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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三法印)
(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 |
범수 |
우리의 삶은 변화의 연속이다. 생성과
소멸로 이어지는 변화의 연속인 현실을 '무상(無常)'이라고도
하는데,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어느
것 할 것 없이, 동일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우주는 서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모든 존재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의 시간적 변화와,
상하좌우 같은 공간적 변화가 일어나며, 인식의
주체인 우리는 그 속에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등의 심리적 변화를 일으킨다. (잠깐
여기서 미리 얘기 해 둘 것은 대상과 인식
주체의 구분과 선후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편의상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으로 나누었을 뿐이라는 점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탄생을 알리던 어제의 금줄 자리에,
오늘은 초상을 알리는 등이 나 붙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새로 지은 집은 어느새 낡아서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롭다. 초록의
싱그러움은 갈색 낙엽으로 스산함을 더하고,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은 반복되는 접촉으로 무관심 속에
잊혀지기 일쑤이다. 이상 이런 변화의 현실을
간단히 고(苦)라고 하는데, 이유는 동일성과
지속성을 갈망하는 우리의 바램과는 상관 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시공간(時空間 space-time)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표현이다. 이처럼 끝임 없이 변화하는
현실세계의 사실을 일반화하여 현상계의 원리로
표현한 것이 (제행)무상이다. 무상은
현상계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변화의
배후에 이를 관장하거나,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거듭 분명하게 밝힌 것이 (제법)무아이다.
즉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으로,
요약하면 모든 존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상호의존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이를 연기(緣起)또는 인과(因果)라고도
한다. 실체에 대한 갈망은 위와
같은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현실세계와 끝임 없는 충돌을 일으킨다.
동일성과 지속성을 유지하는 실체를 찾고 또
그것을 인정해보려 하지만, 현실적 경험에서는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욕망과 현실의 충돌
속에 불만이 쌓여 고뇌하는 일련의 상태를
간단히 고(苦)라고 했는데, 그러면 고(苦)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사실 속에서 동일성과
지속성을 가진 실체를 찾으려는 생각 때문에
고(苦)가 생겼다면,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 실체에 대한 생각을 버림으로써
실체를 고집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실체에 대한
고집이 사라지면, 그에 따른 고뇌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이처럼 고뇌가 사라진 상태는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지만, 흔히 (열반)적정이라고
한다. 즉 마음이 안정된 상태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무상한 가운데 항상한 것을 갈망함으로써
고집이 생기고, 이런 고집 때문에 고뇌가 생긴다.
하지만, 실체에 대한 고집을 버릴 때, 그에
따른 고뇌마저도 사라짐으로써 마음이 안정된다.
즉 적정(寂精)의 상태로써 무상과 무아(無我)인
현실을 바로 인식할 때 가능해진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자신을 한 번 돌이켜 보세요.
자신의 모든 것을 곰곰히 살펴보세요.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던 것이 있던가요? 내지는
변화하지 않기를 바라나요?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가요? 시린 달 밤에 풀잎에
내린 이슬은 여명을 받을 때 찬란한 물 방울이
되지만,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목표로 한 것을 성취했을
때, 느꼈던 그 행복감 지금까지도 그런가요?
자기가 지은 잘못에 대하여 본인마저도 회피하고
싶었던 부끄러움 여전한가요? 태산도 들어
올릴 것 같던 몸, 아직도 건장한가요?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을 것 같던 고통, 지금도 느끼시나요?
새로운 각오는 타성에 젖어 나태해지고, 만남에
대한 설레임과 굳은 약속은 현실에 묻혀 누구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게 되죠.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를
바라지 않거나, 변화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 뿐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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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
김경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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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엄마의 허벅지 |
시골에 갔다
오면서 엄마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으니 솔~솔~ 잠이
왔다. 그래서 엄마의 허벅지는
신기하다. 엄마의 허벅지는 "왜
그럴까? 아이 궁금해!" 엄마 손이
약손인 것처럼 엄마의 허벅지는
사람을 잠재우는 허벅지다. "엄마의
허벅지는 사람을 잠 재우는 허벅지래요."
엄마의 허벅지 덕분에 차 멀미도
안하고 무사히 집에 왔다. 엄마의
고마운 허벅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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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슈렉 |
엄마와 슈렉을 보러
개봉극장에 갔다. 끝 부분에서
슈렉이 공주에게 개구리를 불어서
풍선으로 주고 공주는 슈렉에게
뱀을 불어서 강아지로 만들고
풍선을 주었는데 나도 재미있었고
엄마도 많이 웃으셨다. 슈렉은
괴물인데도 착하다. 공주는 마법에
걸렸는데 공주가 사랑하는 사람이
첫키스를 하면 마법이 풀린다.
공주는 그 마법 때문에 낮에는
공주 밤에는 괴물이다. 괴물로
변했을 때는 슈렉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둘이 행복하게 되어
나도 기쁘다. 극장에서 떠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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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진선 |
見月休觀指 還家罷問程 識心心則佛
何佛更堪成 -景德傳燈錄
丹霞和尙翫珠 吟-
달을
보았거든 손가락을 보지
말고, 집에 돌아왔거든 길을 묻지말라.
마음을 알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어떤 부처를 다시 이룰 수 있으랴.
-경덕전등록
단하화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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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여행 |
이정숙 |
2003년 8월 9일 토요일
성도에 도착하니
새벽1시가 지나있었다. 오늘 새벽4시50분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40분. 채 2시간도 안 남았다. 빨리 자야겠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혀야지... 어깨, 팔, 다리가
쑤씬다. 4시50분까지 로비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공항으로... 근데 이게 웬일인가? 라사의
일기상태가 좋지 않아 오후1시가 지나서나
가능하단다. 할 수 없이 다시 공항측에서 마련한
호텔로 갔다. ☆☆호텔. 근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방이 없단다. 우리단체를 수용할 방이
없었다. 그 곳에서 거의 한 시간 넘게 실랑이를
했다. 그러나 해결을 못해서 다시 다른 호텔로
이동했다. 이번 호텔은 ☆☆☆. 그나마 다행히
이 호텔은 방이 있었다. 우린 각자 방으로
가서 잤다. 오전 8시30분쯤 아침밥을 준다고
했다. 메뉴는 빵, 우유, 삶은 달걀.... 휴
역시 중국이다. 대충 먹고 눈을 붙이고 기다렸다.
10시20분쯤에 로비로 오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우린 출국준비를 마치고,
시간이 좀 남아 각자 점심을 해결하라는 말에
정호(이곳에서 만난 동생)라는 동생과 같이
컵라면을 사서 먹는데... 이건 또 무슨 맛인지...
원 맛이 없어도 없어도... 돈만 날렸다. 컵라면
15원(元) 이곳에 와서 처음 사먹은 음식. 어제
먹은 그 향신료 냄새와 느끼함과 매운 맛이...
1/3도 못 먹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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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15분.
이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다. 엄청난
사람들... 언제 갈지 모르겠다.
라사가기가 이렇게도 힘든지 모르겠다.
드디어 라사에 4시쯤 도착했다.
정말 티벳에 온 것이 느껴졌다.
공항주위로 둘러싼 산들.... 정말
고원임에 틀림없었다. 현지 가이드
아저씨와 만나 라사의 호텔로
향했다. 공항에서 라사 시내까지는
1시간30분정도 소요되었다. 가는
길은 뭐랄까?..... 자연의 웅대함이
느껴졌다. 구름의 그림자가 산에
비칠 정도로 산은 높았다.
가는 길의 티벳인들이
사는 집들이 특이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벽 밖으로 삐져 나온
것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물받이였다. 지붕이 평 지붕이라
지붕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흙과 벽돌로
되어 있었고, 모든 집들은 황토색으로
주위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중간중간
새 건물과 관공서 건물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인의 것인 듯 했다.
드디어 라사에 도착. 시간은
오후6시가 좀 지나있었다. 조캉사원은
관람시간이 지나 못보고 바코르
시장으로 갔다. 순례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시장의 물건들은
조잡했으나 나름대로 예뻤다.
조캉사원을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아 다시 사원 앞의 광장에
다다랐다. 근데 이게 웬일....
조금씩 어지럽더니... 아니 내가
바닥에 |
누워 있는게 아닌가....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쓰러졌던 것이다.
나원 참... 부끄럽고, 미안하고, 내가 왜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어나 호텔로 가려는데,
또 쓰러졌다. 두 번 쓰러진 것이다. 정말 “이게
고산증 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
언니와 택시를 타고 호텔로 와서 로비에 있는
매점에서 약, 물, 산소통을 샀다. 그리고 난
방에 와서 누웠다. 좀 나았다. 일행들이 도착해서
밥을 먹으러 갔는데... 다들 나보고 많이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사과도 하나
손에 들었다. 이때까지 먹은 밥 중에서 제일
나았다. 물론 고추장에 비벼 먹었지만 말이다.
밥값은 저렴했다. 10원 식당에서
호텔까진 가까워서 걸었다. 시원한 것이 가을
날씨 같았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 기분이 좋았다.
방에 와서 난 세수만 하고, 사과하나 먹곤
잤다. 내가 쓰러졌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체격에 쓰러지다니. |
2003년 8월 1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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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
늦게 일정을 시작했다. 8시20분쯤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러나 역시
먹을 것이 없었다. 흰죽에 빵만
들고 와서 먹었다. 어제의 일이
생각나 난 죽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아침밥을 먹고 조캉사원으로 갔다.
조캉사원의 입장료는 45원. 옥상에
올라가 사진도 찍구 좋았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글쎄 정호와 난 5분정도
늦게 도착했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우릴 찾으러 갔다는 것이었다.
어찌나 미안한지.... 그리고 다음은
드레풍사원. 입장료는 35원. 이곳도
역시 재미있는 공간이 많았다.
사진을 어찌나 찍었던지.... 그러나
실내는 찍을 수가 없다고 했다.
드레풍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러
식당엘 갔다. 티벳 전통식당으로
그곳의 밥은 괜찮았다. 그러나
난 여전히 향신료에 적응이 안된다.
왜 이렇게 내가 입이 짧은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맛있다면서 잘만
먹는데 말이다. 점심을
먹고 나와, 세라사원으로 갔다.
이곳 역시 입장료는 35원. 이곳의
스님들이 하는 토론을 오늘은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에나 볼 수가 있다고
했다. 공부하는 스님들이 휴가를
가는 바람에 볼 수가 없다나....
어찌나 웃긴지... 스님들도 휴가를
가는구나! 아마도 만행이겠지?
하여튼 그래서 오늘 우선 1차적으로
보고, 목요일에 와서 잠깐 토론만
보기로 했다. |
난 혼자 법당에서 나와 걷는데,
여행 일행을 만나 같이 잠시 돌아다녔다. 그곳의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에 가서 의자에 앉아
쉬다가 나이 어린 라마스님과 사진도 찍었다.
사원을 대충 둘러보고 주차장에 내려가니,
또 늦었다. 난 항상 늦게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에구구구....... 그리고 우린 포탈라에서 잠시
외부만 사진을 찍었다. 포탈라궁은
하루 외국인 입장객을 8,000여명 정도로 한정해서
받기 때문에 새벽에 나가서 대기 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후 3시 30분 이전에는
들어가야 한다고... 아무리 표가 있어도 늦으면,
그 표는 무효가 되고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다. 현지 가이드분이 새벽4시에 갔음에도
불구하구 못구했다고 했다. 어쩜 포탈라는
다음에나..... 호텔로 와서
난 샤워를 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좀 걱정이 된다. 그리고 저녁 7시쯤에 호텔
앞에서 물건을 살까?하고 돌아다니다가 살
것이 없어서 그냥 난 슈퍼로 갔다. 물 4개,
과자하나 해서 11원에 샀다. 저녁을
먹구, 내일 간덴사 갈 준비를 했다. 과일도
사구, 슈퍼에서 장도 보고, 그리고 반지, 목걸이에
다는 팬던트도 샀다.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ㅋㅋㅋ
반지 10원, 목걸이 팬던트15원. 난 내일 이걸로
선물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특이하구 무난할
것 같다. 근데 부모님 선물은 뭘로 한담....
가진 돈도 얼마 없다. 환전을 해야 하나..
방에 와서 내일 가지고 갈
과일을 씻구, 일행 중의 한 분이 사신 과일을
먹으러 방에 가서 얘기도 하구... 재미있었다.
방에 오니 밤12시가 다되어 간다. 내일 5시20분에
모닝콜을 한다구 했는데... 빨리 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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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생활 |
marta
zalewska |
My name is Marta. I’m a 24 year
old female from POLAND and I came to KOREA
in September of last year to study. I was
participated in a one-year student exchange
program, which was arranged between my University
- WROCLAW University of Technology and CHANGWON
National University. I left Korea some
time ago and my close friend BUMSOO Soenim,
who regularly writes about Buddhism for
this magazine, has asked me to write about
my feelings towards Korea and its people,
who I have met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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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ived in a clean
and beautiful city named CHANGWON.
This city is relatively new
and is a planned city near BUSAN,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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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my studies at CHANGWON
University we stayed in one of the University’s
dormitories. I’m the one writing this article
because the other two students from POLAND
who also came to KOREA to study have already
left. Besides me, there are other
international students: three Chinese girls:
Joyce, Nija and Lin. I attended almost
every class with them and had a really good
time with them. After my almost one
year stay in KOREA, I have no doubt, that
there are many differences between Asian
and European cultures. It’s not possible
to point out all of them but, I would like
to write about those which are significant
to me and also my personal feelings towards
people, who I have had a pleasure to meet
in KOREA. I’ve noticed that Confusionism
has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style of
living here in KOREA. It has its far-reaching
implications. Korean society is definitely
a male dominated society. Usually the man
works to provide money and the wife takes
care of the children and stays at home.
There are still parents, who choose wives
for their sons. But in spite of this male
domination, I’ve noticed that the wife
is in a control in the house. She decides
which school children should attend or what
kind of university education they should
have. I was surprised when I realized that
there are no co-education dormitories. Girls
and boys live separately. While living in
the local dormitory I was obligated to be
in my room before midnight. Each floor has
a leader, who checks rooms almost everyday
and makes sure the order is kept. It was
surprising for me, because in POLAND, it’s
quite a different situation. In POLAND,
we have much more freedom. I had some difficulties
with communication with Korean students,
because of the language barrier, but eventually,
I found some people who became my really
good friends. To name just few: Olivia(Ji-yung) -
a wonderful girl, resourceful and very beautiful-
she doesn’t believe this, though!
Jae-Yong - a SEOUL National University
student with a wonderful sense of humor.
We laughed a lot together! Jun-Won
- a friend of Jae-Yong, a CHANGWON University
student, handsome and nice, Beside other
students, I made friends with one of my
ex-professors IN-SOOK KIM (Department of
Mass Communication). She helped me a lot
in the previous semester, when my life in
Korea had just began and it wasn’t easy!
I traveled throughout many places in KOREA;
I think I saw almost every place worth visiting.
I bought lots of beautiful souvenirs and
took a number of pictures. Those and my
memories of unforgettable moments spent
together with people, who I miss always,
will remind me of my stay in K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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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이름은 마타입니다. 24살의
여자이며, 한국에는 작년 9월에 폴란드의 WROCLAW
과학기술대학에서 창원대학교로 일년 간 교환학생으로
간적이 있습니다. 나는 얼마 전
한국을 떠나왔는데, 불교에 관한 정규간행잡지를
발간하고 계시는 범수스님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인상과 한국에서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느낌에 대해 써줄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저는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인 창원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창원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해있는데,
부산근처에 조성된 계획도시이며 비교적 신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창원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우리들은 대학기숙사중의
한 곳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요청받은 내용에
대해 한국에 대한 느낌을 쓰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왜냐하면 저 외에 두 명의 폴란드에서
왔던 학생들도 이미 공부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왔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외에도,
세 명의 중국유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Joyce,
Nija 그리고 Lin입니다. 저는 거의
모든 수업시간을 그들과 함께 참석했으며,
그들과 참 좋은 시간을 함께 했었습니다.
한국에서 거의 일 년 동안을 머물면서
동양인과 유럽인 사이에는 많은 문화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나, 한국에서 즐거운 만남을 가졌었던
사람들에 관한 것과, 나의 개인적인 느낌들과
나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었던 것들에 관해서
쓰고자 합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저에게 큰 혼란을 준 것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란 아직도 멀었지만, 제가
이곳 한국에서의 유학생활 동안 나의 삶의
방식에 큰 혼란을 끼쳤던 것을 언급하겠습니다.
한국사회는 한명의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항상 남자가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부인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아들의 부인(며느리)을 직접 고르는
부모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체제하에서 집에 있는 부인이 가정을
관리해 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그들의 자녀가 어느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든지
혹은 그들의 자녀가 어떤 종류의 대학 교육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남녀가 같이 기거하는 기숙사가 없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랬습니다.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은 분리된 각각의 기숙사에서 기거합니다.
멀리 떨어진 지방의 기숙사임에도 불구하고
외출 시에는 심야가 되기 전에 기숙사로 귀사
해야 하는 수칙을 준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각층마다 리더가 있어서 그는 거의 매일 방을
점검했으며, 또한 지시를 따르게 했습니다.
이것이 폴란드에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에 나는 얼마나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폴란드에서 우리는 훨씬 많은 자유가 있습니다.
나는 언어 장벽 때문에 한국학생들과의
의사소통을 하는데 조금 어려움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나의 진실한 좋은 친구들이
되어준 몇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꼭 몇
사람만을 얘기하자면. '올리비아'라고 불렀던
지영-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그리고 재치 있는
정말 대단한 여자랍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재용-국립 서울대학교에 다니는데 정말이지
유머와 센스가 극치를 이루는 학생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소리쳐 많이도 웃었답니다.
준원-재용의 친구로 창원대학교 학생이었는데
품위 있고 핸섬합니다. 그 외에 다른
많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나는 또한
나의 지도 교수님 중의 한 분인 김인숙교수님(언론정보학과
)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학기 전 한국에서의
나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었는데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많은 장소를 구석구석 여행했었습니다. 내가
봤던 곳의 거의 모든 장소는 매우 가치 있는
장소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름다운 기념우표도
샀고, 그리고 몇 점의 그림들도 샀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과 한국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함께 보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추억들이 항상 한국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며,
또한 한국에서 내가 머물었던 순간들을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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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정가을 |
(4학년)
2000년 6월 10일 제목 : 시계 |
엄마께서 오셨는데 이모께서
시계를 사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나와 동생은
좋아서 난리였다. 그런데 시계를 고장내거나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시계 그런데
정말 시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아무리 찾아도 없어, 내가 분명히 책상
위에 놔 두었는데..." 나는
책상 위에 분명 놔두었는데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엄마께서는 나를 꾸중하셨다. 시계를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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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2000년 6월 6월 15일주제 : 엄마께서 안 계셔서 |
오늘 엄마께서 외가
댁에 가셨다. 왜냐하면 내일이 외할아버지
생신이기 때문이다. 집에 오자 아무도 없었다.
숙제를 하고 방안을 둘러보니 내 책상 위엔
내일 입고 갈 옷이 있었다. 엄마께서 안 계시니
저녁밥은 아빠와 짜장면을 먹으로 갔다. 하지만
엄마께서 계셨으면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동생의 숙제도 동생이 잘 몰라서 쩔쩔 매다가
아빠께 물어보고 엄마께서 계셨다면 물어보지
않고 평상시에 하던 것처럼 물어보고 그리고
보니 내일 아침에 머리는 내가 단정하게 묶고
갈지 걱정된다. 하지만 엄마가 계시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엄마가 안 계시면 완전히 이 세상을 못살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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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김지민 |
나는
흙과 함께 생활하는 농촌에서 산다. 나무,
산, 물 들이 오래 전부터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곳은 너무나 평화롭다. 빵빵거리는 차들도
별로 없고 하늘을 찌를 듯한 아파트도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집 창가 흔들 의자에 몸을
기대면 하늘나라 세상을 보는 듯하다. 합창을
하듯 쫑알거리는 참새들, 시원하고 씩씩하게
뻗어나간 산들, 그리고 복숭아나무와 나무
사이의 아늑한 공간들이 내 마음을 쏙 빼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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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복숭아 밭이다. 봄이 되면 온갖
눈보라와 강한 추위를 이겨낸
꽃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어느새 꽃동산이 되고 만다. 잘난
척 하듯 활짝 웃으면 뽐내는 꽃들
사이로 달리면, 그 순간은 내가
꽃의 여왕이 된 느낌이다. 자전거를
타고 들판의 농로 길을 휙 돌아오면
내 얼굴은 빨갛게 웃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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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햇빛이 쨍쨍 내리 쬐이면 복숭아
밭에 물을 푼다. 그러면 나와
동생은 하던 공부를 덮어두고
헌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정신 없이 뛰어나가 작은 삽을
들고 할아버지를 따라 물길을
트고 막는다. 밭이 온통 질어지면
진흙 케잌도 만들고, 물 위에
신발도 띄워 보내고, 맨발로 물
튀기기 시합도 한다. 옷이 엉망이
된 만큼 내 마음은 환해지고 하늘을
뛰어 오를 듯 힘이 솟는다. |
가을에는 벼들이
황금바다처럼 출렁이고, 들판에 서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 저녁햇살에
비치는 벼 알갱이는 그윽한 밝은 황토 빛 볏잎은
투명한 연두 빛, 가만히 쳐다보면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늦가을쯤 되면 난 어깨에 호미를
걸치고 산에 있는 밭으로 간다. 산에 밭은
고구마 밭이다. 그래서 땅 색깔이 빨갛다.
고구마는 빨간 땅이야라 맛이 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께서 내가 '일꾼'이라고 하신다. 일을
너무 좋아하고 잘하기 때문이다. 내가 고구마
밭에 나타나면 “어이구, 우리일꾼 오셨네”
하시면서 반겨 주신다. 고구마 캘 때 지렁이,
굼벵이가 튀어나온다. 그 때마다 난 “엄마야”
하면서도 고구마 캐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리가 내리면 무는 맛이 든다. 커다란
무를 쑥쑥 뽑을 때 내 힘은 천하장사 같다.
땅을 깊이 파고 무를 흙으로 덮을 때 뿌듯한
마음으로 “보물단지 묻었다.”노래를 부르며
발을 꽝꽝 구르며 흙을 다진다. 그러면 정말
보물을 묻은 것처럼 기쁨이 넘친다. 겨울에는
눈이 오면 포대 자루를 하나 씩 들고 눈이
소복이 쌓인 뒷산으로 가서 미끄럼을 탄다.
쓩~ 내려올 때 하늘에서 무지개 타고 내려오는
순간이다. 두껍게 얼은 개울 물 위에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 신나는 긴장감과 얼음 밑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신기함도
겨울의 즐거움이다. 사계절마다
다른 놀이와 풍경을 펼쳐주는 농촌에 사는
것이 행복하고 고맙다. 하지만 어른들은 복숭아가
제값을 받지 못 한다고 , 농촌이 어렵다고
하신다. 사람들이 인스턴트 음식을 먹지
않고 우리의 자연에서 난 과일들을 먹으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힘들게 일하시는 동네
어른들도 주름을 펼 수 있을 텐데……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연이 살아있는
농촌, 아이들이 자유롭게 꿈을 키울 수 있는
농촌을 사랑한다.
-김지민 어린이는 현재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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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손진숙 |
불혹의 나이,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 이 것이 가을의 나이가 아닐까?
윤기있던 초록잎이 푸석해지고 밖으로의 생기를
안으로 거두어 들인 가을의 뜰은 제 빛깔의
모습으로, 제 성질의 모습으로 열매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이나 가을이나 여름 태양
아래에서 진한 유화는 수채화처럼 옅어지고
시원한 바람결엔 잡지 않음이 묻어 난다.
뚝! 하고 나뭇잎 하나 떨어지면 욕심 하나
떨구어 내고, 하늘이 맑고 높아질 때 쳐다
볼 수 있는 깊은 두 눈을 가질 수 있으면 한다.
가을은 지나온 날처럼 환호와 고뇌는
아니라도 익어가는 자연스러움이 처연함이
베어있다. 가만이 들여다 보면 하얀 눈의
침묵도 전해져 온다. 들판에 벼 익는 아늑한
냄새가 날 즈음 주문 같은 흥얼거림이 시작된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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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꽃 한 송이 |
문옥선 |
어젯밤에 곧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을 보고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느새 진한 향기를 내뿜는
만개한 꽃이 되어서 나를 반긴다. 올봄에 싹을
틔워 화분에 옮겨 심었던 까치콩이 가을에
들어서 드디어 하얀 꽃을 피워준 것이다. 콩알을
손에 넣은 지 여섯 달 만에 보게 된 까치콩
꽃이다. 콩알을 물에
불리고 그걸 화분에 옮겨 심은 다음 싹을 틔워
분양해준 집에서는 "우리는 이미 콩깍지까지
맺혔다."는 소식을 들은 지 한 달이 지난
오늘에야 우리집의 까치콩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해가 온종일 드는 들녘이 아니고서는 꽃이나
열매 맺기가 어려운 식물입니다."라는
소리를 이미 들었기에 "꽃을 피우지 못한들
어떠랴?" 라는 마음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꽃이 피고 진 다음 열매까지 맺혔다는
이웃의 말에 “우리 집 콩도 나를 닮았나 봐요.”라고
농담 삼아 말을 건네기도 했었는데 드디어
꽃을 피웠다. 같은 씨앗이건만,
움이 트는 때도, 싹이 올라오는 것도, 꽃이
피는 시기도, 열매를 맺어주는 시절도 참으로
제각각이다. 여러 알의 콩알 중 건실하게 싹을
틔운 것들은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어렵사리
움도 틔우고 떡잎도 간신히 피워낸 콩 싹 하나를
화분에 남겨두었었다. "몇 잎인들 나올
것인가?, 저러다 말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만이 있었다. 그러다 싹이 나올
즈음에는 뭘 하다 말고서도 "얼마쯤 자라났을까?"
라는 마음으로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물론 “잘 자라야 한다.” 당부까지 하기
일쑤였다. 까치콩은 내 속이
답답할 때면, 가만히 앉아서 손으로 만지고
주절거리기도하는 대화의 창구역할까지 대어주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 관심도 시들해지기도
했다. 남들도 그러는지? 아니면 나만 그런
건지?, 처음에 너무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져 보아서 인지, 하여튼 많은 잎을 뻗어가며
잘 자랄 때부터이던가, 관심에서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고, 바닥에서 짓물러진 잎이라도
볼라치면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내기도 했다.
처음에 조바심과 안타까움을 가졌을 때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또 일 때문에
며칠간 집을 비웠을 때는 대야에다 물을 담아서
화분을 담아놓지는 않고 그저 물을 꼭 줄 것을
당부만 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죽을 것처럼
시들해진 모습을 볼라치면 마음 아프기도 했었다.
너무 말라서 가망 없는 줄기들을 뜯어내고
물을 듬뿍 주면서부터, 다시 그것들과 주절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실 까치콩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웃에게 콩 싹을 분양하고 떠나간
자리에 더덕 몇 뿌리를 함께 심어두었는데,
여름 내내 까치콩과 더덕이 한 화분에서 줄기와
잎을 앞 다투어 피워내더니만, 늦여름 들어서
더덕이 먼저 보랏빛이 물든 방울모양의 꽃들을
피워냈다. 이 꽃 또한 다른 집보다 한 달 이상
늦게 핀 것이다. 꽃을 보기 위해서
내 발걸음이 다시 잦아졌다. 더덕 꽃은 어릴
때 불었던 꽈리 모양으로 꽃망울들이 부풀어지더니
방울 같은 꽃을 만들어주었다. 생긴
모양이 그리도 울퉁불퉁한 것이 어쩜 저리도
당글당글하고 매끄러운 꽃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베란다 바닥에
파릇파릇하게 잎들이 퍼져 나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아서, 걸어 다니는데는 좀 불편했지만, 지주를
세워주지도 않았더니, 저들끼리 옆 화분의
소나무와 철쭉을 타고서 쭉쭉 뻗어나갔다.
그렇게 자라나던 더덕과 까치콩이 꽃을 피워준
것이다. 방울방울 맺혔던 꽃망울들이
한 송이가 피었다 지는가 하면, 옆에서 또
한 송이 한 송이 피고, 나중엔 쌍으로 방울모양으로도
피워주었다. 더덕 꽃이 질 무렵 까치콩이 꽃을
피우다니..., 저들끼리 뭔 약조라도 해두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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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매미 |
장태자 |
경남 마산의 어시장 주변은
지금 아수라장 그 자체이다. 태풍 매미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겨 버린 주민들은 삶의 의욕마저
잃은 듯 하다. 빨간 띠로 수해지역임을
알리는 어시장은 언제쯤 복구가 될까?... 치우고
닦아내고 말려도 쓸만한게 하나도 없는 생필품과
가재도구들... 전기와 수도가 복구 안돼 발만
동동 굴리는 시민들... 식수마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사회단체에서 제공되는 생수로 겨우 목만
축이는 사람들... 산처럼 쌓여만 가는 쓰레기들...
악취와 벌레로 들끓는 골목과 도로... 마른
먼지와 소독차의 뿌연 안개속에 내팽개쳐진
자동차들... 다만 사체만이라도 찾기 위해
애태우는 실종자 가족들... 저 곳이 과연
바다일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물 위에
떠 있는 쓰레기들과 방치된 폐선들... 어디
한 곳 성한 곳이 없는 점포와 집들...마산
월영동 상가에서는 "원수 같은 원목만
아니었던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을텐데"
하며 오열하는 유가족들... 정녕 여기가 지옥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나는 감히 여기를 지옥이라
부르고 싶다. 수해지역에서
복구를 위해 구슬 땀을 흘리는 사람들은 "피곤하다"는
말조차 꺼내기 미안해서 눈짓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이런 현장 한 가운데 서 있다가,
문득 "하늘도 무심하지..."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힌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이 정도인데, 들어 나지 않은
것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피해를 입은 사람들
가운데 울지 않는 사람들은 울지 못해서 울지
않는 것일까?... 태풍 매미가
남기고 간 상처를 보며 "아무리 자연
재해라 어쩔 수 없다지만, 매년 겪는 태풍에
대하여 종합적인 대비 책을 세워 국민을 생각하는
행정과 정치를 했으면..."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수재민들에게는 지금 그 어떤 말보다도 같이
힘을 보태는 일이 더 시급할 것이다. 수해복구
현장에서 마치 내 일 같이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나마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TIP) 아시아 태풍위원회
회원국에서는 태풍 이름을 그동안 사용하던
영어 이름 대신 14개 회원국에서 각각 제출한
10개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140개의
태풍이름은 1개조에 28개씩, 5개조로 나눠
1조로부터 5조까지 차례로 사용하고, 5조가
끝나면 다시 1조로 되돌아 온다. 태풍이름의
순서는 제출 국가의 알파벳순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출한 태풍이름은 개미, 나리,
장미, 수달, 노루, 제비, 너구리, 고니, 메기,
나비 등 10개이며, 북한은 기러기, 도라지,
갈매기, 매미, 메아리, 소나무, 버들, 봉선화,
민들레, 날개 등 10개로 대부분 동식물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한국식 이름은 국가명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조에서 11번째와 25번째이며,
북한이 정한 이름은 각조 3번째와 17번째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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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
조혜숙 |
화면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숨막힐
만큼 아름다운 자연을 두고 수채화같은 한
폭의 그림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건 자연에
대한 무시이자 무지이고, 건방일 것입니다.
가장 서정적이고 고요한 자연의
모습을 화면에 그대로 실어 놓아 찰랑 거리는
호수의 물소리도, 새벽에 피어 오르는 물안개도,
에이듯 추운 칼 바람도 그대로 느껴집니다.
온통 보이는 거라곤 산뿐인데, 그 한가운데
호수가 있고, 그 호수 가운데 아주 작은 암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 암자에는 노승과 동자 승이
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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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면서 강아지, 닭, 고양이,
거북이, 뱀, 그리고 개구리와 물고기와 오리도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암자엔 큰법당 한
칸뿐인데 그 각각 한 켠 마다 작은 쪽문만으로
방과 법당을 구분 지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방을 구분하는 벽이 없어 서로 통하지만 그래도
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그곳을 통해서만
들고 납니다. 그 암자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수단은 작은 나룻배, 그 배를 저어 나가면
또 형식적인 산문이 있습니다. |
봄에는 동자승이 고기.
개구리 뱀을 잡아 돌맹이를 달아놓고 즐거워
하는 모습에, 노승은 미물에 가한 고통을 동자
승에게 똑같이 가하여 그 고통을 알게 하는
가르침을 주고, 여름엔 청년승이 되여 그 암자에
병을 고치러 온 여고생과의 사랑에 빠져 암자를
떠나게 되고, 가을엔 떠났던 늙은 청년 승이
증오심에 휩싸인 채 사랑했던 여인의 변심을
참지 못해 살인을 저지르고 피 묻은 칼을 지닌
채 암자로 돌아오고, 겨울엔 이미 장년이 되어버린
한 남자(여기선 직접 김기덕 감독이 출연)가
얼어버린 호수위로 사회적인 죄 값을 치루고
석방되어 돌아옵니다. 이미 노승은 입적한
후이고 이젠 홀로 수행을 합니다. 어느날
얼굴을 가린 한 여인이 아이를 데리고 암자로
옵니다. 다음날 아이만을 남겨두고 여인이
떠났음을 알고 황급히 나가다가, 호수의 한
부분에 살얼음이 끼여 있고, 그곳에서 도망쳤던
여인의 시신을 찾습니다. 그 여인의 얼굴에서
지난날 자신의 욕망과 죄의식의 모습을 상기하며,
스스로 허리에 커다란 맷돌을 달고 반가사유상을
안고 제일 높은 산꼭대기로 오릅니다. 고행으로
죄를 씻을 수만 있다면 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부처님을 모셔 놓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다시 봄. 여인이 두고 간 아이는 동자승이
되었고, 그 동자승은 그 옛날 지금의 스님이
동자승이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고기, 개구리,
뱀을 잡아 입에 돌맹이를 물려놓는 놀이를
즐거워 합니다..... 이번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영화의 내용을
일부러 지루하리만큼 길게 실었습니다. 왜냐하면
김기덕감독의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그에
대한 기존적인 고정관념이 관객을 두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강간, 자해, 살인등 도저히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를 만들어 그동안 감독에
대한 평가는 '좋다, 나쁘다'가 극단적 이었습니다.
한데 이번 영화는 이번엔 관객도 쉬여 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롱숏'의
영화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관조하듯 만든 영화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나오고, 스님이 나오고, 반야심경이
나오니까 마치 이 영화가 그저 평범한 불교영화
같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화도 역시 카리스마가 너무나 뚜렷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입니다. 다만 영화의 배경을
불교에서 빌려 왔다는 것뿐입니다. 언제든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느껴졌던
감정이 그대로 이 영화에도 느껴졌습니다.
이 감독은 인간이란 본래 선함보다는 악함에
더 많은 비중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난 이 영화를
50%만 만들었다.나머지 50%는 내가 찾지 못해서
표현을 못했거나, 관객이 자기 삶의 경험,
지식, 정보를 합쳐서 볼 때 메울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과연 이 영화는 영화속의
풍경만큼이나 단순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요소의 조합을 감독이 50%만 만들었다면,
관객이 나머지 50%를 채우면서 관객 나름대로의
풍요로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아니면 도리어
허허로움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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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촌-영혼의
여정 |
도난주 |
북촌을 대상지로 논문을
쓰다보면, 주위에 위치해 있는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인사동을 돌아볼 기회가 자주 생긴다. 며칠
전에도 북촌을 둘러보다, 유독 눈을 사로 잡는
포스터~ '영혼의 여정-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국립중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박물관으로
직행하여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소주제인 영혼의 여정, 죽음 후에 영혼이
저승사자와 만나 지옥의 형벌을 거쳐 극락으로
인도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회에 있는 모든 회화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유교국가이기
때문에 불교회화가 거의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사라질 만큼 웅장하고 다양했다.
또한 처음 보는 작품, 의미가 담겨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호기심 있게 모두들 집중하게 만들었다.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 마련되어
있는 전시관에 들어가기 전,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탱화가 그려져 있다. 전시회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3년간의 여정기간을 가지며, 그
후에 저승사자 앞에 윤회의 업경대를 통해
심판을 받으며, 지옥으로 가고 다시 극락으로
가는 과정을 여러 부처님과 함께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회장을 뒤로 한 채
문득 드는 생각! 죽은 내가 자신있게 업경대를
볼 수 있을까? 살아있는 지금도 과거를 후회하는
지금,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삶이 되어야겠다
다짐해 볼 수 있었다. 지금은 후회를 다시
하지 않도록 열심히 사는 것으로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죽어서는 후회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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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여정 - 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 일시 : 2003. 9.2-10.5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m.go.kr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사동이나 종로에 약속이 있는
분들은 이번주말을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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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경대(Karma
Mirror and Stand)> 사람이
죽어 저승사자 앞에서 심판을 받기 전에 왼쪽에
있는 업경대를 통해 살아온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목재로 만들어져 있어서 나이테가 선명하게
보여있는 색체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소자본불성심관세음보살대나라니경>
작은 새끼손가락
반만큼의 종이에 경전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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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자전거 하이킹 |
김경원 |
안녕하세요^^ 이번에 제주도 하이킹
여행의 한 명인 김경원이라고 합니다. 제가
제주도행의 그 세 번째 날을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저에게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루를
같이 하지 못하는 바람에 두 번째 날이 되네요..
어제 원주라는 친구의 부상으로
우리도 놀라고, 또 조금 지치기도 하고, 해서
친구들과 약간의 알콜섭취로..^^;; 숙면을
취하고.. 오늘 아침 모두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조금 늦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오전에 제주도에 오면, 꼭 와보고
싶었던 이 곳 중문 관광단지에서 조금은 여유롭게
구경을 하고, 오후에는 다시 그 다음 목적지를
향해 하이킹을 하기로 계획을 잡고, 길을 나섰습니다.
또 오늘은 다섯 명의 멤버 중 남지와 정희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우리는 조금 지치는 듯 했지만,
분홍 우비를 입고 거침없이 빗속을 걷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샌가 우리는 우스깡스럽기도
했고, 무언가 대단히 각오 한 것 같기도 한
것이, 주위의 이상한 시선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 상황이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우리의
젊음으로.. 이런 모든 것을 감수했던 여행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 먼저
중문의 자랑 중에 하나인 말로만 들었던 3단
폭포, 천제연폭포로 향했습니다. 1단은 그다지
크지 않는 굳이 폭포라기 보단..큰 물줄기정도..
하지만 2단으로 갔을 땐 우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크기도 하고, 그 멋스러움이 정말
유명할만 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3단은
어떨지 정말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3단으로
갔을 때, 이 건.. 다시 1단으로 돌아온 듯한..
기대와는 달라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이 3단을 한 번에 찍어놓은 사진이 정말 절경이었는데,
아직은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 놓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구경을 하고 한
10분 정도 걸어가서 동양 최대의 식물원이라는
여미지 식물원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에
쫓겨 대충 봐도 모두 구경할 수 없었을 만큼
컸고, 정말 온 나라의 식물을 한번에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고, 각 나라의 정원을 만들어
그 나라 정원의 느낌을 맞볼 수 있는 아주
기억에 남는 곳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중문단지와
해수욕장이 있었지만, 그 다음 목적지로 향해야
하는 상황이라, 우리는 아쉬움을 남긴 채 무거운
발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멤버 원주, 은경 그리고 저는 다시 다음 목적지인
서귀포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서귀포로 가는 길은 하이킹하는 경로
중에 제일 난코스라 많이 힘들었고, 원주도
어제의 사고로 조금은 주춤거리며 자전거를
탔지만, 우리는 그래도 무사히 길을 갔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달려서, 첫 번째 도착지인 정방폭포에
도착했습니다. 이 폭포는 다른
폭포와는 다르게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폭포로 규모도 엄청났습니다. 아마 제가 본
폭포 중에 크기도 풍경도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아직 폭포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우리는
가는 길에 영화박물관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으로 들어가면 관람하는
것뿐 아니라, 그곳으로 통하는 바다가 정말
멋지다는, 그 곳 현지인의 추천으로 꼭 가봐야겠다는
결심으로 앞에 딱~ 하니 섰는데.. 문제는 관람비였다..
이렇게 멀리 와서 돈 문제로 가보고 싶은 곳도
가보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모두들 실망하며,
주변을 서성거리기를 몇 분..사진이라도 찍자는
심정으로 경비 아저씨께서 사진을 부탁드렸더니,
우리의 사정을 눈치채셨는지 "한 명치의
표만 끊어오면, 내가 들여보내주겠다."라고
하시는게..아닌가... 저는 그 때 그 분께 후광이
빛나는 듯한 착각을 잠시 했더랬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겪어 들어간 바다는.. 그 작태는
우리를 얼게 만들었고, 바다에 어우러진 푸른
나무와 깎아놓은 듯한 절벽의 3박자가 어울러져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쩌면 공짜여서 더 값지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 어스름해직 저녁,
간만에 깨끗한 숙소를 찾아 간단한 식사를
하고 모두들 말없이 자리에 누워, 오늘 있었던
감동을 마음에 되새기며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그때 그 감동 그대로 말해주리라 다짐하며
잠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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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자라는 열린 학교 |
장남지 |
특수아동들이 혼자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여건에서 방학이 되면 그냥 집, 아니면
다른 시설에 방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의 한
대책으로 처음으로 8월 4일부터 22일까지 3주동안
희망이 자라는 열린 학교를 열게 되었습니다.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한 저였지만, 한 번 해보겠다는
대찬 각오로 열린 학교의 담임선생님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경남 의령에 위치한
은광학교에서의 입학식을 시작으로 조금은
서투른, 하지만 정말 즐거운 열린 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입학식 날부터 낯선 환경에 내내 징징대며,
한 시도 자리를 지키려 하지 않는 아이들,
앞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인사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시끄럽게 하는 아이들, 처음이라서
그런지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부모님들도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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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학교에서는
한 반에 약 9 명정도로 4개의
반이 만들어졌고, 저는 그 중에서
중등1반인 사과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앉기엔 조금 작아 보이는
책상들..선생님이라고 불리기엔
아직 많이 부족한 저와 3명의
보조선생님들..(보조선생님들도
모두 저희과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열린 학교의 한
가족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누구든 그들만의 개성이 있는
법,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한
명 한 명이 정말 독특한 특성과
습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도, 가끔은 아주
즐겁게도 해주었습니다. |
한 명, 한 명 소개 드릴께요^^
먼저 가장 기억에 남는 태준이..^^ 이번
호의 주인공입니다. 태준이는 14살 정도로
키는 저보다 조금 작지만, 덩치는 이미 저를
넘어선... 아직은 의사표현이 어렵고, 주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고, 배울 것도 아직 너무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반은 4반
중에 말썽이 적은 편에 속해 있었지만, 우리
태준이가 처음에 열린 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사과 반은 조금 힘든 곤욕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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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음식을 씹지
않고, 그냥 삼키는 습관이 있어서
소화를 잘 못하는 데에다가, 매일
낯선 학교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게 되다 보니, 버스에서 교실에서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올려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버스에서 처음
태준이가 올려버리는 것을 보고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 후론 항상 가방엔 도시락과
여벌의 옷이 한 벌 있었고, 그런
일은 |
태준이가 적응하기 전에는 어디서든
일어났습니다. 처음 이틀쯤은 점심시간에
도시락 냄새만 맡아도 헛 구역질을 해서, 다른
아이들도 힘들어하고, 선생님들도 어쩔 줄
몰라하며, "나머지 날들을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지만, 우리 모두가
이렇게 걱정을 하는 것을 알았는지, 태준이는
3일이 지나서부터 그런 일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밥도 잘 먹고, 어느새 저와는 정이 많이 들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들로 태준이는 밥을 혼자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특별히 반찬이
필요없는 볶음밥이나, 카레라이스는 혼자서도
곧잘 먹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우리 반도
즐거운 점심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태준이는 제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같이
가려했고, 물건도 나누어서 같이 운반하며,
태준이가 싫어하는 공부도 같이 하며,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가끔은 태준이가
먹어서는 안되는 크레파스를 먹어서 한 번
저한테 심하게 혼이 난 적도 있었고, 열린
학교가 끝나기 하루 전에 태준이가 계속 바지를
내려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는데,
결국에는 교실에서 2미터정도 떨어진 복도에서
그만 큰 일을 보고야만 엄청난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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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태준이가 친한
척을 한답시고 저 외에도 여러
선생님들의 등을 때리기도^^ 그
손 두께에 안 맞아본 사람은 얼마나
아픈지 모를꺼에요~~!!^^* 그래도
태준이가 우리 반에서는 최고의
귀염둥이랍니다. 기분이 좋을
땐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으며,
웃을 때 보이는 덧니도 얼마나
귀엽다구요. |
가끔 제가 자기 아닌 다른
아이들과 공부를 하거나 놀고 있으면, 어느샌가
다가와서 자기를 봐 달라며 또 한 번 등을
어루만져줍니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지만,
살이 하에서 투정부리는 모습이 마치 얘기같고,
가끔 자신이 잘못한 행동을 했을 땐, 제가
혼낼까봐 조용히 자기의 자리에 가서 반성하는
척.. 하며 조용히 제 눈치만 봅니다.
태준이를 보면서..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많은 일들을
혼자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쩌면 처음엔
색안경을 쓰고 태준이를 바라본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같이 있어보면.. 말하지 않아도
뭘 하려 하는지, 뭘 원하는지.. 아주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태준이를 좋아하게 된 걸 보면요...^^ 다음
주인공은 박정호 학생입니다..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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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맞이 |
이재란 |
오늘도 요란한 경운기 소리에 눈을
떴다. 부지런한 농사꾼들이 새벽을 여는 요란한
소리. 처음 시골에 들어와 살면서 새벽이면
들려오는 '털털털' 경운기 소리. 이 집 저
집에서 맞장구치며, 울어대는 닭 소리, 옆집
외양간에서 '음매음매~'소 울음소리, 이것저것
고장 났다며, 손봐 달라는 동네 어르신들의
전화소리, 이런 소리들 때문에 아침잠을 곤히
잘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새 십 년을 넘게
살다보니 이젠 아무렇지 않게 늦잠을 즐기곤
한다. 리모콘을 찾아 TV를 켜고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몇 일전 만해도 시원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는데, 팔에 소름이 쫙 끼며
차가운 바람이 내 볼을 사정없이 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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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어 텃밭 넘어
누런 황금 빛으로 물들던 이웃집
아저씨 논도 푸른 빛을 자랑하던
앞산 소나무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잠시 후 무대의 장막이
걷히면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더없이 선명한 빛깔을 자랑하겠지?
오늘은 무얼해야 하나?
맞아 밭에 나가 팥을 따야 할
것같다. 어제 밭두렁에 애호박
찾으러 갔을 때 보니 어느새 팥들이
익어서 제집을 박차고 나온 녀석들이
있었다. |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고
집안일을 대충 끝내고 커다란 소쿠리를 옆에
끼고서 밭으로 향했다. 밭어덕 밑에 심어놓은
토란은 어느새 내 키만큼 자라있었다. 늦은
봄에 아버지께서 씨앗을 주시며 심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 주셔서 생전 처음으로 심었는데
고맙게도 너무나 잘 자라 주었다. 아마도 올해
잦은 비 때문인 것 같다. 토란은 습해야 잘
자란다고 한다. 그런데 밭고랑은 온갖 잡풀들이
자라서 풀 속에 숨어있는 녀석들을 마치 보물
찾기 하듯 찾아냈다. 게으른뱅이 주인을 만나
사방에서 기세등등 덮쳐오는 풀들 때문에 얼마나
간지럽고 괴로웠을까? 그래도 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준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너무 익어버린
녀석은 내손이 닿자마자 너도나도 튕겨져 나와
풀 속으로 숨어버린다. 붉은 자주 빛이 정말
눈부시도록 번쩍거린다. 여름 내내 내린 비
때문인지 벌레들이 많이도 달라붙어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호호 이게 바로 무공해야.
햇빛에 바짝 말려서 우리 딸 좋아하는 팥죽
끓여줘야지" 벌레들을 비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 소쿠리 가득히 따서 돌아오는
길에 아랫마을 친구네 밭에 주렁주렁 열린
단감나무가 내눈에 쏙 들어온다. 냉큼 달려가
제일 잘 익은 놈으로 따서 한 입 먹어보니
뒷맛이 아직 떨떠름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모습도 항상 풍요롭고 넉넉한 시골 아낙네의
광주리 같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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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 |
구선화 |
구선화 어린이는 현재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사군자는 취미로 그리는 것으로
배접이나 표구를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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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섬 거제도 |
김수향 |
행사에 도움주신 분들과
단체사진 외국인을 진료중인
의료 봉사대
즐거운 점심시간
지역민을 진료중인
의료 봉사대
전통차 시연
공양을 준비중인 자원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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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시
수양마을이라는 곳에 오시면,
황혼 빛 들녘을 지나, 하늘 올려다
보는 길목에 금강사라는 쉼터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3년 9월 7일 일요일 금강사에서
주최하는 '한가위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한마당 잔치'를 있다고 하기에,
기도(지장기도)중인 우리 부부는
자원봉사에 참석하기로 의견을
모았답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 새벽예불에 참석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조금 피곤할지는 몰라도 기분은
너무 좋았습니다. 음식을 장만하고
행사 준비를 해 가는 과정 또한
잔칫집 못지 않게 좋았습니다.그런데
가슴 한 자락에 걱정거리가 있었답니다.
그것은 행사 당일 비가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당일
날 새벽예불에 참석하려고 차를
탔는데, 가량비가 유리창을 적셔올
때 우리 부부는 무척 걱정을 했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오면서 날씨가
너무너무 좋다 못해 더웠습니다.
그렇게 좋은 날 좋은 날씨 속에서,
봉사하는 그 누구 한 사람도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고 밝게 미소 짖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 또한 너무
행복했습니다, 제
1회라 그런지 많은 외국인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해하고 즐거워
하는 외국인과 지역 노인분들을
보았을 때,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봉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차 한잔을
받고도 환한 미소로 답례하는
외국인들과 불편한 몸으로 이
날 하루만큼이라도 무료진료를
받으시면서 "고맙다"라고
하시는 노인분들을 뵐 때 가슴
한 곳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이런 행사가 자주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저희 부부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이런 행사에 동참하자"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번 행사를 주관하셨던
금강사 주지스님을 소개할까 합니다.
스님께서는 기다리지 않고,
어렵고 어두운 곳을 먼저 찾아 가셔서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랍니다. 행사도중에는 "스님!
뭐 좀 드시면서 하세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예,
그러죠"라고 하시면서도
행사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미쳐
여러 사람들이 보지 못한 곳을
찾아다니시면서 도우셨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시는 우리스님!, 아직은
많은 것이 부족한 저희들이지만,
스님 가까이에서 늘 함께 할 수
있는 저희들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한가위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한마당
잔치'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동참하신 분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이 일을 주최하신 금강사
주지스님, 보덕스님, 보리수 쉼터
주지스님과 자원봉사대, 경상대학교
의료 봉사대, 차(茶)를 준비하신
금강사 다도반,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신 금강사 자원 봉사단,
외국인 근로자와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음식을 보시한 식당 독불장군,
떡을 보시한 고현 떡 방앗간,
풍물을 준비한 거제 사물
놀이패, 이 외에도 많은 곳에서
물심양면으로 협찬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께 두 손
모아 감사의 말씀 대신 전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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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喩經卷第一
尊者僧伽斯那撰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愚人食鹽喩 愚人集牛乳喩 以梨打破頭喩 婦詐語稱死喩 渴見水喩 子死欲停置家中喩
認人爲兄喩 山羌偸官庫喩 歎父德行喩 三重樓喩 婆羅門殺子喩 煮黑石蜜漿喩 說人喜瞋喩
殺商主祀天喩 醫與王女藥令卒長大喩 灌甘蔗喩
債半錢喩 就樓磨刀喩 乘船失釪喩
人說王縱暴喩 婦女欲更求子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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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七)債半錢喩
往有商人貸他半錢久不得償。卽便往債前有大河。雇他兩錢然後得渡。到彼往債竟不得見。來還渡河復雇兩錢。爲半錢債而失四錢。兼有道路疲勞乏困。所債甚少所失極多。果被衆人之所怪笑。世人亦爾。要少名利致毁大行。苟容己身不顧禮義。現受惡名後得苦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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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반푼의 빚과 네 냥의
손해
어떤 상인이
남에게 돈 반푼을
빌려쓰고 오랫동안
갚지 못하였다. 그는
빚을 갚으러 떠났는데
그 앞길에는 큰 강이
있었다. 뱃삯으로
두 냥을 주어야만
건너갈 수 있었다.
그는 빚을 갚으려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나,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강을 건너 돌아오면서
또 두 냥을 써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반
푼 빚을 갚으려다,
도리어 네 냥의 돈을
손해보고 말았다.
진 빚은 극히 적었으나
손해는 아주 많아
결국 여러 사람들의
비웃음만 당하였다.
세상
사람도 그와 같다.
작은 명예와 이익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큰 손실을 보게 되니,
제 몸을 위하여 예의를
돌아보지 않으면,
현재에는 허명을
얻고 미래에는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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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八)就樓磨刀喩
昔有一人。貧窮困苦爲王作事。日月經久身體羸瘦。王見憐愍賜一死駝。貧人得已卽便剝皮。嫌刀鈍故求石欲磨。乃於樓上得一磨石。磨刀令利來下而剝。如是數數往來磨刀。後轉勞苦憚不能數上。懸駝上樓就石磨刀。深爲衆人之所嗤笑。猶如愚人毁破禁戒。多取錢財以用修福望得生天。如懸駝上樓磨刀用功甚多所得甚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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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락을 오르락거린
비유
어떤 가난한
사람이 왕을 위해
오랫동안 일하였다.
그는 늙고 야위었다.
왕은 그를 가엾이
여겨 죽은 낙타 한
마리를 주었다. 그는
낙타의 가죽을 벗기려
하였으나, 칼이 무디었기
때문에 숫돌에 칼을
갈아야만 했다. 숫돌이
다락에 있었으므로
다락 위에 올라가
숫돌에 칼을 갈아
다시 밑으로 내려와
가죽을 벗겼다. 결국
오르내리면서 칼을
갈다 몹시 피로해졌다.
그래서 오르내리지
않고 낙타를 다락에
달아 두고 숫돌에
칼만 갈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비유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계율을 깨뜨리면서
재물을 많이 취하며,
복을 닦아 하늘에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낙타를 달아
두고 다락에 올라가
칼을 가는 것처럼
애는 많이 쓰나 소득은
매우 적은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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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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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은 입동 전 혹은 입동
직후에 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면 냇가에서 부녀자들이 무, 배추를 씻는
풍경 또한 장관이었다고 한다. 음력
10월 10일에서 30일 사이에는 고사를 지내는데,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토광, 터줏단지,
씨나락섬에 가져다 놓았다가 먹었으며, 이웃과도
나눠 먹었다. 그리고 한해 농사 일에
애쓴 소에게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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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잡지
월간 좋은인연에 보내주신 후원금 가운데 100.000원을
태풍 매미로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성금을 냈습니다. 중앙일보 2003년
9월 16일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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