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7(2003)년 6월호 Vol.3,No.29. Date of Issue 1 Jun ISSN:1599-337X 

 

 

 

 

 

 

 

 

 맹신(盲信)

범수

   우리는 흔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고 한다. 아마도 지적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지적 능력을 행복과 불행의 기준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기쁨이나 슬픔의 정도가 지적 능력과 직접적인 인과 관계 속에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로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방황하고, 울고 웃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지적 탐구와 함께 행복을 추구 하는게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본다면, 지식 축적은 결국 행복의 추구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끝임 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고통이고, 어떤 것이 행복인가?" 하는 물음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똑 같은 상황이더라도 한 사람에게는 고통으로, 한 사람에는 행복으로도 작용함으로써 일률적인 잣대로 평가하기란 더욱더 어렵다. 그러므로 서로 상반되는 입장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절실히 대두되는 요즈음, 필자는 '존중'이라는 말로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상황을 자주 접하곤 한다.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만의 견해를 내세우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시비와 다툼이 발생하는데, 그 이면은 아마, '여의(如意 자기 뜻과 같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자기 뜻대로, 자기 뜻과 같이' 즉 뭐든지 마음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떤 생명체든지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알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특별히 자기만 아니기를, 자기들만 예외이기를 바라고, 믿기도 한다. 이 얼마나 허황되고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도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생명수 등과 같은 보편적인 진리에 반하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그 내면을 살펴볼라치면 먼저 허구적인 관념인 '영혼이나 자아'라는 그릇된 집착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같은 '자기, 영혼, 자아'의 관념은 인간을 이성적인 판단으로부터 격리 시키고, 진리에 눈멀게 함으로써 괴로움과 고통 속으로 내몰아 다시 신과 같은 우상 등에게 매달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못보고 기적 등과 같은 비상식적인 것에 매달리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허구적인 견해는 결국  나, 나의 것, 이기심, 증오, 악의, 질투 등과 같은 그릇된 신념과 번뇌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개인적인 갈등과 함께 전체적인 분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환언하면, 모든 악이나 재앙은 영혼이나 자아등과 같은 잘못된 견해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주체적인 의식이 작용한다. 그러나 그 의식만을 가지고 인간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식은 작용이 있을 시에만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식과 그에 따른 작용등이 인과관계로 결합했을 때 특성을 지니지만, 그러한 인과관계가 소멸되고 나면, 더 이상 특성을 지니지 않는다. 또한 그에 부수하여 일어나는 나, 나의  것이라는 개념 역시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인과관계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이든지 자기라는 것이 없다고 본다면, 당연히 모든 사물은 변화(무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자신의 생존과 소유물을 지키는데 온 정열을 쏟게 마련이다. 그들은 대부분 지나치리만치 자기와 자기것에 집착하지만, 어느 것 하나 공간적으로도 불완전하며, 시간적으로도 불안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만약 본체라고 주장할 만 한 것이 없고, 또한 연속성이 없는 우리의 현실세계를 바로 볼 줄만 안다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생명수니 부활(復活, Resurrection)이니 하는 보편적인 진리에 반하는 온갖 허구에 그토록 맹목적으로 맹신하지 않을 것이다.
 
맹신(盲信)은 옳고 그름의 분별 없이 덮어놓고 믿는 것을 말한다. 즉 까닭도 모르면서 무작정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다'와 '일 것이다'를 혼동한다. 즉 '일 것이다'는 추측이나 바램을 '이다'로 억지 부림으로써, '죽은 사람이 살아 날 것이다. 살아 났으면 한다' 라는 바램을 '살아난다. 또는 살아났다'고 단정하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이것은  아닌 것을 맞다고 하고, 맞는 것을 아니다고 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 진리에 반하는 사실을 진리로 믿는 것이다.

 

 

 

 삭제

문옥선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가 우리생활에 깊숙이 자리해 특별한 용무가 있건 없건 인터넷 항해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된다.  내 경우에도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내 성격과 맞는 사이트에 가입도 하면서 글도 올리고 또 남의 글도 읽으면서 다른 이의 삶도 엿보고 세상의 흐름도 읽곤 한다.  주로 뉴스와 정보를 검색하고 내 종교와 맞는 단체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더러 메일을 확인하는 것이 거의 전부인 내 인터넷 항해지만 나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기도 하기에 거의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편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난 내가 소속된 사이트와는 다르지만 같은 종교단체의 홈페이지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또 때마침 그곳에서 열리는 행사가 있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그러나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사이트를 방문하면서 해소하곤 했다.  결국 그 심정을 토로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면서.
 며칠이 지난 후 후배와 통화를 하고서 하도 우스운 말을 들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그래 남들과 함께 웃자 이것도 글 보시려니 생각하고 내 딴에는 신중을 기해서 짤막하게 올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 수준의 유머였으며 그곳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난 이 글로 홈페이지 관리자의 경고를 무시한 글을 올린 죄인이 되어 삭제당하는 묘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삭제당한 후 뒤늦게 읽게 된 안내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일방적인 의견개진에 대한 글은 이유를 불문하고 삭제‘한다는... 이유를 불문하라니 변명의 여지가 없고 따라서 입을 다물어야 함에도 왜 이리 기분이 씁쓰레한지 모르겠다.
세상살이의 운영의 묘가 아쉬운 걸까?  삭제당한 내 죄목을 공고한 것은 아니니 생각컨대 일방적인 의견개진인 셈이었다.  일방적이라, 그리고 의견개진이라, 죄목치고는 너무 화려했다. 일방적인 의견개진에 관한 글은 삭제가 된다면 어떤 내용만이 가능하게 될 것인가?
 때론 부처님의 말씀보다도 더 절실하게 진솔한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을 때도 있는데....물론 내가 그렇게 심금을 울리는 좋은 글을 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음담패설을 늘어놓은 것도 아니고. 흔히 이루어지는 뭘 어찌 해볼까 함은 더욱 아니고 마케팅을 위한 광고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내 생각을 쓴 것이었다. 남의 글의 도용이 아닌...
의견개진이란 어떤 일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 등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이 일방적이었다는 것이다. 난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적었고 서로의 공감대에 관해서 쓴 것뿐이었다.  그것이 내 일방적인 생각이었다는 데에 할말을 없다. 물론 생각하기 따라서 일방적일 수 있다. 삭제하는 관리자의 일방적인 처사처럼. 그런데 이렇게 올려지는 글을 삭제하는 것이 과연 꼭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꼭 번거로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일방적인 의견개진이기에 삭제를 했다면 그곳 역시나 일방적이지 않는가?  어떤 이의 글이 일방적이었다고 삭제되어야 한다면 일방적이지 않은 의견을 제시해주면 어떨까 싶다. 그런데 예감이란 것을 무시할 수도 없나 보다.
 뭐 별스런 내용을 올린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글귀는 아니었다. 그냥 사소한 일상을 올렸을 뿐이다. 그런데 방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미심쩍은 느낌을 가졌다. 그러면서 어째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외출했다 돌아와서 클릭해보니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미련은 없다. 단지 기분만이 씁쓰레할 뿐... 내 스스로 삭제하면 했지 이런 일을 처음이라.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삭제한다고는 했지만 중생제도의 원력을 갖고 운영하시는 홈페이지라면, 단 한 줄만이라도 삭제이유를 밝혀주었음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관리자에게 메일을 띄워 먼저 사과를 한 후 내 심정을 밝히려 했으나, 그 또한 그곳에서 삭제하는 항목인 일방적인 의견개진에 속하는 관계로 펜을 접었다.

 

 

 

 매트릭스 2 리로디드

 조혜숙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것이다' 라는 도발적이고 자신만만한 광고 카피를 내건 이 작품은 리로디드(재장전)이라는 말 그대로 4년이 지나서도 매트릭스라는 제목이 가진 위상에 걸맞기 위한 모든 요소를 재장전하고 돌아왔다. 현란한 특수효과로 연출해낸 박진감 넘치는 액션씬, 여러 사상들을 버무려서 만들어낸 전편의 철학을 이어받는데 그치지 않고 '한 차원 높이기'를 시도한 이야기 구조..
전작에서 특수 효과로 물체의 상대적인 운동 속도를 표현해내어 액션씬의 신기원을 이루며 무수히 많은 패러디를 낳게 했던 매트릭스식 액션은 이번에는 진일보해 더욱더 세련되고 긴박감 넘치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100명의 스미스 요원과 싸우는 장면이나 후반부의 고속도로 격투장면은 지금까지 나왔던 어느 액션 영화보다도 화려하다.
분명 1편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고 2편 자체만 본다면 리로디드는 엄청나게 잘 만든 헐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사람들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블록버스터였기 때문이 아니다.

 장자의 호접몽에서 모티브를 따온 세계관과 진지한 철학적 명제들이 세련되게 어우러진 이야기 구조 그리고 그런한 문제들을 단순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사색과정을 보여주는 감독의 내공이 매트릭스를 작품영화의 경지까지 올려놓았던 것이다. 사실 리로디드에서의 새로운 철학의 깊이는 1편의 그것에 비교해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야기 구조로 일관성과 완결성이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화려한 액션, 장엄한 음악과 함께 연출되는 2편의 클라이막스는 1편의 마지막에서 네오가 깨달음(구체적으로 사랑)을 통해 매트릭스 세상의 본질을 깨닫고 예언 속의 구원자로 거듭나는 장면 만한 강렬함이 없다.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가 대대적으로 '올해는 매트릭스의 해'라고 광고하고 있듯이 올해에 나왔거나 나올 예정에 있는 매트릭스와 관련된 컨텐츠만도 4개나 된다. 이번에 개봉된 리로디드 말고도 매트릭스의 확장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애니매트릭스> , 영화에서의 나오지 않는 장면을 포함한 게임<엔터 더 매트릭스> , 그리고 올해 11월에 개봉 될 <매트릭스 3 레볼루션>까지. 이처럼 시리즈의 복잡다단한 상호 연관성은 리로디드만을 독립된 하나의 영화로 보고 평가하기가 모호하게 만든다. 앞으로 나올 레볼루션이 2편에서 보여준 이야기의 애매함을 깔끔하게 완결시켜주기를 바래본다.

 

 

 

 

성주

             불교의 보시(布施)사상과 사회복지
                                                       -성주-
Ⅰ. 서론
Ⅱ. 개념정의
Ⅲ. 불교사회복지사상과 실천방법
Ⅳ. 불교사회복지사상과 실천의 경전적 근거
 (1) 자비사상
 (2) 복전복리사상(福田福利思想)
 (3) 보시사상(布施思想)
Ⅴ. 결론

 Ⅴ. 결론

 불교사회복지의 체계화를 위해서는 복지의 개념정리와 불교의 특성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는데, 불교의 자비관이 복지사상을 뒷받침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앞으로의 복지실천에서는 종래의 불교 복지론을 극복하고 현대사회에 적용될 수 있도록 사회과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 불교사회복지의 개념과 특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즉 복지란 사회이념으로 진정한 복지의 추구는 정신적, 신체적, 물질적으로 충족한 상태를 가리키므로 그 사회의 경제나 정치제도의 개선에 따른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떠나서 복지의 증진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제기된다.
 경전별로 불교의 복지적 성향을 뽑아, 연기관(緣起觀)을 바탕으로 한 자비, 보시, 복전(福田), 보살, 생명존중사상 등을 들고 있는데, 불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회복지학자들에 의해 진행됨으로써 깊이가 없고 체계적이지 못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불교 사회복지사상에 대하여 심도있고 체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불교학에서 자체적으로 실천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불교의 복지사상을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과도 연계되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 회입니다.)

 

 

 

 어느 봄날

이재란

  남편과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침.  마치 뱀이 허물 벗듯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들과 수북이 쌓인 그릇들 부지런히 빨래며 설거지를 끝내고 또 다른 나를 준비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는 보온병에 담고 얼음 알갱이 가득 넣은 물병도 챙기고 얼굴 그을세라 토닥토닥 썬 크림도 바르고 수건과 모자 마지막으로 목긴 빨간 장화를 신고 나의 보금자리 찾아 길을 나선다.
 바지런한 시골 아낙네들이 무던히 밟아서 반질반질 윤기 나는 오솔길 따라 산에 오른다. 갓난아이 함박웃음같이 환하게 피어 마을 뒷동산에 꽃 바다를 이루었던 안곰삭 이씨 아저씨네 매화 밭은 토실토실한 초록열매를 가득 품고서 오늘내일 해산 날만 기다리고 있다.
굽이진 비탈길을 오르니 새파란 마늘 밭이 날 반긴다.  뒷집 딸 부잣집 김씨네 마늘 밭이다. 올해 늦둥이 아들 녀석이 장학금 받고 대학 갔다며 싱글벙글 하시더니 저토록 튼실한 마늘 밭은 언제 일구셨을까?
 “안녕 하세요?” 산비탈 감나무 밭엔 작은 별땡에 사시는 전씨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구슬땀을 흘리며 약을 하고 계신다.  “응 고사리 끊으러 간갑네?” 언제나 뚝배기처럼 정겨우신 아주머니께서 연신 감나무를 향해 있는 분무기 끝을 바라보시며 한마디 건넨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한 아랫마을 김영감님 묘지 위엔 금빛 햇살이 내려와 반짝거리고 가지런히 돌담으로 쌓인 밭 둑길 따라 올라가면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고 포근한 나의 보금자리가 있다.  언제나 푸른 솔 향기와 박하처럼 상큼한 바람을 선물해주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있다.
 오늘은 어디서 날아 왔는지 이름 모를 산새도 찾아와서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귀여운 도룡뇽은 풀 속으로 몸을 숨기고 언제 열매를 맺었는지 산 딸기는 붉은 빛이 감돌고 하얀 찔레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그 진한 향기가 내 머리 속을 헤집는다.  오늘도 난 소나무 아래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다.

 

 

 

 육조단경(六祖壇經)

진선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중국 당(唐)나라 혜능(惠能, 638∼713)스님의 말씀을 묶은 것으로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근본이 되는 선서(禪書)이다.
 혜능스님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 6 조로서 신수(神秀)스님과 더불어 제 5조 홍인스님 문하의 2대 선사로 전해온다. 흔히 신수스님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계통을 북종선(北宗禪 頓悟漸修), 혜능스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계통을 남종선(南宗禪 頓悟頓修)이라고 하는데,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은 모두 혜능스님의 남종선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면 제 5조 홍인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인정받고 의발(衣鉢)
*을 물려받은 과정을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행유품(行由品) 가운데, 선사행유득법사의(禪師行由得法事意)를 밝힌 할애출가참예황매(割愛出家參詣黃梅) 조를 통해 간략히 알아보자.

  "혜능(惠能)스님은 어느 날 저자거리에서 <금강경(金剛經)> 구절을 처음 듣고서도 마음이 활짝 열렸다. "무슨 경입니까?”, “이것은 <금강경(金剛經)>입니다.”, “어디서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까?", "황매현(黃梅縣) 동선사(東禪寺)에, 제 5조 홍인(弘忍) 대사께서 설법하고 계십니다." 이에 혜능(惠能)스님은 황매산에 이르러 오조 홍인스님께 예배하였다. 그러자 오조 홍인 스님은 혜능스님의 마음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그대는 어디서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물었다. 이에 혜능스님은 “신주(新州)에서 왔는데 깨달음을 구하려고 합니다.”, “너는 영남 사람이고 또 오랑캐라서. 불성(佛性)*이 없다.”, “사람에겐 비록 남북이 있겠지만, 불성(佛性)에는 남북이 없는 줄 압니다.” 이에 오조 홍인스님께서 그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는 “저 오랑캐의 근성이 너무 날카롭구나, 너는 다시 말하지 말고 방앗간으로 가라."

하며 혜능스님의 능력(根基 근기)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우리가 사찰 벽화에서 흔히 보는 다음의 그림이 바로 혜능스님께서 방아를 찧으며 공부하는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오조 홍인스님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 5조인 홍인스님은 의발을 물려 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송을 지어 오라고 한다. 먼저 신수스님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神秀頌-)

이에 혜능스님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끼리요"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慧能頌-)

라는 게송을 지어 불교의 이치를 터득했음을 보이자, 제 5조 홍인스님으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아 제 6조가 되었다. 여러분은 위 두 게송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의발(衣鉢)이란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란 뜻인데, 그 의미는 법을 전수하는 것을 상징한다. 특히 선종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수하는 것은 스승의 법맥을 제자가 이어받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 불성(佛性)이란 깨달을 수 있는 능력

 

 

 

 말레이시아(Malaysia)와 싱가폴(Singapore)

장남지

 일주일동안 싱가폴을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아주 기억에 남는 장소가 두 곳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중의 한 곳인 싱가폴의 대표적인 동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싱가폴 주로지컬 가든(singapore zoological garden)에 갔던 이야기를 해드릴까 합니다.

 

 사실 혼자하는 여행이고 처음이었던 터라 낯선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지는 못했지만, 즐겁고 유익했던 곳으로 기억되는데요. 그냥 단순한 우리나라의 서울대공원을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처음에 이 곳을 구경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하루 종일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동물들을 제대로 다 보지 못하고 나올 정도로 아주 넓고 볼거리도 풍부했습니다.

 우선 동물원 내에서 약 1600원 정도면, 작은 트레일을 네 번을 탈 수 있는 표를 살 수 있어서 넓은 곳임에도 보고 싶은 곳이나 먹이를 주는 시간에도 급하지 않게 즐길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이 동물원의 가장 좋았던 점이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원은 갇혀진 철창살(이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나요..)에서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관람밖에는 할 수 없지만, 이곳은 동물이 사는 공간의 개념을 넓혀 그 공간에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동물들과 친해지면서 더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사파리 여행처럼요.

 물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동물들은 지나올 수 없게끔 깊은 물을 끼고 있다든지 해서 동물들과 관람객을 동시에 배려하는 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잘 모르는 여러 동물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가까이서 먹이를 먹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 동물원에도 많이 일반화된 먹이 주는 시간을 공개해서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먹이시간 이외에도 물개나 다른 동물들은 미니쇼도 준비되어 있어서 정말 재미있는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물개 쇼를 구경하고 나서 물개의 뽀뽀를 받아봤는데 사실 그 느낌보다 물개의 냄새가 아주 지독하더라구요

 그리고 코끼리나 망아지같이 사람이 탈 수 있는 동물들은 정해진 시간에 가서 얼마의 돈을 지불하면, 한 번 타볼 수도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트레일 길을 따라 쭉 내려오는데 동물원의 끝을 경계로 펼쳐진 아주 큰 호수가 있었습니다. 한적하기도 했지만 휴양림에 온 것 같이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소나기를 대비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들을 여기저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매체로만 보던 동물들을 보며 신기해 한참을 쳐다보기도 했고 처음 보는 동물들과 함께 있을 땐 동물들의 작은 움직임에도 연신 신기해 하면서 "와아~"했을 정도니까요.
 시간이 부족해서 더 많은 곳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싱가폴에서의 이런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 군대 간 사건

최형란

 몇 년 전 난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녕"하며 인사하던 친구가 군대를 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거 이상하다. 오늘은 4월1일 만우절도 아닌데 누가 그런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하지만 며칠 후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너무나 당황했다. 아무튼 그 날 세상에 태어나 세 번째로 간이 콩알만 해진 날이다.
 때는 1995년 한참 멋 내고 미팅 나가 콧날 세울 때, 내 친구는 군대에서 한 달 동안 교육받으며, 엄청나게 고생했단다. 그 친구하는 말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텐데" 하면서 별 보며 울었단다. 저녁 내내...^^
 우리엄마께서 날 가지기 전에 꾸었던 태몽에 의하면, "삼신 할머니가 양쪽 손에 예쁜 여자 아이를 데리고 우리집 골목으로 걸어오시더니만 넌 우리집으로, 그 친구는 옆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와 내 친구는 전생에서부터 대단한 인연을 가지고 그렇게 태어났는가 보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난 어릴 적에 같은 여자끼리 친하게 지내기 보다는, 남자 아이들과 노는걸 더 좋아했다. 같은 여자지만, 여자 애들은 다 시시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남매는 오남일녀이다. 그러다 보니 오빠가 무려 다섯 명이나 된다. 그 밑에서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더 강한 여자가 되어야만 했었다. 그리고 난 힘도 셌다. 그것은 아마도 어릴 적에 잘 먹은 모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할아버지는 계속 손자만 보다가 손녀를 얻자,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 채, 흑 염소 한 마리로 우리엄마를 기쁘게 만들었다고 한다.
 군대에 간 내 친구 민(가명)은 인물이 너무 좋다. 중학교 때도 남자들이 한 두 놈 아니라 여러 놈들이 따라 다녔다. 그 때 내 자존심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들 생각해보세요. 같은 이웃에 살면서 그 친구는 귀찮을 정도로 날마다 남자 애들이 따라 다녔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기분은 어떠했을런지. 난 그때 나한테 무심한 사내 녀석들이 미웠다. 그리곤 집에 와서 거울을 수십번씩 보며 타는 속을 조용히 삭혔어야만 했다. 아아~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그 친구를 따라 다니던 남자 애 중에 쪼금 어디가 빈 녀석이라도, 한번만 나한테 눈길을 줬더라면, 난 이렇게 살지 않았을텐데...결국 우리는 라이벌관계로 변해갔다. 그래서 보고도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질투가 많아서 그랬나 보다. 그렇게 우린 사춘기를 보냈다.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살아갔다. 눈에 안보이는 동안 난 그 친구가 많이 생각났다. 그리고 95년도에 군대 가서 그 친구는 엄청 오랫동안 사회와 단절된 공간에서 자기자신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간 것이다. 그리고 2001년 그녀가 제대했다는 소식을 들고서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알고 싶어 만나기로 했다.
 난 화장술이 뛰어나다. 내 조카가 하는 말 "우리 고모는 다 화장빨이야"  난 그래도 그 소리 듣기 좋아 한다. 그것마저 없다면, 아마 사는 낙이 없을지 모르니까.^^
 우린 오랜만에 만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친구 쌍커플도 더 커진 모습이 어찌나 이뻐 보이던지  아무튼 예쁜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가 없는가 보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집에 와서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다음날  난 결국 성형외과에 갔다. 원장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제 눈에 지방 좀 빼고 싶고, 보조개 수술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의사 왈 "아가씨 눈은 지방 아니라 근육이요. 그리고 보조개 수술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는데요" 하였더니 "웃지 않아도 보조개가 들어가는 바람에 하지 않습니다." 이 말 듣고 전 무척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원장선생님 덧 붙여 하는 말 "아가씨는 별로 고칠 때가 없어요." 이 말을 듣고 난  무척 행복했다. 그러나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 해보니 "아마 내 얼굴에 엄청난 견적이 나올 것 같아 그렇게 애기 한 것이 아닌가"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늦게나마 이런 사실을 깨달아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난 공주병 말기에 걸려 세상을 살아가야 했을지 모르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친구야 넌 좋겠다. 그렇게 이뻐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걱정된다.(하하하)

 

 

 

 불교수행은 기초와 기본에 충실한 것

덕선

 옛날 저의 별명을 친구들이 '칠삼'이라고 불렀는데 왜 칠삼이라고 했는지 혹 알 수 있겠어요? 아이큐가 7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아이큐가 73인 스님한테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앞으로 스님에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실수를 많이 할 텐데 미리 말씀을 드려야 이해를 잘 해주시리라 생각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까 그렇게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저 유명한 바보 주리반특가 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저는 출가해서 가끔 스님들께 주리반특가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꼭 내 얘기 같아서 눈물이 나곤 했습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외워야 하는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외우는 것이 수행의 전부가 아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외워야 할 것을 외우지 못하다 보니 늘 바보소리를 듣곤 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머리가 나빴느냐 하면 부처님께서 “비로 마당을 쓸어라” 하고 말하시는데 '비'를 말하면 “쓸다”를 잊어버리고 “쓸다”를 말하면 '비'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머리가 안 좋다 보니 같이 출가했던 주리반특가의 형이 창피하다 못해 어느 날 결심을 하고 “넌 머리가 안 좋아서 더 이상 공부를 해도 시간만 버릴 뿐이다. 그러니 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하면서 그만 정사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정사 입구에서 울면서 앉아 있을 때 부처님이 보시고는 왜 울고 있느냐? 물으시니까 이러저러 해서 그렇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듣으신 부처님께서는 “머리가 나쁘다고 수행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너를 쫓아내는 일은 없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해서 그때부터 주리반특가에게는 특별히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늘 마당만 쓸게 했다고 합니다.
 주리반특가는 늘 마당을 쓸면서 "부처님께서 왜 마당을 쓸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수행을 하다가 결국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머리가 그렇게 안 좋은 주리반특가가 그 어려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모순이 되지 않는 이유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똑똑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똑똑하다". 혹은" 지혜롭다." 라고 말을 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똑똑한 것과 지혜로운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머리가 좋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매사에 머리가 빠르고 공부도 잘 하고 능력을 인정받고 하는 것이 다 똑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서울대나 연, 고대를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일단 똑똑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럼 서울대나 연, 고대를 졸업하고 나서 출가한 많은 수재들이 있는데, 왜 깨달음을 얻어서 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많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머리가 좋다거나 혹은 불교에 대한 많은 지식의 축적이 곧 지혜의 성장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럼 지혜의 성장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좀더 바른 조건은 무엇이냐? 그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움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조건은 똑똑한 것이 아닌 지혜인 것입니다. 그럼 똑똑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

 

 

 

 

 멀리 있는 벗에게

 이은옥

  보내준 책이 어제야 도착했다고?  열흘정도 걸린다더니 그러나 잘 받아보았다니 안심된다. 별것 아닐 수도 있겠으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서로가 기쁨이 될 것 같아.
 참, 너의 생일이 언제이더라?  예전에는 알았었는데 하도 오랜 세월이라 잊고 지낸다.  아마 너도 잊었겠지.  불현듯 네 생일을 기억하게 된 것은, 바로 어제일 때문이다.  친해진 딸아이 친구 엄마랑 동네에 있는 아담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거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옛날 우리들의 추억들을 얘기했단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너 또한 오늘 나에게 보내온 메일에서 나와 비슷하게 지난 일들에 대해서 언급했더구나.  이심전심인가?
 생일하면 가슴 벅차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 생일은 음력 5월24일이야. 잘 기억해둬^^양력으로 치면 6월말 아니면 7월초가 된다...하여튼 앵두가 한창 익을 때던가? 왜 너의 집 뒤꼍엔 앵두나무가 두어 그루가 무성하게 있었잖아. 그리고 난 마치 우리 집처럼 너의 집 마당과 뒤뜰에서 알콩달콩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며 놀았었지. 그런데 내 생일쯤 너랑 사이가 좀 안 좋았던 것 같아... 안 그랬니?... 잘 생각나진 않지만 친했던 만큼 서로 잘 삐지기도 했었지 않니?  그러다가  화해하고 나서는 주체하지 못 할 만큼 더 친해지기도 했었고 그지?... 그 날도 우린 좀 서먹할 때이었는데 네가 우리 집에 왔었어.  난 그냥 시큰둥하게 널 대했고.  넌 대문 앞에서 부끄러운 듯이 종이봉지를 하나  휙 내밀고는 막 뛰어가더구나. 얼떨결에 받아서 열어보니 그 속엔 빨갛게 농익은 앵두가 한 가득 들어있었지... 가장자리는 조금 터진 것도 보이고...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나 역시나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 너의 마음을 그동안 헤아리지 못한 것이 말이다. 그 안엔 덤으로 산수공책인가 연필인가 하나 더 있었지...기억하는지....그때 내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세상을 얻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아마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거라고 내심 각오했었던 것 같아.  그러나 나는 너에게 그만큼 추억이 떠오르게 해 준 것이 없는 것 같아.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는걸 보면... 그저 잘난 척만 하고 지냈었던 같아.  아무튼 그때 받은 생일선물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있다는 것을 넌 모르겠지?
 이제는 어언 30여 년이 지난 세월이라지만 아직도 너무나 생생해서 잊혀지지 않는 부분 부분이 이렇게 우리의 감성을 가끔씩 흔들어 놓는다니 놀랍지 않니?  더불어 기쁘고 즐거운 일만 추억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더 여유롭고 풍요로워지겠지. 사무실의 인터넷이 고장 나는 바람에 모처럼 한가하게 집에 일찍 올 수 있었다. 딸아이 미술학원 가기 전에 김치부침개 해서 먹이고 거기다 덤으로 이렇게 너에게 답장 메일까지 쓸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네 말대로 메일이 참 좋긴 한데 아쉬움이 항상 많이 남는다. 좀 차근차근 내 속에 있는 부스러기들을 모아 모아서 맛있게  전달하고 싶은데 의욕이 넘치다보니 뜻대로  안 써지고...모든 일은 다 템포가 있는 법이란 걸 문득 깨닫게 된다. 조금씩 걷다보면 정상에 다다르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 세월과 거리의 공백은 차츰차츰 가까워지겠지?  그래선지 요즈음 자주 옛날 생각이 나고 그 속에는 항상 네가 자리하고 있단다.  어릴 적 생글거리던 너의 모습과 얼마 전 본 요염(?)하고 매력 있는 다정한 여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책 재미있게 읽어보고 서로 얘기 나눠보자. 또 소식 전할께.  안녕!
멀리서 친구가.

 

 

 

 서울 북촌

도난주

 이번 호에는 북촌개발의 한 방향으로 관광개발코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북촌 개발을 위해서 서울시의 노력 가운데 하나인 북촌 탐방로 개발은 북촌의 전통 한옥지구내에 있는 여러 문화재와 대표적 전통한옥들을 개방하여 게스트 하우스나 여러 전통연구소로 이용하고 그곳을 관광할 수 있도록 코스를 지정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번 북촌 탐방로 개발에서 특이한점은 '스페이스 신텍스'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길을 미리 예측하고 가장 합리적인 경로를 선정하여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면 스페이스 신텍스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스페이스 신텍스는 영국의 도시계획가인 빌힐러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론 및 프로그램으로 처음엔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공간이 어떤 곳일까? 연구를 하다가 사람의 시선이 적고 시선의 폭이 좁으며, 도로가 없는 곳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그러한 이론의 발견은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공간뿐만이 아니라, 상업시설이 배열되어 있는 특징이나 청소년 유해시설이 배열되어 있는 특징 등  공간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이스 신텍스 방법으로 분석을 하는 방법은 먼저 길을 따로 그리게 됩니다. 이후의 방법은 복잡하여서 현재는 컴퓨터가 자동으로 계산하여 지도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붉은 색에서 파란 색으로 점점 변화하는데, 붉은 색으로 표시되는 부분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고 넓은 길이며,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면 북촌의 지도를 분석한 것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점선으로 표시된 것이 탐방 계획로입니다. 재동초등학교 옆의 길을 중심으로 가회동과 계동으로 나누어지며, 그 길을 중심으로 정독시립도서관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계획되었습니다. 처음 북촌지역으로의 접근은 종로로부터 우정국로를 통하여 접근하는 방법과 경복궁 방향의 동십자각과 창덕궁 방향의 돈화문을 통해 율곡로로 접근하는 방법이 공간 구조상 가장 유리하다고 분석되어 졌습니다.

 

 

受持
讀誦

 

 백유경

편집부

 

百喩經卷第一                                                                      尊者僧伽斯那撰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愚人食鹽喩 愚人集牛乳喩 以梨打破頭喩 婦詐語稱死喩 渴見水喩 子死欲停置家中喩 認人爲兄喩 山羌偸官庫喩 
歎父德行喩 三重樓喩 婆羅門殺子喩 煮黑石蜜漿喩 說人喜瞋喩 殺商主祀天喩 醫與王女藥令卒長大喩 灌甘蔗喩 債半錢喩 就樓磨刀喩 乘船失釪喩 人說王縱暴喩 婦女欲更求子喩

(九)歎父德行喩
昔時有人於衆人中。歎己父德而作是言。我父慈仁不害不盜。直作實語兼行布施。時有愚人聞其此語便作是念言。我父德行復過汝父。諸人問言。有何德行請道其事。愚人答曰。我父小來斷絶?欲初無染汚。衆人語言若斷?欲云何生汝。深爲時人之所怪笑。猶如世間無智之流。欲讚人德不識其實。反致毁?如彼愚者。意好歎父言成過失此亦如是
 

9. 아들의 자랑
어떤 사람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 아버지의 덕을 찬탄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인자하여 남을 해치지도 않고 남의 재물을 훔치지도 않는다. 또한 말이 진실하고 보시까지 행하신다.” 그때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의 덕행은 네 아버지보다 낫다.”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은 물었다. “어떤 덕행이 있는가 말해 보라.” 그는 대답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음욕을 끊어 조금도 더러움이 없다.” 사람들은 말하였다. “만일 음욕을 끊었다면 어떻게 너를 낳았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이것은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이 덕을 찬탄하려 하나,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도리어 욕되게 하는 것처럼, 저 어리석은 사람도 아버지를 찬탄하려다 오히려 말을 잘못하여 비웃음을 사는 것과 같다.

 

(一○)三重樓喩
往昔之世有富愚人癡無所知。到餘富家見三重樓。高廣嚴麗軒敞疏朗。心生渴仰卽作是念。我有財錢不減於彼。云何頃來而不造作如是之樓。卽喚木匠而問言曰。解作彼家端正舍不。木匠答言。是我所作。卽便語言。今可爲我造樓如彼。是時木匠卽便經地壘?作樓。愚人見其壘?作舍猶懷疑惑不能了知。而問之言。欲作何等。木匠答言。作三重屋。愚人復言。我不欲下二重之屋。先可爲我作最上屋。木匠答言。無有是事。何有不作最下重屋而得造彼第二之屋。不造第二云何得造第三重屋。愚人固言。我今不用下二重屋。必可爲我作最上者。時人聞已便生怪笑。咸作此言。何有不造下第一屋而得上者。譬如世尊四輩弟子。不能精勤修敬三寶。懶惰懈怠欲求道果。而作是言。我今不用餘下三果。唯求得彼阿羅漢果。亦爲時人之所嗤笑。如彼愚者等無有異
 

10. 삼 층 누각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는 미련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다른 부잣집의 3층 누각을 보았는데 높고 넓으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그는 매우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재물은 저 사람보다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왜 이런 누각을 짓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곧 목수를 불러 물었다. “저 집처럼 아름다운 누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목수는 “그것은 내가 지은 집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지금 나를 위해 저런 누각을 지어라.” 목수는 곧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 누각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미련한 부자는 벽돌을 쌓아 집 짓는 과정을 보고는 의혹이 생겨 목수에게 물었다. “어떤 집을 지으려는가.” “3층집을 지으려 합니다.” 목수가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나는 아래 두 층은 필요 없다. 제일 위층만 지어라.” 목수는 대답하였다. “아래층을 짓지 않고 어떻게 둘째 층을 지을 수 있으며, 둘째 층을 짓지 않고 어떻게 셋째 층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그러나 미련한 부자는 고집스럽게 말하였다. “지금 내게는 아래 두 층은 필요 없다. 맨 위층을 먼저 지어라.”그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비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아래층을 짓지 않고 위층을 짓겠는가.” 비유하면 이렇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삼보(三寶 불, 법, 승)를 공경하지 않고, 놀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깨달음을 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아래 세 가지 과(예류과, 일래과, 불환과)는 필요 없고, 오직 아라한 과만을 구하고 싶다"
*. 이와 같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은 저 어리석은 부자와 다름 없다.

 *사향사과(四向四果) 상좌불교에서 구분하는 성자의 네 단계. 향은 수행의 목표, 과는 그 목표에 도달한 경지로 예류(預流) 또는 수다원, 일래(一來) 또는 사다함, 불환(不還) 또는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네 단계에 향과 과를 붙여 4향 4과라고 한다.
사향(四向): 예류향, 일래향, 불환향, 아라한향.
사과(四果):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어 가고 있는 견도 15심(心)의 과정은 예류향, 마침내 견혹을 끊어 제16심인 수도(修道)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은 예류과. 욕계의 수혹(修惑)을 이루는 9품 중 6품까지의 수혹을 끊어 가고 있는 과정은 일래향, 마침내 이 수혹을 모두 끊은 경지는 일래과. 수혹의 나머지 3품을 끊어 가고 있는 과정은 불환향, 이것을 완전히 끊은 경지는 불환과. 이로부터 아라한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아라한향,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라한과. 아라한과를 얻으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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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만 봐도 넉넉한 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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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6월 15일 유두절(流頭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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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유월 보름은 유두일(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았다.'고 하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푸르고, 양기가 가장 왕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 무렵엔 오이, 참외 등 햇것이 나올 때 인데, 잘 익은 것 골라 국수, 떡과 함께 사당에 제사를 드리는  유두천신(流頭薦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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