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8(2004)년 4월호 Vol.4,No.39. Date of Issue 1 Apr ISSN:1599-337X 

 

 

 

 

 

 

 

 

 

 

 우리는 하나

범수

 우리는 종종 ‘하나’라는 말을 즐겨 쓴다. 보통은 공동의 이익이나, 학연, 혈연, 지연, 등 이런저런 이유에서 하나라고 하지만, 막상 왜 “하나인가?” 라고 반문한다면, 망설여진다. 또 진짜 하나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인연이란 서로 지어 가는 것으로 악연이든지 좋은인연이든지, 이미 정해진 인연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고정된 것도 아니랍니다. 우리의 만남은 60억명 가운데 한 명, 즉 60억분의 1입니다. 님은 지금 어떤 인연을 짓고 계신가요.” 필자가 즐겨 하는 말이다. 보통 이런 말은 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마 사회 통념적인 ‘악연, 연분 등을 포함한 인연’ 정도의 개념으로써 받아들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60억분의 1 이라는 말 가운데, 1은 자기일 수도 있듯이 남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날 때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대는 60억분의 1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입장에 서서 1을 이야기한다면 단순히 1을 뜻하지만, 누구든지 1일 될 수도 있다는 견해에서 본다면 60억/60억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도의 개념인 개인적인 만남이 아닌 것이다. ‘한 티끌이 온 우주를 감싼다.’는 말에서 우주와 티끌이 별개의 인연이 아니라, 서로를 포함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서로를 포함하는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종류의 한 덩어리도 아니며, 잡동사니로 버무려 진 하나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특성을 지닌 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조화를 이루는 하나인 것이다.
 이상은 필자와 인연 닿는 분들에게 자주하는 이야기로서 ‘하나’니 ‘60억’이니 하는 말은 부분과 전체 또는 개인과 사회, 나와 우주를 대신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개인과 주변 환경을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지 <구사론>의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을 통해 살펴보자.(因業滿業=總報別報), (世無別體 依法而立, 然依法而假立其名 三界(慾色無)五趣(除外修羅)).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업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업력(業力) 즉 업의 힘에 의해 생성과 소멸된다고 하는 것으로 여기서, 업(業)이란 우리의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이는 개개인의 행위(行爲), 조작(造作), 작용(作用), 소작(所作) 등으로서 이와 같은 업에 의해 초래되는 세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때, 주관적 세계인 유정세계(有情世間)와, 그 유정들이 살아가는 공간인 객관적 세계인 기세계(器世間)로 구분한다. 이 모두는 각자의 업에 의한 것으로 개별생명체나 각자의 고유한 과보의 원인을 불공업(不共業)이라 하며, 중생들이 공동으로 수용하는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을 초래하는 것을 공업(共業)이라 한다.(正報 依報) 즉 우리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각자의 업에 의해 초래되며, 각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결국 우리는 혼자만의 세계나 동 떨어진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하나가 된다. 나의 업에 의해 초래된 삶의 터전인 산하대지가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듯이, 타에 의해 초래된 공간에 나 역시 버젓이 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하나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옥선

최근 들어 산행을 시작했다.  건강을 위해서는 운동은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선뜻 내키는 운동이 없었는지라 그냥 저냥 지냈는데 점점 떨어지는 체력 앞에서 몸을 추슬러야만 했다.
 기력이 딸리다보니 자주 눕게 되었고 몸의 군살까지 늘어가는 악순환이었다. 게다가 단거리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피로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우선 걷기라도 해야 했다. 자신 없는 달리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맘만 먹으면 될 일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숨이 차고 둔하던 걸음걸이는 한 일 년이 지나는 사이 시나브로 좋아졌고 나중에는 똑 같은 거리를 걸었는데도 시간까지 단축되었다. 그러자 내친 김에 산행까지 결심하게 된 것이다.
 산은 좋아했지만 언제고 절에 가기 위해 산을 찾았지 산행만을 목표로 집을 나서지는 않았었다. 그러니 산행이라고 할 수도 없을 그간의 나의 산행이라면 절이나 암자를 찾아 올라본 높이의 산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산을 오르는 것은 체력을 기르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상 정복에다 목표를 두지는 않았다. 내가 힘닿는 대로 오를 만큼 오를 수 있는 높이가 정상이라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 산에 올랐다.  그랬기에 비록 남들이 말하는 정상정복은 아니었을 때라도 만족할 수 있었고 뿌듯하기도 했다.  또 그런 날은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니 무엇보다 내 자신이 대견하고 행복했다.
 내가 정한 산행 장소는 잘 알려진 등산로이나 일부러 평일을 이용해 오르기 때문에 중간에 누굴 만나지는 일도 드물다. 무엇보다도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걸으며 내 자신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다. 이번 주에도 예정된 산행을 했는데 봄의 문턱에 들어선 탓일까, 요즈음의 태양 빛은 날이 갈수록 강렬해지는 것 같다. 몸도 또한 조금씩 단련되어져 처음과 달리 산을 오르기가 한결 나아졌다. 가끔은 바위에 걸터앉아 땀을 식혔다 가는 여유도 부린다. 그럴 때마다 돌아다 보는 길, 마치 내 살아온 날들 같기만 한 굽이진, 그러나 가끔은 돌아보고 싶은 길이다.
 엊그제도 잠시 땀을 식힌 다음 다시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곁에 가까이 가고 나서야 타 지방에서 온 분들임을 알 수 있었다. 사투리가 포근한 고향처럼 정겹다. 그 시간에 그곳까지 왔으니 새벽부터 무척이나 분주했을 것이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부터는 꽤나 가파른 길이었으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 무사히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깎아지른 듯 높다란 그곳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위에서 어떤 분이 말을 건넸다.  “아가씨요? 아주머니요? 내가 선물하나 드리리다.”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분은 자신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불쑥 내밀었다.  지팡이라니, 순간 당혹스러웠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아직 젊은 탓이겠으나 등짐을 진 것도 아니니 힘겨워도 혼자 힘으로 오르고 싶었다.  산행 시에는 가능하면 길 옆 나뭇가지일지라도 함부로 잡지 않는다. 어찌 나무의 신음소리를 들었겠는가, 홀로 서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이거늘, 나문들 다를 수 있겠는가.
 드디어 산의 끝 자락에 발을 내딛자 “산 정상입니다.”누군가 외쳤다.  난 웃음으로 화답했다.  김해의 한 산악회에서 오셨다는 그분은 너른 바위 곁에서 바람을 맞이하던 나에게 따뜻한 커피를 권해주셨다.  산바람이 스치고 간 내 얼굴에는 가실가실 땀의 흔적들이 피어나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삶이 아름다운 나이

장태자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겪었을 중년에 접어들 때쯤이면, 저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둔 얘기들이 있을성 싶다. 그러나 쉬이 내 뱉지 않는 것은 세월을 고스란히 삭히며, 살아온 동안 자기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자제력과 지혜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중용의 미덕도 알고, 자기 성찰을 통한 혜안도 경험함으로써, 진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일 것이다. 마치 볕 잘 드는 양지쪽 탐스러운 꽃처럼, 잘 익은 포도주 같이 말이다.
 우리네 중년들이 곰삭은 얘기들을 맛깔스럽게 풀어놓을 수 있음은 아마도 세월 때문일 것이다. 볼펜이 아닌 펜을 잉크에 묻혀 쓰며, 전화가 아닌 편지를 섰다가 지우고 섰다가 지우고 결국 못 붙이고 마는 그런 시기를 경험하였다. 또한 없어서 재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전깃불도 드문드문 들어와 있던 시절, 자정이면 그 나마 들어왔던 전깃불도 저절로 꺼지고, 한 동네 두세 집에 밖에 없던 TV 앞에 구경꾼들로 미어 터지던 어려웠던 시기를 보냈지만, 지금 그 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세월이라는 이름의 연륜일 것이다.
 이웃의 불행에 함께 눈물 흘리며, 마음 다잡은 벗의 소식에 안도하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게 아름다운 중년으로 익어 갈수 있는 힘일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우리 서서로가 만들어 가는게 아닐까?

 

 

 

 현주 이야기

장남지

 3학년이 되어 복수전공과 함께 학과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시간 관계로 작년까지 해오던 자원봉사나 다른 일들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장애아동의 학습 도우미로 자원봉사를 해왔지만, 차츰 학교의 일관계로 매주 정해진 시간에 현주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겨울 방학 때, 일정정리를 해가면서 현주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과 앞으로 학교에서 여러 가지 습관을 길러줄 수 있는 방법들을 현주 부모님께 말씀 드리고 또 의논하면서 혹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다른 자원봉사자가 오시더라도 좀더 잘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새 학기를 맞았고, 현주도 일반학교에 통합학급으로 입학하게 되면서부터 매주 한번 방문하는 것도 시간이 맞지 않아 보름쯤을 보지 못했습니다. "현주의 학교생활은 어떤지? 또 잘 적응하고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이제 이렇게 한 주에 한번 오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겨우 토요일 오후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고, "방문을 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에 카메라도 챙기고 현주에게 줄 색연필과 현주의 언니인 현아에게 줄 작은 선물도 챙겨서 현주네 집을 찾아갔습니다.
 토요일 오후라 현주가 많이 피곤해 했고, 사실 공부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어머님께 허락을 받고 현주가 좋아하는 씽씽카(한 발은 바퀴가 달린 기구에 의존하고 한 발로 구르며 가는 건대.. 아실런지..^^;)와 현주가 잘하는 줄넘기를 가지고, 집 근처 학교로 갔습니다. 예전에도 현주가 기분이 좋거나 할 때, 몇 번 나가 논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집 앞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현주는 오르막길을 보자 이내 쌩하고 내려올 생각에 열심히 발을 구르며 올라갑니다. 내내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저는 괜히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나게 노는 현주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고  씽씽카를 타고 있는 현주에게 가서 이어 타기 놀이와 줄넘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뒤 현주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도 했습니다.
 현주는 아까 줄넘기를 하면서 놀았던 자기의 모습도 그리고 좋아하는 만화도 그렸습니다. 그렇게 현주와 두 시간정도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님과 식탁에 마주 앉아 현주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이며, 오늘 현주와 밖에서 놀던 이야기도 하면서, "이제 저도 그렇고... 현주도 그렇고... 오기가 힘들어 진다고..... 제때  시간 맞추어서 오기가 힘들어져서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어머님께서는 "미안하다"시며 "오기 힘든 줄 알고 있으니, 매주 오지 말고 2주에 한번 정도라도 괜찮으니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눈시울이 붉어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그만 와야겠다"고 생각한 저의 잘못을 깨닫고 나의 작은 편안함을 빌미로 이렇게 누군가의 믿음을 저버릴 생각을 했다는 것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 졌습니다. 그동안 많이 미흡한 저는 "현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잠시 소홀해지기도 했고, "나 하나쯤 그만둬도 상관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주와 저는 선생님과 제자의 사이보다는 같이 이야기하고 때로는 신나게 노는 친구같은 사이었던 것입니다.

 

 

 

 그림일기

김경연

제목: 도라지 까기
 도라지를 깠다. 엄마를 도와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라지 까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조금은 힘이 들었다. 양파자루를 손에 끼우고 비볐더니 싹싹 잘 까졌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정연이 다 컸네 빨리 시집 보내야겠다." "전 엄마 옆에서 오래오래 죽을 때까지 같이 있고 싶어요 알았죠." 휴~도라지 까느라고 힘만 들으면 뭐해 용돈을 받아야지 도라지를 까면 나쁜 마음이 깨끗이 하얀 마음으로 바뀌는 것 같다.

 

제목: 추석 날
아침에 한복을 입고 조상님께 차례를 드렸다. 차례를 지낼 때 우리 엄마만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내가 그랬다. "우리 엄마만 일을 하고 작은 엄마는 일어서서 를 드시고 고모는 앉아 계셔요?" 내 말에 작은 엄마와 고모는 웃으셨다. 나는 너무나 너무나 황당했다! 나는 많이 속상했다. 작은 엄마가 이렇게 말하셨다.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지? 니내 엄마가 대장이니까 일을 많이 하는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작은 엄마는 설거지를 다 하셨다. 작은 엄마한테 죄송했다. "작은 엄마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모르고 실수했어요."

 

 

 

 빅 피쉬

조혜숙

 아주 어려서부터 아들 윌(빌리 클루덥)은  아버지 에드워드 불룸(앨버트 피니)의 어린시절 아버지(이완 맥그리거)많은 얘기들을 끝없이 반복해 들으면서 자랍니다. 어려서 들었던 얘기들은 모험으로 가득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미래였지만, 이제 어른이 된 후에도 반복해서 얘기하는 아버지의 허풍을 너무나 지겨워 합니다.
그래서 결혼 후에 윌은 그런 허풍쟁이 아버지가 싫어 몇 년 째 왕래를 끊고 지내는데,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고향에 내려옵니다.
 윌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이제는 그 허풍스런 모험담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써의 진실을 말해주기를 기대하지만, 아버지는 그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어린시절의 아버지는 남들과 틀린 태어나는 과정을 거쳤고, 남들보다 빨리 자라나는 성장통도 앓았으며, 어린시절 친구들과 마녀의 집으로 찾아 가서 마녀의 눈을 통해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미리 보았으며, 만능스포츠맨이고, 발명왕이고, 해결사이며, 거인과 함께 했던 여행과, 신발을 벗고 사는 천국같던 마을과, 괴짜시인과, 늑대인간인 서커스단장과, 샴쌍둥이 자매,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의 극적인 로맨스까지 ...아들 윌은  진실을 알기위해 아버지 이야기속의 등장인물들을 찾아 나섭니다.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침상곁에서 그 다음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아들의 작별인사는, 지금까지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진정 소중한 진실이 되게 합니다.
 한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눈독을 들이기도 했던 대니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