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8(2004)년 3월호 Vol.4,No.38. Date of Issue 1 Mar ISSN:1599-337X 

 

 

 

 

 

 

 똑 바로 봐

범수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듣는 말은 아마 "똑 바로 봐" 일 것이다. 말의 어감이 조금 거칠게 느껴진다면, Let it be. 정도로 읽어 주기 바라지만, 오해에 따른 동(動) 반동(反動)의 피해에 비하면, 결코 거친 표현은 아닌 듯 싶다. 일의 전말은 지면상 다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어떻다."며, 상대를 평가하는 본인의 느낌을 마치 사실인 마냥, 단정 지어 말할 때나, 들을 경우가 있다. 이 때 긍정적인 평가나 부정적인 평가나 할 것 없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상대의 견해를 들어 보려 할 것이다. 특히 부정적인 평가일 때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설명이나, 대화가 오고 가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단지 "그렇게 느껴진다."는 단정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말만을 되풀함으로써 동, 반동의 혼란이 야기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종류의 일을 지켜보면서 '확신', '오기', '시비', '진실'이라는 단어들을 떠 올리며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자신은 항상 '옳음'쪽에 서서 상대의 '그름'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을 사실인 마냥 '확신'할 가능성이 많으며, 또한 본인의 확신이 설사 잘못된 것인 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오기'로써 '자존심'과 '진실'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또한 갈등을 야기시켜 혼란스러운 상황이 유발된 상태에서 이 일로 인해 혹 상대의 실수라도 있을라치면, 그것만을 문제 삼아 일의 본질을 외면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본인의 문제 제기에 이은 해결책은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즉 '뒷감당도 못하면서 문제만 일으킨다'는 말인데 여기서 동, 반동이란, 한쪽에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면, 상대 역시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 상황에서는 흔히 '치고 박는 난타전'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상과 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으로 보통 '오해'에서 비롯된 일로 이해해도 되겠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다음과 같다.
 오해와 관련된 직, 간접적인 일은 누구한테든지 일어나겠지만, 그럴 때 마다 문제의 본질을 살피려는 마음보다는 감정이 앞서는게 보통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감정으로 인해 계획 또는 약속됐던 일마저 파기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감정이고 일은 일이지, 감정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인간관계를 황폐화 시키는 배신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를 계기로 우리의 '인식'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유식론>을 통해 간단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이유는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우리의 인식 구조와 기능을 살펴 봄으로써 사과와 용서에 따른 화해를 바라기 때문이다.
 <유식론>에서는 우리의 인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현량(現量), 비량(比量), 비량(非量)의 삼량(三量 세가지 인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량(量 헤아림)은 양지(量知 분별하여 안다)의 뜻으로, 우리의 주관적 마음이 인식의 대상을 인식할 때, 그 인식적 판단이 반드시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는 입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 보기로 하자.
 현량(現量)이란 분별하여 아는 인식이 아니라, 인식 작용이 대상과 관련될 때, 이름이나 말에 의한 모든 분별작용을 떠나 대상을 대상 그대로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비량(比量)이란, 비교하고 헤아려 아는 것으로 혼란스럽지 않은 마음이 명확히 나타나지 않은 대상을 비교분별하여 인식의 대상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심식(心識) 작용이다.
 비량(非量)이란 혼란스러운 심식(心識)이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를 막론하고 오직 착란된 분별작용에 의해 인식의 대상을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착각이나 환각등을 의미한다. 이상 우리의 세 가지 인식에 대한 개념을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각각의 특성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A라는 대상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 인식할 때,  먼저 A의 이름을 생각 속에 상기하여 그 마음속에 나타나는 A를 대상으로 A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인식작용의 상례(常例례)이다. 이 말은 A의 이름에 의하여 A를 비교 분별하여 아는 것이지(貫通於諸種A槪念 緣共相後比較量知), 결코 외부에 존재하는 A를 아무런 비교 분별하는 마음 없이  A 그대로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현량(現量)은 주관적 마음이 외부의 인식 대상에 직접 부합하는 것으로 비교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 없는 상태이다.(前五識)
 비량(比量)을 설명하는데는 고래로 연기(煙氣)의 비유가 있다. 저 산 너머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그곳에 반드시 불(火)이 있을 것이라고 비교 분석하여 아는 것을 비량이라 한다. 그러나 이때 불의 실체를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다만 연기가 불에 의하여 난다는 경험적 사실에 의하여 연기로서 불의 존재를 헤아려 추정하여 아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가 반드시 불에 의해서만 난다고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또는 연기가 아니라 운무(雲霧)가 연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처럼 정당하지 못한 판단이 있는 반면, 또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조건이 다할 때 파괴된다는 합당한 판단도 함께 한다.
 비량(比量)은 우리의 지적활동중 많은 부분을 차지 하는데, 비교, 선택, 추정, 판단등 종합적인 인식체계를 세우는 특징을 지녔으며,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에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 바른 인식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인식에 의해 본인은 물론 주위의 많은 사람들마저 고통받는 것을 안다면 더더욱 말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조혜숙

 전쟁영화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민족에게 지금도 살 떨리도록 찢어지는 고통을 주었고, 그리고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인 지금 세대조차도 한국전쟁  결과 속에서 분단이라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데, 5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그 무서운 전쟁조차도 영화라는 상품을 통해 감상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  참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전쟁의 기억 속에서 못헤어나고 그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어른들이 생존해 계시며, 지금의 4, 50대는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교육받았던 전쟁의 고정관념을 미처 정리도 못하고 있는데, 지금의 세대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커다란 대형화면을 통해서 너무나 잘생긴 두 남자배우의 멋진 연기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장면과 다이너믹한 음향과 구체적인 특수효과등이 보여지는것 이외에 이 영화는 지금의 세대들에게 '재미'외에 무엇을 얘기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념따위는 배제한 전쟁의 참혹함과 광기를, 차라리 시대적인 흐름에 맞추어 스펙터클한 문화상품으로 만들어 많은 관객이 정서적자극을 받게 했다면, 그건  전쟁에 대한 구태의연한 진부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각도는 아닌가. 아무튼 강제규감독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분단상황을, 영화적 소재로써 대성공하고 있습니다.

 진태(장동건)는 한 가정에서 맏형이지만 아버지입니다. 동생 진석(원빈)의 장래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열병으로 인해 반벙어리가 되신 어머니와 곧 결혼을 앞둔 약혼녀 영신(이은주)과  함께, 비록 가난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던 이 가족에게, 전쟁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듯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참혹함으로, 절망으로 ,광기로, 그리고 영원한 상처로 남게 됩니다.

 동생 진석을 위해서라면 그 어느 것도 걸림 돌이 될 수 없는 형 진태의 절대 희생적인 형제애는 곧 부성애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가족의 논리로는 설명되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50여년 전 그 세대의 논리로써 가슴 찡함으로 남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고 함은 결국 영화를 통해서 그 시대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대는 이 영화를 너무나 감동적으로 보았다는 것과 4,50대는 실망스러워 절대 권하지 않는 영화라는 이 영화의 양면성은, 아직도 한국전쟁의 상처의 아픔이 아리기만 한 세대와, 그저 눈물겨운 지고지순한 형제애가 감동을 주는 스펙터클한 영화로써만 보는 서로 다른 각도로써의 감정적해석이 아닐까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요란하게 광고를 했고, 또 이 영화를 제작하는데 들였던 막대한 제작비와 시간등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그저 문화상품으로써 저 또한 이런 저런 관념없이 그저 영화로써만 평가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숨쉬는 항아리

손진숙

 우리집 부엌에 항아리가 하나있다. 설전에 먹을 김치를 담아 땅속에 묻었다가 김치독으로 역활을 끝내고 부엌으로 옮겨 왔는데 잡다한 부엌 살림살이중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내 눈길을 끌어낸다.
 초겨울 , 김장 전날 숨쉬는 항아리를 하나 마련해서"살림 잘하는 아줌마들처럼 김치 맛을 내야지" 그 마음으로 멀리 떨어진 항아리 가게를 찾아갔다.
 마당 가득 진열된 항아리들의 모습이 어쩌면 하나같이 정겹든지. 항아리와 함께 삶의 고락을 같이 했던 윗대 어머니, 할머니의 생각과 습관이 아줌마들의 몸 속에 변함없이 흐르는 것일까? 애써 태연하게 억척스런 살림꾼 표정을 짓고 값을 흥정했지만, 항아리를 고르던 손길과 마음은 하늘에 떠있는 애드벌룬처럼 신바람이 났다. 항아리 하나 하나 자세히 보면 어느것 하나도 완전한 것은 없었다. 색칠이 어느 한 부분 미비한 놈, 좀 기울어진 놈, 표면이 꺼실 꺼실한 놈 등등. 그렇지만 흉이 보이는 것은 접어지고 정 들면 다 이쁘겠다고 한번씩 쓰다듬어 보았다.
 한참의 눈 구경, 손 구경을 끝내고 아담하고 친근하게 당기는 항아리를 하나 찍고 집으로 데려올 때 왜 그리 휘바람에 노래가 나오든지...
 화려한 보석과 예쁜 옷을 선물로 받은들 그처럼 저절로 피어나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빈 항아리로 부엌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정겨움이 베어 나오는 보물단지로 남아있다.
 숨쉬는 항아리를 칭찬하자면, 먼저 껍질을 예쁘게 하려고 덧칠하지 않아서 뺀질 뺀질하지 않고 그래서 볼 때마다 마음이 턱 놓인다. 내 것으로 꽉 잡고 있는 것이 없어서 숨통을 트여주어 자기 품안에 있는 것들을 살게해주고
익을 때면 익게 해준다.
 요즘은 항아리 보기가 드물지만 그래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무조건 항아리에 끌리는 핏줄의 흐름을 쉬이 물려받을 것이다. 돌아보면, 어느 역활 하나도 야물게 하지 못하고 풋내만 내고 살았지만 수더분하고 무슨 일에도 버거워하지 않는 살림꾼같은 항아리에게 정이 가는걸 보니, 세간사 늘 먹을 준비를 꼽고 있는 우리 엄마처럼 나도 이제 많이 살아져 버렸구나를 실감케 한다.
 왔던 길과 갈 길의 중간을 넘어선 나이. 살 준비와 죽을 준비도 같이 잘해야 될 때인데...숨쉬는 항아리처럼 내게 오는 것을 살게 해주고 익어지게 하고 어디에 있어도 부딪힘이 없어 담담해 질 수 있다면, 항아리를 곁에 두고 배우고 싶다.

 

 

 

 크레이지 아케이드 게임

김지민

 크레이지 아케이드는 인기가 많은 게임이다. 그래서 동생인 새얼이가 다니는 유치원에도 이 게임을 한다고 들었다. 나도 처음엔 이 게임을 몰랐는데 새얼이의 소개로 인해 알게 되었다. 게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고 빼앗아 버린다. 뭐랄까, 다른 사람과 게임을 시작해서 이기고 말아야겠다는 그런 승부심을 생기게 하는 것 말이다. 새얼이도 그 승부심에 빠져 한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고, 우린 그런 새얼이를 떼어 놓느라 한바탕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그런 게임이 난 싫었지만 나도 그 게임이 점점 재미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새얼이같이 중독자처럼 하지는 않으려 주의했다. 새로운 게임을 알게 된 새얼이가 큰 강물에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 같다.
새얼이랑 나랑 나란히 앉아서 게임을 하다 보면 서로서로에게 화가 나기 마련이다. “누나야 왜 나 안구해 줬어? 나도 이제 누나야 안 구해 줄거야”라든지 “ 왜 날 일부러 죽여 나도 한 번 그래 볼까?” 라는 거친 말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새얼이가 게임을 계속하자는 행패로 나와 정민이 언니에게 심한 욕을 하거나 발을 차거나 이런 옳지 못한 행동에 서로서로 화가 난다. 하지만 엎질러 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새얼이도 크레이지를 알게 된 이상 이 게임을 그만 두기란 어려운 일이다.
 새얼이의 사건으로 인해 게임과 컴퓨터 중독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았다. 오직 게임만 하고 싶어 하는 새얼이가 걱정이다. 사람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없지만 마음은 약으로 고칠 수 없느니라.....

 

 

 

 바람, 바람

문옥선

 입춘은 지났다지만 겨울 같은 추위가 남아있던 얼마 전에 전통가옥이 보존된 곳으로 문화탐방을 갔었다.  문화탐방이라고 했지만, 실은 봄기운을 빌었으니 봄날에 부는 바람 그리고 외출이었다. 비탈지고 구부러진 산등성이 외진 곳, 메아리마저 숨었을 음지쪽엔 아직 떠나지 못한 겨울날이 있었다. 온 산에 핀 눈꽃이야 눈부신 아름다움이지만 저렇듯 봄 꽃이 피어난 양 아쉬움을 남기는 눈 자취는 그대로 아기자기한 멋이다. 계곡 따라 물 흐르듯 구불구불 산길을 돌고 돌아 마을에 도착하니 맵싸한 바람이 우릴 반겼다. 도로와 교통 여건이 편리해진 탓에 요즈음은 어느 때 어느 곳을 가더라도 그리 스산하지는 않다.  이 날도 이곳을 찾은 여러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다들 초면이었지만, 만나니 반갑고 기뻤다.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한 뿌리이기 때문일까?
 아담한 초가집과 야트막한 돌담의 모습은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왔다. 그곳에는 지금 사람이 살고 있었다.  빛바랜 새색시의 가마와 대장간의 모습, 지게와 다듬이 방망이 등.  몇 십 년 전의 일상적인 삶의 흔적들이지만 바로 엊그제의 일들처럼 기억은 선명했다.  다듬이를 보고 있자니 이불호청에 풀질하고 다듬질하여 다시 발로 꾹꾹 눌러 밟기를 반복한 후 빨래 줄에 하얗게 내걸어 햇빛에 반짝거리는 모양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어머님의 미소가 생각났다. 그 미소는 행복의 미소였다. 더 자유롭고 편리함을 가져다 준 물질문명은 가꾸며 누릴 수 있는 그 만큼의 환희와 행복도 가져가 버린 것 같다.
 도토리묵과 빈대떡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각가가 운영한다는 찻집에 들렸다. 건물은 그의 설계대로 지어진 듯 천장을 높고 실내는 아늑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갈 즈음 일행 중 한명이 세월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는 뜻밖의 말을 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와버리는 것이 세월이련만 이 십년 후를 바라고 있었다니, 아마 그때쯤이면 매사에 여유롭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일까 아니면 아이 때문일까, 정해놓은 일과대로 생활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그녀의 일상은 이 십년이 되기 전에 그녀를 지치게 할 것만 같았다. 그녀처럼 다른 이들의 삶도 수월할리 만무하지만, 설혹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타인의 보살핌에서 벗어나고서야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며 나이를 먹을수록 많은 경험을 할 것이니 이해의 폭도 그만큼 넓어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자식을 직접 낳아본 후에라야 부모님의 심정을 조금쯤 헤아릴 수 있는 것처럼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야 사람이나 사물을 깊이 있게 안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옥(古屋)이 가진 고풍스러움에는 평화롭고 아늑하고 따스함이 있다. 사람도 나이를 먹을수록 더 여유롭고 편안하며 감사한 마음과 포용력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나이 먹듯 저절로 쌓여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버리고 놓아버리는 일들,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들일 것이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가슴 뭉클한 일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연유라면 이 십년을 애써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자신의 바람을 알고 있는데 지금부터 이 십년 후의 모습대로 살아간들 결국 자신의 생을 사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자신을 길들이는 일은 미룰 일이 아니다.  여왕이 되고 싶은가?  그럼 여왕처럼 살아갈 일이다.  살고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림일기

김경연

제목: 내일은 개학
 날 내일은 개학 날이다. 그동안 보지 못한 친구들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지만 기분이 좋다. 방학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서운하다. 그러나 친구들을 만나게 되서 기쁘다. 오늘은 아빠께서 방학을 계획있게 보냈다고, 상장과 선물을 주셨다. 선물은 연필3통, 필통1개 이여서 기분이 좋다. 아빠게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2학기가 되면 친구들과 더욱 친하게 지내야겠다. 싸웠던 사이가 좋아졌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보고 싶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제목: 운동회를 끝내고
운동회 날이다. 1학년들이 운동회 날에 준비한 것은 지구를 굴려라, 50M 달리기, 작은 날개 등이다. 난 달리기가 제일 떨렸다. 그러나 잘해냈다. 4등을 했다. 꼴등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휴~ 엄마와 같이 하니 좋다. 이제는 이야기가 바뀔거에요. 저녁을 먹고 영동문고에 갔다. 나는 두꺼운 책 2권을 읽었다. 한 권은 끝까지 다 읽고 , 또 한 권은 반밖에 못 읽었다. 엄마께서 이솝우화 한 권, 츄리닝, 청바지를 사주셨다. 난 기뻤다. 내일은 경혼식 날이다. "난 내일 엄마가 사주신 청바지를 입고 가야지."

 

 

 

 요리하면 실수 투성이

구선화

 엄마, 도우다가 요리하면 실수 투성이!
샐러드 만들다가 사과 흘리고
고기볶음 만들다가 고기 흘리고
참! 참! 참!
요리하다 흘린 재료 많아서 꾸중만 듣지
"선화야 제발 흘리지 좀 말아라"
엄마가 꾸중을 하지만
내 마음은
"괜찮아 괜찮아"
 

 

 

受持
讀誦

 

 백유경

편집부

 

百喩經卷第一                                                                      尊者僧伽斯那撰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二五)水火喩
昔有一人事須火用及以冷水。卽便宿火以조灌盛水置於火上。後欲取火而火都滅。欲取冷水而水復熱。火及冷水二事俱失。世間之人亦復如是。入佛法中出家求道。旣得出家還復念其妻子眷屬。世間之事五欲之樂。由是之故失其功德之火持戒之水。念欲之人亦復如是

25. 불과 물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사람
 옛날 어떤 사람이 불과 찬물이 필요하여, 대야에 물을 담아 불 위에 두었다. 한참 뒤에 보니 불은 전부 꺼졌고 찬물은 더워졌다. 그리하여 불과 찬물 두 가지를 모두 잃어 버렸다.
 세상 사람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 부처님 법안에 들어가 도를 구하다가 다시 그 처자와 권속들을 생각하고, 세상일과 다섯 가지 탐욕(재물욕(財欲), 음욕(色欲), 식욕(飮食欲), 명예욕(名欲), 수면욕(睡眠欲)) 때문에, 그 공덕과 계율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二六)人效王眼[目*閏]喩
昔有一人。欲得王意。問餘人言云何得之。有人語言。若欲得王意者。王之形相汝當效之。此人卽便後至王所。見王眼[目*閏]便效王[目*閏]。王問之言。汝爲病耶。爲著風耶。何以眼[目*閏]。其人答王。我不病眼。亦不著風。欲得王意。見王眼[目*閏]故效王也。王聞是語卽大瞋?。卽便使人種種加害?令出國。世人亦爾。於佛法王欲得親近。求其善法以自增長。旣得親近。不解如來法王爲衆生故種種方便現其闕短。或聞其法見有字句不正。便生譏毁。效其不是。由是之故。於佛法中永失其善墮於三惡。如彼效王。亦復如是

26. 실룩거리는 왕의 눈
 어떤 사람이 왕의 환심을 사려고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왕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말하였다. “왕의 환심을 사려거든 왕의 형상을 본 받아라.” 그는 왕궁에 가서 왕의 눈이 실룩거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본받아 똑같이 눈을 실룩거리자 왕이 물었다. “너는 무슨 눈병에 걸렸는가. 혹은 바람을 맞았는가. 왜 눈을 실룩거리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저는 눈병을 앓지도 않으며, 또 바람도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왕의 환심을 사려고 그것을 본받은 것일 뿐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서는 사람을 시켜 갖가지로 벌을 준 뒤에 나라에서 쫓아내 버렸다.
 세상 사람들도 그러하여 법을 듣거나 혹은 글귀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문구가 있으면 곧 그것을 비방하거나 헐뜯는다. 그 때문에 부처님 법안에서도 선(善)한 것을 잃어버리고 세 갈래 나쁜 길인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지는 것이니 저 왕의 실룩거리는 눈을 본받은 사람과 같은 것이다.

 

 

사진
공간

 

 

편집부

 

                 <경남 거제>

 

절기
풍속

 

 열반일(槃涅日)

편집부

 석가모니 부처님은 B.C 486년 구시나가라(俱尸那柯羅) 사라 숲속에서 북두우협(北頭右協,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오른쪽 갈비뼈를 옆으로)하시고 대열반(大涅槃)에 들으셨다. 이 날은 바로 고타마 부처님께서 팔십세 되던 해 음력 2월 15일이다  
 열반일에는 <열반경(槃涅經)>이나 <유교경(遺敎經)>을 독송하는데 <열반경>은 고타마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물어라" 라며 의문을 풀어주던 문답이 수록된 경전이다. 또한 고타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1년전의 행장(行狀)을 모은 <유행경(遊行經)>은 인간 고타마 부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상의 경전에 따르면 고타마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겨셨다. "슬퍼하지 말라, 설사 내가 세상에 더 머무른다 해도 언젠가는 가야할 몸이다. 모이면 흩어지는 것이 진리이다. 이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법을 모두 완성했으니, 필경 1겁을 더 살아 있은들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그 동안 제도할 사람은 모두 제도했다. 아직 제도하지 못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모두에게 득도(得道)인연이 갖추어져 있다. 이제부터 나의 제자들이 바른 법을 면면히 이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여래의 법신(法身)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해탈을 구하라. 지혜의 등불로 어둠을 밝혀라."

 

 

불교
미술

 

 목어(木魚)

편집부


 

 불교의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가운데 하나로서 목어(木魚)라 한다. 머리는 용 모양이며 몸통은 물고기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서 만드는데, 배 부분을 파내어 두 개의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낸다.
 목어는 수중에 사는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 위한 기능으로 보통 아침 저녁 예불 시간 때 사용된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사운드를 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인연

 

 

 경북 예천군 용문산 용문사 대장전

 편집부

 

 똑바로 봐

 범수

 

 태극기 휘날리며

 조혜숙

 

 숨쉬는 항아리

 손진숙

 

 크레이지 아케이드 게임

 김지민

 

 바람, 바람

 문옥선

 

 그림일기

 김경연

 

 요리하면 실수 투성이

 구선화

 

 백유경

 편집부

 

 사진공간

 편집부

 

 열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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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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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thly Web Magazine DHARMA(ISSN: 1599-337X)
발행인: 범수스님
(EDITOR E-mail   savaha@nate.com)
www.savaha.or.kr



 

 나눔과 어울림을 지향하는 좋은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