대 변화무쌍한 자연계를 놓고 말하자면 드러내고 있는 앎이란 얼마나 작고 하찮을지. 금년 초부터 톨스토이가 지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하루치씩 읽어가고 있다. 마침 오늘 일자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인생의 참된 목적은 무한한 생명을 이해하는데 있다. 인간은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그동안 얄팍한 지식이 내 전부인양 우쭐대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내 스스로가 부끄러움은, 그런 내 자신의 치부를 조금쯤 들여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주신 스승이 있었기에 또한 가능한 얘기일 것이다.  새삼 스승의 은혜에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受持
讀誦

 

 백유경

편집부

百喩經 - 經卷第三-                                                                       尊者僧伽斯那撰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喩 고客駝死喩 磨大石喩 欲食半병喩 奴守門喩 偸리牛喩 貧人能作鴛鴦鳴喩 野干爲折樹枝所打喩 小兒爭分別毛喩 醫治脊루喩 五人買婢共使作喩 伎兒作樂喩 師患脚付二弟子喩 蛇頭尾共爭在前喩 願爲王剃鬚喩 索無物喩 답長者口喩 二子分財喩 觀作甁喩 見水底金影喩 梵天弟子造物因喩 病人食雉肉喩 伎兒著戱羅刹服共相驚怖喩 人謂故屋中有惡鬼喩 五百歡喜丸喩

(五一)五人買婢共使作喩
譬如五人共買一婢。其中一人語此婢言。與我浣衣。次有一人復語浣衣。婢語次者先與其浣。後者애曰我共前人。同買於汝。云何獨爾。卽鞭十下。如是五人各打十下。五陰亦爾。煩惱因緣合成此身。而此五陰恒以生老病死無量苦惱방笞衆生

51. 매 맞는 계집종
 다섯 사람이 종 하나를 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종에게 말하였다. “내 옷을 빨아라.” 그러자 다른 사람도 “내 옷도 빨아라.”고 하자,  그 종은 말하였다. “저 분의 옷을 먼저 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이 화를 내면서 “나도 저 사람과 함께 다같이 너를 샀는데, 왜 저 사람의 것만 빨려 하는가?” 그리고는 열 대를 때렸다. 그러자 나머지 네 사람도 각기 열 대씩 때렸다.
 다섯 가지 쌓임(五蘊)도 또한 그와 같다. 다섯 가지 번뇌의 인연이 모여 이 몸을 이루는데, 그 다섯 가지 쌓임인 오온이 항상 생, 노, 병, 사의 한량없는 고뇌로 중생을 매질하는 것이다.

 

(五二)伎兒作樂喩
譬如伎兒。王前作樂。王許千錢後從王索。王不與之。王語之言。汝向作樂空樂我耳。我與汝錢亦樂汝耳。世間果報亦復如是。人中天上雖受少樂亦無有實。無常敗滅不得久住如彼空樂

52. 왕의 거짓말
  왕은 돈을 천 냥을 주기로 약속하자, 아이가 왕 앞에서 악기를 연주한 뒤, 왕에게 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왕은 돈을 주지 않고 말하기를 “네가 음악을 연주하였지만, 그것은 한 낱 내 귀만을 즐겁게 하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너에게 돈을 주겠다고 한 것도 다만 네 귀를 즐겁게 한 것뿐이다.”고 하였다.
 인간이나 천상에서 적은 즐거움을 받지만, 그것은 실(實)이 없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또한 오래 머무르지 못하나니 마치 저 빈 음악 소리와 같다.

 

 

사진
공간

 

 

편집부

 

 박종연

 



좋은인연

 

 

 경북 군위군 박타산 석조 마애보살입상

 편집부

 

 식(食)

 범수

 

 <물을 답을 알고 있다>를 읽고

 김지민

 

 꿈을 담은 교구(敎具)

 장남지

 

 혈의 누

 조혜숙

 

 강변의 유채 꽃

 문옥선

 

 백유경

 편집부

 

 부석사

 편집부

 

The Monthly Web Magazine DHARMA(ISSN: 1599-337X)
발행인: 범수스님
(EDITOR E-mail   savaha@nate.com)
www.savaha.or.kr



 

 나눔과 어울림을 지향하는 좋은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