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8(2004)년 4월호 Vol.4,No.39. Date of Issue 1 Apr ISSN:1599-337X 

 

 

 

 

 

 

 

 

 

 

 우리는 하나

범수

 우리는 종종 ‘하나’라는 말을 즐겨 쓴다. 보통은 공동의 이익이나, 학연, 혈연, 지연, 등 이런저런 이유에서 하나라고 하지만, 막상 왜 “하나인가?” 라고 반문한다면, 망설여진다. 또 진짜 하나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인연이란 서로 지어 가는 것으로 악연이든지 좋은인연이든지, 이미 정해진 인연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고정된 것도 아니랍니다. 우리의 만남은 60억명 가운데 한 명, 즉 60억분의 1입니다. 님은 지금 어떤 인연을 짓고 계신가요.” 필자가 즐겨 하는 말이다. 보통 이런 말은 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마 사회 통념적인 ‘악연, 연분 등을 포함한 인연’ 정도의 개념으로써 받아들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60억분의 1 이라는 말 가운데, 1은 자기일 수도 있듯이 남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날 때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대는 60억분의 1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입장에 서서 1을 이야기한다면 단순히 1을 뜻하지만, 누구든지 1일 될 수도 있다는 견해에서 본다면 60억/60억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도의 개념인 개인적인 만남이 아닌 것이다. ‘한 티끌이 온 우주를 감싼다.’는 말에서 우주와 티끌이 별개의 인연이 아니라, 서로를 포함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서로를 포함하는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류의 한 덩어리도 아니며, 잡동사니로 버무려 진 하나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특성을 지닌 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조화를 이루는 하나인 것이다.
 이상은 필자와 인연 닿는 분들에게 자주하는 이야기로서 ‘하나’니 ‘60억’이니 하는 말은 부분과 전체 또는 개인과 사회, 나와 우주를 대신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개인과 주변 환경을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지 <구사론>의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을 통해 살펴보자.(因業滿業=總報別報), (世無別體 依法而立, 然依法而假立其名 三界(慾色無)五趣(除外修羅)).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업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업력(業力) 즉 업의 힘에 의해 생성과 소멸된다고 하는 것으로 여기서, 업(業)이란 우리의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이는 개개인의 행위(行爲), 조작(造作), 작용(作用), 소작(所作) 등으로서 이와 같은 업에 의해 초래되는 세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때, 주관적 세계인 유정세계(有情世間)와, 그 유정들이 살아가는 공간인 객관적 세계인 기세계(器世間)로 구분한다. 이 모두는 각자의 업에 의한 것으로 개별생명체나 각자의 고유한 과보의 원인을 불공업(不共業)이라 하며, 중생들이 공동으로 수용하는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을 초래하는 것을 공업(共業)이라 한다.(正報 依報) 즉 우리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각자의 업에 의해 초래되며, 각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결국 우리는 혼자만의 세계나 동 떨어진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하나가 된다. 나의 업에 의해 초래된 삶의 터전인 산하대지가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듯이, 타에 의해 초래된 공간에 나 역시 버젓이 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하나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옥선

최근 들어 산행을 시작했다.  건강을 위해서는 운동은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선뜻 내키는 운동이 없었는지라 그냥 저냥 지냈는데 점점 떨어지는 체력 앞에서 몸을 추슬러야만 했다.
 기력이 딸리다보니 자주 눕게 되었고 몸의 군살까지 늘어가는 악순환이었다. 게다가 단거리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피로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우선 걷기라도 해야 했다. 자신 없는 달리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맘만 먹으면 될 일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숨이 차고 둔하던 걸음걸이는 한 일 년이 지나는 사이 시나브로 좋아졌고 나중에는 똑 같은 거리를 걸었는데도 시간까지 단축되었다. 그러자 내친 김에 산행까지 결심하게 된 것이다.
 산은 좋아했지만 언제고 절에 가기 위해 산을 찾았지 산행만을 목표로 집을 나서지는 않았었다. 그러니 산행이라고 할 수도 없을 그간의 나의 산행이라면 절이나 암자를 찾아 올라본 높이의 산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산을 오르는 것은 체력을 기르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상 정복에다 목표를 두지는 않았다. 내가 힘닿는 대로 오를 만큼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정상이라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 산에 올랐다.  그랬기에 비록 남들이 말하는 정상정복은 아니었을 때라도 만족할 수 있었고 뿌듯하기도 했다.  또 그런 날은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니 무엇보다 내 자신이 대견하고 행복했다.
 내가 정한 산행 장소는 잘 알려진 등산로이나 일부러 평일을 이용해 오르기 때문에 중간에 누굴 만나지는 일도 드물다. 무엇보다도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걸으며 내 자신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다. 이번 주에도 예정된 산행을 했는데 봄의 문턱에 들어선 탓일까, 요즈음의 태양 빛은 날이 갈수록 강렬해지는 것 같다. 몸도 또한 조금씩 단련되어져 처음과 달리 산을 오르기가 한결 나아졌다. 가끔은 바위에 걸터앉아 땀을 식혔다 가는 여유도 부린다. 그럴 때마다 돌아다 보는 길, 마치 내 살아온 날들 같기만 한 굽이진, 그러나 가끔은 돌아보고 싶은 길이다.
 엊그제도 잠시 땀을 식힌 다음 다시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곁에 가까이 가고 나서야 타 지방에서 온 분들임을 알 수 있었다. 사투리가 포근한 고향처럼 정겹다. 그 시간에 그곳까지 왔으니 새벽부터 무척이나 분주했을 것이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부터는 꽤나 가파른 길이었으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 무사히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깎아지른 듯 높다란 그곳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위에서 어떤 분이 말을 건넸다.  “아가씨요? 아주머니요? 내가 선물하나 드리리다.”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분은 자신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불쑥 내밀었다.  지팡이라니, 순간 당혹스러웠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아직 젊은 탓이겠으나 등짐을 진 것도 아니니 힘겨워도 혼자 힘으로 오르고 싶었다.  산행 시에는 가능하면 길 옆 나뭇가지일지라도 함부로 잡지 않는다. 어찌 나무의 신음소리를 들었겠는가, 홀로 서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이거늘, 나문들 다를 수 있겠는가.
 드디어 산의 끝 자락에 발을 내딛자 “산 정상입니다.”누군가 외쳤다.  난 웃음으로 화답했다.  김해의 한 산악회에서 오셨다는 그분은 너른 바위 곁에서 바람을 맞이하던 나에게 따뜻한 커피를 권해주셨다.  산바람이 스치고 간 내 얼굴에는 가실가실 땀의 흔적들이 피어나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삶이 아름다운 나이

장태자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겪었을 중년에 접어들 때쯤이면, 저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둔 얘기들이 있을성 싶다. 그러나 쉬이 내 뱉지 않는 것은 세월을 고스란히 삭히며, 살아온 동안 자기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자제력과 지혜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중용의 미덕도 알고, 자기 성찰을 통한 혜안도 경험함으로써, 진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일 것이다. 마치 볕 잘 드는 양지쪽 탐스러운 꽃처럼, 잘 익은 포도주 같이 말이다.
 우리네 중년들이 곰삭은 얘기들을 맛깔스럽게 풀어놓을 수 있음은 아마도 세월 때문일 것이다. 볼펜이 아닌 펜을 잉크에 묻혀 쓰며, 전화가 아닌 편지를 섰다가 지우고 섰다가 지우고 결국 못 붙이고 마는 그런 시기를 경험하였다. 또한 없어서 재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전깃불도 드문드문 들어와 있던 시절, 자정이면 그 나마 들어왔던 전깃불도 저절로 꺼지고, 한 동네 두세 집에 밖에 없던 TV 앞에 구경꾼들로 미어 터지던 어려웠던 시기를 보냈지만, 지금 그 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세월이라는 이름의 연륜일 것이다.
 이웃의 불행에 함께 눈물 흘리며, 마음 다잡은 벗의 소식에 안도하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게 아름다운 중년으로 익어 갈수 있는 힘일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우리 서서로가 만들어 가는게 아닐까?

 

 

 

 현주 이야기

장남지

 3학년이 되어 복수전공과 함께 학과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시간 관계로 작년까지 해오던 자원봉사나 다른 일들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장애아동의 학습 도우미로 자원봉사를 해왔지만, 차츰 학교의 일관계로 매주 정해진 시간에 현주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겨울 방학 때, 일정정리를 해가면서 현주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과 앞으로 학교에서 여러 가지 습관을 길러줄 수 있는 방법들을 현주 부모님께 말씀 드리고 또 의논하면서 혹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다른 자원봉사자가 오시더라도 좀더 잘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새 학기를 맞았고, 현주도 일반학교에 통합학급으로 입학하게 되면서부터 매주 한번 방문하는 것도 시간이 맞지 않아 보름쯤을 보지 못했습니다. "현주의 학교생활은 어떤지? 또 잘 적응하고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이제 이렇게 한 주에 한번 오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토요일 오후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고, "방문을 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에 카메라도 챙기고 현주에게 줄 색연필과 현주의 언니인 현아에게 줄 작은 선물도 챙겨서 현주네 집을 찾아갔습니다.
 토요일 오후라 현주가 많이 피곤해 했고, 사실 공부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어머님께 허락을 받고 현주가 좋아하는 씽씽카(한 발은 바퀴가 달린 기구에 의존하고 한 발로 구르며 가는 건대.. 아실런지..^^;)와 현주가 잘하는 줄넘기를 가지고, 집 근처 학교로 갔습니다. 예전에도 현주가 기분이 좋거나 할 때, 몇 번 나가 논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집 앞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현주는 오르막길을 보자 이내 쌩하고 내려올 생각에 열심히 발을 구르며 올라갑니다. 내내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저는 괜히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나게 노는 현주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고  씽씽카를 타고 있는 현주에게 가서 이어 타기 놀이와 줄넘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뒤 현주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도 했습니다.
 현주는 아까 줄넘기를 하면서 놀았던 자기의 모습도 그리고 좋아하는 만화도 그렸습니다. 그렇게 현주와 두 시간정도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님과 식탁에 마주 앉아 현주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이며, 오늘 현주와 밖에서 놀던 이야기도 하면서, "이제 저도 그렇고... 현주도 그렇고... 오기가 힘들어 진다고..... 제때  시간 맞추어서 오기가 힘들어져서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어머님께서는 "미안하다"시며 "오기 힘든 줄 알고 있으니, 매주 오지 말고 2주에 한번 정도라도 괜찮으니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눈시울이 붉어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그만 와야겠다"고 생각한 저의 잘못을 깨닫고 나의 작은 편안함을 빌미로 이렇게 누군가의 믿음을 저버릴 생각을 했다는 것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 졌습니다. 그동안 많이 미흡한 저는 "현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잠시 소홀해지기도 했고, "나 하나쯤 그만둬도 상관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주와 저는 선생님과 제자의 사이보다는 같이 이야기하고 때로는 신나게 노는 친구같은 사이었던 것입니다.

 

 

 

 그림일기

김경연

제목: 도라지 까기
 도라지를 깠다. 엄마를 도와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라지 까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조금은 힘이 들었다. 양파자루를 손에 끼우고 비볐더니 싹싹 잘 까졌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정연이 다 컸네 빨리 시집 보내야겠다." "전 엄마 옆에서 오래오래 죽을 때까지 같이 있고 싶어요 알았죠." 휴~도라지 까느라고 힘만 들으면 뭐해 용돈을 받아야지 도라지를 까면 나쁜 마음이 깨끗이 하얀 마음으로 바뀌는 것 같다.

 

제목: 추석 날
아침에 한복을 입고 조상님께 차례를 드렸다. 차례를 지낼 때 우리 엄마만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내가 그랬다. "우리 엄마만 일을 하고 작은 엄마는 일어서서 를 드시고 고모는 앉아 계셔요?" 내 말에 작은 엄마와 고모는 웃으셨다. 나는 너무나 너무나 황당했다! 나는 많이 속상했다. 작은 엄마가 이렇게 말하셨다.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지? 니내 엄마가 대장이니까 일을 많이 하는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작은 엄마는 설거지를 다 하셨다. 작은 엄마한테 죄송했다. "작은 엄마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모르고 실수했어요."

 

 

 

 빅 피쉬

조혜숙

 아주 어려서부터 아들 윌(빌리 클루덥)은  아버지 에드워드 불룸(앨버트 피니)의 어린시절 아버지(이완 맥그리거)많은 얘기들을 끝없이 반복해 들으면서 자랍니다. 어려서 들었던 얘기들은 모험으로 가득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미래였지만, 이제 어른이 된 후에도 반복해서 얘기하는 아버지의 허풍을 너무나 지겨워 합니다.
그래서 결혼 후에 윌은 그런 허풍쟁이 아버지가 싫어 몇 년 째 왕래를 끊고 지내는데,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고향에 내려옵니다.
 윌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이제는 그 허풍스런 모험담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써의 진실을 말해주기를 기대하지만, 아버지는 그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어린시절의 아버지는 남들과 틀린 태어나는 과정을 거쳤고, 남들보다 빨리 자라나는 성장통도 앓았으며, 어린시절 친구들과 마녀의 집으로 찾아 가서 마녀의 눈을 통해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미리 보았으며, 만능스포츠맨이고, 발명왕이고, 해결사이며, 거인과 함께 했던 여행과, 신발을 벗고 사는 천국같던 마을과, 괴짜시인과, 늑대인간인 서커스단장과, 샴쌍둥이 자매,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의 극적인 로맨스까지 ...아들 윌은  진실을 알기위해 아버지 이야기속의 등장인물들을 찾아 나섭니다.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침상곁에서 그 다음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아들의 작별인사는, 지금까지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진정 소중한 진실이 되게 합니다.
 한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눈독을 들이기도 했던 대니얼 윌러스원작의 <빅 피쉬>는 감독 팀 버튼이 가장 자기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합한 소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과연 현실을 바탕으로 두면서도 충분한 환타스틱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을 허풍스럽고 끊임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 아버지와 그에 넌더리를 냈던 아들이었지만 ,그 환타스틱한 이야기가 결국은 아버지와 아들을 진정한 이해와 화해 그리고 서로간의 가족애를 확인하게 합니다.

 

 

 

 청암사(靑巖寺)

불원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그 해에도 올해처럼 윤달(閏月)이 있었다. 출가(出家 세속의 집을 떠나 불문(佛門)에 듦)하기 전 이름만 듣고 찾아간 그 곳, 물어물어 겨우 찾아갔지만, 벌써 어둠이 내린 뒤라 도량(사찰)에 들어서기도 전 “ 늦었으니 돌아가십시오.” 하는 스님의 한마디에 아쉬움을 남긴 채 뒤 돌아서야만 했던 그 곳에 출가한 뒤, 드디어 당당하게 4년을 살기 위해 방부(사찰에 거주하기를 청하는 일)를 들였다. 이제는 ‘청암사(靑巖寺)’를  생각만해도 마음이 따뜻한 곳이 되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면 지난 시절이 흑백필름처럼 지나간다. 말로만 듣던 치문(緇門, 승가대학 4년과정중 1학년) 첫 철(시기), 도량(규범)익히랴, 공부하랴, 운력(일)하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몰랐다. 오죽하면 대교반(大敎班 승가대학 4년 과정중 4학년)은 한번 더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는데, 다시 치문반에 들어가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할까? 그러던 어느 날 4월1일 만우절 아침부터 봄눈이 내렸다. 것이 왠 일인가! 봄에 눈이라 믿어지지가 않았다. 새싹이 올라오는데, 고향이 남쪽이라 출가한 뒤에야 많은 눈을 볼 수 있었지만, 봄에 내리는 눈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 하얀 나라의 선물을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사진도 찍고 눈싸움도 하고 그 사이 눈사람도 만들었다. 금방 녹을지라도...
 
 오랜 만에 느껴보는 여유 너무 기뻐 어떤 스님께서 전화로 이 소식을 다른 곳에 알렸더니 “거짓말하지 말라” 고 하더라나! 만우절이라 눈이 온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믿던 안 믿던 간에 우리는 그 날의 눈을 마음껏 즐겼다. 사진까지 찍어가면서...
4년 내내 많은 눈을 보았지만,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시절 처음 느껴본 여유라고나 할까? 항상 만우절이 되면 치문 첫 철, 그때가 생각이 난다.
 오늘은 지난 사진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볼까? 나의 도반들이 활짝 웃고 있겠지.

 

 

 

 친구

김지민

친구가 친구가
수학을 잘 하면
왜 이리도 질투날까?

친구가 친구가
공부를 잘 하면
왜 이리도 얄미울까?

친구가 친구가
한번 웃어주면
왜 이리도 즐거울까?

친구가 친구가
나랑 놀아주면
왜 이리도 행복할까?

 

 

 

 시골 예찬

손진숙

시골의 봄에는 마당에 내리는 햇살이 가닥가닥 빛을 쏟아내면, 땅이 환해져서 낮보다 더 밝은 해의 조명등을 켠 듯하다. 도람도람 하얗게 피어난 작은 냉이 꽃의 풀밭. 가을 억새가 비켜준 자리에 포롬 피어난 부드럽고 통통한 어린 쑥. 맑은 바람이 와서 땅도 씻어주고 하들도 씻어주고 그러면 사람의 마음도 걸리지 않는 맑은 바람이 된다.
 어느 봄날, 등산 길 작은 오솔길에 보랏빛 야생란 꽃을 발견했다. 그 반가움은 어린 자식을 본 듯 하여 다가가 쳐다보니 꽃이 말하는 것 같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필 때면 피었다가 질 때면 저절로 질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그런 꽃 옆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황토 빛 푹신한 흙이, 따스하게 반짝이는 햇살이, 솔 향기 벤 고향같은 숲이, 은빛 리듬으로 찰랑 거리는 맑은 호수를 건너온 바람이, 나를 나인 채로 그냥 있게 해준다.
 시골 사람인 내가 도시에 가는 날은 모든 볼일을 모아서 벼르고 별러서 가는 장날이다. 흙이 없어서 생명을 싹 틔울 수 없는 시멘트 길, 날카롭게 번쩍이는 사각진 높은 빌딩, 어디로 가는지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메케하고 희뿌연 공기, 표정 없이 바쁜 사람들. 어느 것 하나 눈 둘 때, 마음 둘 때가 없어 둥둥 떠다니다가 욕심만 잔뜩 물들여 온다.
 시골에서는 보지 못했으니, 가질 필요도 없었는데, 보았으니 끙끙거릴 수밖에 없는 심성을 다스리지 못해 도시에서 내 몰린 이틑 날 까지는 몸과 마음이 모두 앓는다. 이쯤 되면 시골 예찬이 아니라 도시 기피증이 아닌가?
 자연 속에서는 만물의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이 그대로 있기만 해도 조화롭다. 욕심낼 것도, 치장할 것도 못할 것도 없느니,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다.
 나무의 잔가지 끝은 있는 힘을 다해 어디로든 뻗어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얘기하고, 어떤 모습을 만들어 내든 완전함을 보여주고 있다. 봄볕 아래 흙은 빛을 받아들이고 온도를 조절해서 땅에 생명들이 살수 있게 해 주니 언제라도 다가가고 싶은 믿음이다.
 똑같은 봄볕아래 비닐하우스는 빛을 품지 못하고 눈이 찌푸려지게 번쩍거리는 모습이 도시에 간 편치 않는 내 모습만 같다.  생각해보면 요즘의 세상에는 흙과 비닐하우스. 시골과 도시 모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줄을 그어 놓고 마음 가는 곳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 하고를 정하니 의식의 층이 깊어질 수 있겠는가?
 시골에서 자연을 보고 느끼는 때묻지 않는 행복감과 자유로움이 한결같이 녹아 들고 간직되어 있으면, 그 마음이 도시에 가서도 깨어지지 않을텐데, 언젠가는 도시 예찬도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럴 수 있는 날이 오면 한계를 짓지 않고, 어떤 때를 만나도 동요치 않는 ‘주인의 주인’인 됨됨이로 삶의 예찬을 할 수 있겠지.
한결 같아라. 한결같아라. 꼭꼭 새겨지게 마법을 걸어본다.

 

 

 

 인연이란 단어로 추억하며

송지원

 지난 겨울 친구로부터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여행이라는 너무나도 커다란.. 방학중임에도 조금은 버겁고, 분주한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나에게는 친구의 제안이 너무나도 바램이었던 ‘쉼’을 주었기에 행복했다. 친구의 의견은 1박2일간의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절에 다녀오자는 것이었고, 모두들 바라던 것이었다는 듯 의견을 수렴하고, 계획했던 날짜가 다가오기를 두근거리는 맘으로 기다리곤 하였다. 드디어 날짜가 되었고, 기쁜 마음에 분주하게 움직여 기차에 올랐고, 우리를 실은 기차는 목적지를 향하여 신나게 철도를 미끌어져 갔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에 다들 설레었던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차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쉴새 없이 이야기 꽃을 피웠고, 어느새 도착해서 찾은 곳은 팔공산의 ‘은해사’라는 절이었다.
 긴 시간 먼 거리를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반기고 있었던 것은 밤새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과 해맑게 웃음으로 반겨주시던 ‘범수스님’.... 오랜 시간 힘겹게 찾아와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우리는 피곤함도 잊은 채 스님이 지내시는 절과 산사로 인도되어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스님과 나는 친구와의 통영여행을 통해 만남을 가진 적이 있던 지라 오랜만에 해후하는 사이라고나 할까? ^^
 스님이 지내시는 산사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너무나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고 또 경험하였다. 아궁이와 온돌, 가마솥,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해우소, 많은 장작들 아! 1박2일을 자칫 무박2일로 지낼 뻔하게 만든 장본인 ‘윷놀이’ 그리고 언제나 그립게 만드는 스님과 나누는 따뜻한 차 한잔....그리고 이야기들.....
 학기가 시작하여 방학 때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 지난 우리의 여행을 회상함은 분주하고 쉴 틈 없는 생활 속에 뜻 모를 웃음으로 활력을 불어넣는다. 우린 이것을 추억이라고 하고 그 추억 속에 함께 했던 이들은 모두 나에게 인연이라는 단어로 함께 한다.

 

 

受持
讀誦

 

 백유경

편집부

 

百喩經卷第二                                                                      尊者僧伽斯那撰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二七)治鞭瘡喩
昔有一人。爲王所鞭。旣被鞭已。以馬屎부之欲令速差。有愚人見之心生歡喜。便作是言。我決得是治瘡方法。卽便歸家語其兒言。汝鞭我背。我得好法今欲試之。兒爲鞭背以馬屎부之以爲善巧。世人亦爾。聞有人言修不淨觀。卽得除去五陰身瘡。便作是言。我欲觀於女色及以五欲。未見不淨。返爲女色之所惑亂。流轉生死墮於地獄。世間愚人亦復如是

 27. 말똥을 상처에 바른 사람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매를 맞았다. 그는 상처를 빨리 고치려는 마음으로 말똥을 발랐다.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는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나는 치료하는 방법을 확실히 배웠다.” 그리고는 곧 집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 등을 쳐라. 좋은 치료법을 알았는데 지금 시험해 보리라.”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쳤다. 그러자 그는 상처에 말똥을 바르고 의기양양하였다. 세상 사람들도 그와 같다. 사람이 ‘부정관(不淨觀)
*을 닦으면 곧 오온(五蘊)*의 몸의 부스럼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여식(女色)과 다섯 가지 탐욕을 관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 더러운 것은 보지 못하고 도리어 여색에 홀리어 생사에 흘러 다니다 지옥에 떨어진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도 실로 이와 같다.

* 부정관(不淨觀) 육체의 더러움을 관상(觀想)하여 번뇌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스스로 생각하길 이 육신은 탐욕(貪慾)의 덩어리와 피, 고름, 콧물, 똥, 오줌 등 더러운 것들로 뭉쳐져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을 볼 때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관법이다.  
* 오온(五蘊)이란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로서 물질과 정신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물질 일반 또는 신체인 *색온(色蘊), 감각 또는 단순한 감정인 *수온(受蘊), 마음에 어떤 모양을 떠올리는 표상 작용인 *상온(想蘊), 의지 또는 잠재적 형성력인 *행온(行蘊), 의식 자체로서 구별하여 아는 인식 또는 식별 작용인 *식온(識蘊).

 

(二八)爲婦貿鼻喩
昔有一人。其婦端正唯其鼻醜。其人出外見他婦女面貌端正其鼻甚好。便作念言。我今寧可截取其鼻著我婦面上不亦好乎。卽截他婦鼻持來歸家急喚其婦。汝速出來與汝好鼻。其婦出來卽割其鼻。尋以他鼻著婦面上。旣不相著復失其鼻。唐使其婦受大苦痛。世間愚人亦復如是。聞他宿舊沙門婆羅門有大名德而爲世人之所恭敬得大利養。便作是念言。我今與彼便爲不異。虛自假稱。妄言有德。旣失其利。復傷其行。如截他鼻徒自傷損。世間愚人亦復如是

 28. 부인의 코를 자른 남편
 어떤 사람의 부인이 매우 아름다웠으나 코가 흉하였다. 남편은 밖에 나가 남의 부인의 얼굴이 아름답고 또 코도 매우 예쁜 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지금 저 코를 베어다 내 아내의 얼굴에 붙이면 좋지 않겠는가". 그는 곧 남의 부인의 코를 베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급히 부인을 불렀다. “당신 빨리 나오시오. 당신한테 좋은 코를 주리다.” 부인이 나오자 그는 곧 부인의 코를 베어 내고 남의 코를 그 자리에 붙였다. 그러나 코는 붙지 않았다. 그는 부인의 코만 잃어버리고 큰 고통을 주게 되었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도 그와 같다. 수행자가 세상 사람의 공경과 큰 이익을 받는 것을 보고서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다”고. 스스로 거짓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죄가 되어 이익도 잃고 다시 그 행동을 해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남의 코를 베어 스스로 해치는 것과 같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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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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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진날(三辰), 부처님 오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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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진날(三辰) 음력 3월 3일
 음력 3월 3일인 삼진날에는 박씨를 심고, 제비를 보면 "각시 왔다"하고, 또 꽃놀이를 통해 화전을 부쳐 먹는다. 그리고 마애불(바위에 새긴 부처님 형상)에 차(茶) 공양을 올렸다고 하는 날이기도 하다.(出 三國遺事 券 第 2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條)
 올해의 삼월삼진날은 양력 4월 21일입니다. 따뜻한 차 한잔 마애불에 공양 올리면 어떨까요^^

*부처님 오신 날 (음력 4월 8일)
 <유행경>에 따르면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2월 8일 탄생, 출가, 성도, 열반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출가는 2월 8일, 성도는 12월 8일 , 열반은 2월 15일로 지내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아사세왕수결경(阿사世王授決經)>의 빈자일등(貧者一燈) 비유를 드는데, 복전(福田)에 불심(佛心)을 심어 신행(信行)으로 깨달음을 꽆 피우듯, 정스러운 자세의 기름에 신심(信心)의 심지를  꽂아 수행의 불로 등을 밝힌다면, 불국토가 그 자리인줄 알듯 싶다.  올해의 부처님 오신날은 양력 5월 26일입니다.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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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종(梵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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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가운데 하나로서 범종 또는 대종이라고 한다.
 범종은 <석문의범>에 의하면 "중생을 소리로써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도록 일깨운다"고 한다. 이 말은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신호를 알려주는 기능도 있는데, 새벽예불(28)·사시공양(巳時供養)·저녁예불(33) 또는 특별한 행사 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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