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6(2002)년 11월호 Vol.2,No.22. Date of Issue 1 Nov ISSN:1599-337X 

 

 

 

 

 

 

 

 

 

 

 

 유위와 무위

범수

 우주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견해 가운데, 앞에서 전변설(轉變說)과 창조설(創造說)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 번호에서는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에 입각한 유위법(有爲法)를 통해 우주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와 같은 분류법은 '동일성을 지니는 자아(영혼)나, 불변의 실체가 있다 내지 있을 것' 또 '절대자 내지 창조가 있다 내지 있을 것' 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불교를 크게 이론적 부분과 실천적 부분으로 나눠 이야기할 때, 보통 실천적 부분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논함으로 해탈론(解脫論)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론적 부분은 실천철학의 근거를 밝힘으로 지혜론(智慧論)이라고 한다. 그것은 올바른 실천에 의한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불교의 교리는 교리나 이론으로 만족하지 않고 올바른 사유를 바탕으로 바른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이론은 실천 곧 깨달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편 타당한 것이라야만 된다. 이 같은 이론 가운데 중심은 당연히 현상계의 전 우주를 관통하는 진리인 '연기론(緣起論)'이지만 여기서는 삼라만상에 대한 불교의 분류법을 살펴보기로 하였기 때문에 체, 상, 용(體相用)의 분류법과 '유위(有爲)'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전 우주에 대한 분석적 방법 가운데 하나인 체, 상, 용(體相用)의 개념을 먼저 살펴보자. 이와 같은 방법은 개별적인 현상이나 사물의 특성을 분류하는데 용이하다.
 일체의 모든 것은 그것만의 특성(特性)이나 특징(特徵)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나하나 따로 논하려면 목숨이 다하더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 성질이나 모양, 그리고 작용에 따른 분류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먼저 체(體)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든지, 그 자체만의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모습을 상(相)이라고 한다. 나머지 용(用)이란 그것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체, 상, 용(體相用)에 의한 분류는 전 우주를 우리의 인식 범위에 넣어 사고(思考)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여기에 쇠로 만들어진 국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여기서 국자의 성질(體)은 쇠이며, 모양(相)은 이러이러한 것, 그리고 쓰임(用)은 그에 합당한 것이다고 살피는 것이 체상용의 분류법이다. 이런 방법은 어떤 존재나 현상에 대하여, 이것이 여러 인연에 의해 생성된 것인지, 인과의 법칙에 속하는 것인지, 조작된 것인지를 살피는 것으로,  그것이 만약 그렇다면 유위법으로 분류한다. 그러면 유위법이란 무엇인지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유위(有爲)란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으로 인연에 의해 생긴 온갖 현상이다. 즉 인연 화합에 의해 조작되어 생멸변화하는 것으로 생(生), 주(住), 이(異), 멸(滅)의 네 가지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번뇌를 초래하게 된다. 그 이유는 번뇌를 유도하고 흥기(興起)케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참고: 동양철학 가운데 자연의 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는 도가(道家)의 무위(無爲)나,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의식적 행위를 말하는 유가(儒家)의 유위(有爲)와는 다름.)
 체상용(體相用)에 의해 분류된 현상계(現象界)의 존재들 가운데 유위법에 속하는 것은 모두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겪게 된다. 즉 어떤 존재나 현상이든지 간에 비록 시간이나 방법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태어나서(生), 안주하다(住). 변이하여(異), 멸망(滅)하는 네 단계를 거치게 된다. 혹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읽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나타나서(生),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는가(滅)', '변화(變化)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를 사유해 보기 바란다.
 현상계는 태어나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다, 변하여 결국에는 사라지고 마는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변화 속에서 무 변화를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치에 반하는 것이 되고 만다. 혹 잘못된 믿음이나 가르침에 의해 동일성의 자아나, 불변의 실체를 찾으려는 이들은 곧 현실의 경험과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 변화를 바라는 욕망과, 변화라는 현실은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올바른 견해로 현상계를 살펴야 하겠지만, 간혹 전통이나 관습 등 여하한 이유에서든지 '불변의 실체나, 동일성의 자아가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와 같은 믿음을 미신(迷信 superstition)이라고 부르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유위법이란 인연에 의해 초래되는 것임으로 그것은 인과(因果) 법칙에 속하게 된다. 인과 법칙이란 말 그대로 원인에 의해 결과가 초래되는 것 즉, 인(因)에 의해 과(果)가 초래되는 변화의 과정임으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변화하는 현상세계 가운데 동일성을 지니는 자아나,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그 최초 원인이나, 그에 의해 파생 내지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그 자체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최초 원인이나 불변의 실체, 동일성의 자아가 다른 것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이든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 또 선행하는 과(果)에 따른 인(因)이든지. 그(因)를 통해 과(果)를 초래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인연성(因緣性)이므로 당연히 변화(생주이멸)가 따른다. 즉 인과의 법칙에 속하는 유위법인 것이다. 따라서 동일성의 자아, 불변의 실체, 창조자, 제일원인(第一原因)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우리는 세상의 진리와 어긋납니다." 하는 말과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현상계는 어떤 원리에 의해 운행되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법인 가운데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모든 것은 부단히 변화하므로, 결코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변화의 이면에 무변화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상계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원리로 나타낸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함으로, 그 가운데 무 변화의 실체란 없다. 그리고 실체가 아니므로 그 자신에 의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미뤄 보면, 영원이나 불변을 표방하는 창조자나 그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한갓 주장에 불과 할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결코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실체적 동일성을 찾으려고 하는 이들은 '신'을 내세워 영원성을 지니는 '실체'나 동일성을 가지는 '불변의 자아(영혼)'를 찾으려고 한다. 이 같은 고집은 대체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구원받기 위해서는 비록 육체가 문드러져 없어지더라도 동일한 자아(영혼)를 유지해야 한다.' 또 '구원받아 가는 곳은 영생(永生 영원한 삶)을 누리는 곳이다.' 는 소박하고도 자기 중심적인 주장과 이를 믿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여러 가지 조건 즉, 여러 인연들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 그 조건이 다하면 흩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에 '영생(永生)'이니 동일성의 '영혼(靈魂)'이니 하는 것은 현실세계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끝으로 불교에서는 애매모호한 형이상학적 논의나 불가지론적 입장, 그리고 창조설과 같은 견해를 취하지 않는다. <본사경(本事經)>에서는 이를 "번뇌를 멸하는 도리에 대하여 내가 설하는 것은 그것이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니라.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은 설하지 않노라."고 하였다.
(다음 호에서는 우주에 대한 분류법 가운데 삼과설을 살펴보겠습니다.)

 

 

 

 창경궁(昌慶宮)

도난주

 스카프를 둘러 한껏 멋을 낸 여학생들, 그리고 노란색 길쭉이 하트를 언제 사정없이 날려 보낼지 모를 은행나무들이 운치를 더하는 가을입니다.
 안녕하세요^^ 지난 10월 가을의 시작이며, 창경궁(昌慶宮)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명전전(明政殿)까지 마무리 한 것을 혹시 아셨나요? 그럼 이번 호에서는 가을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외전의 마무리라 할 수 있는 빈양문까지 답사하려고 합니다.


(
명정전에서 홍화문쪽으로)

명정전을 뒤로 하고 홍화문(弘化門)을 향하여 가운데에 한번 서 볼까요? 신기한 것이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축이란 것인데, 홍화문과 명정문, 명정전의 축이 한번 꺾이게 되어 홍화문의 3간과 명정문의 3간이 서로 아귀가 맞지 않게 보입니다. 혹 기회가 되시면 명정전과 명정문 사이에 서서 홍화문을 한 번 바라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럼 다시 뒤돌아서 명정전을 둘러보겠습니다.

 명정전은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시 임금이 계시던 곳입니다. 어좌御座가 마련되어 있어 임금이 앉아 계셨습니다. 이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라는 그림(해와 달은 임금과 왕비를 나타내며, 소나무는 장수를 상징)이 있고 천장에는 용의 조각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닥이 '전돌'(정사각형의 검은색 돌)로 깔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지금의 장판과 같은 기능을 하는 바닥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레는 모두 전통 빗살로 된 나무 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문은 손으로 직접 만든 빗살들을 짜 맞춘 것으로 햇살이 창을 빛 출 때 연꽃 모양을 보여줍니다. 그럼 상상해 볼까요? 행사가 있는 오후, 햇살이 비치면 임금의 어좌까지 빛이 들어오게 되겠죠. 밖에서 보면 모든 빛들이 갈색으로 보여 연꽃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죠^^


(명정전 내부 일월오봉도)


(명정전 내부 천장)


(명정전 내부 전체)


(빗살문)

그럼 이제 문정전으로 가 볼까요? 문정전으로 가는 길, 명정전의 사각 귀퉁이인 이곳에 청동으로 만든 큰 물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드므'라고 하는데 순수한 우리 말로 '둥근 큰 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궁궐 입장객들이 쓰레기통으로 착각하여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투명한 플라스틱 판으로 덮어두었습니다.

 '드므'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궁궐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건물이 연결되어 있으며, 재료가 나무라는 것이죠. 이 특징의 가장 큰 단점을 화재시 한 순간에 타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화재가 많았을 때 큰 고민이 되었겠죠^^ 그래서 방지책의 하나로 큰 항아리를 건물에 두어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불조심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였답니다. (드므)

 이제 드므를 지나 문정전으로 들어섭니다. 문정전 앞은 횡한 느낌이 들만큼 건물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건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일제 시대에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만들면서 조금씩 궁궐을 파괴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가 함께 사라져 버렸답니다.

 문정전은 임금과 신하가 정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장소입니다. 지금은 복원하여 단청이며, 어좌 등을 모두 화려하게 꾸며 두었습니다. 그러면 문정전을 지나 외전의 마지막 건물인 숭문당(崇文堂)으로 가보겠습니다.
(문정전)

숭문당은 글자에서 느껴지듯 학문을 숭상하던 곳입니다. 유학자들과 임금이 서로 토론하며, 공부하던 곳이어서 그런지 검소한 분위기가 나는데 단색의 단청은 한층 더 그런 느낌이 들도록 하고 있습니다.
(숭문당)


외전으로 통하는 관문 빈양문이 있습니다. 빈양문은 숭문당 오른쪽에 위치해 있으며, 외전의 중심에 있습니다.
 너무나 숨가쁘게 진행된 것 같아서 다음 한 달 간의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2월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여러분과 함께 내전을 답사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빈양문)

 

 

 

 

성주

불교에서 본 인간이란 무엇인가

                                                    -性珠-
Ⅰ.서론
Ⅱ. 석존의 출가 동기와 수행 및 깨달음
Ⅲ. 최초의 설법과 전도의 선언
Ⅳ. 초기 불교의 교육학적 인간관
  1.「苦」의 정의
  2. 불교의 인간관
  3. 고(苦)의 해결
  4.「苦」의 해결에 있어서의 불교적 특징
Ⅴ. 인간이해, 왜 중요한가?
  1.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2.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
  3. 죽음의 실상과 올바른 수행
Ⅵ. 불교의 인간 이해
Ⅶ. 현대적 의의
Ⅷ. 결론

Ⅲ. 최초의 설법과 전도의 선언
 이제 한 인간(人間) 싯다르타는 깨달은 사람, 즉 불타가 되었다. 불타는 한 동안 깨달음의 법열에 잠기면서도,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중생들에게 깨우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중생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자칫 헛수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었다. 차라리 나 혼자 자증(自證)의 법열을 즐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
 초기 경전은, 범천(梵天)이 불타의 이러한 생각을 알고, “세존이시여, 마음을 돌리시어 중생들에게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렇지 않으시면, 태어나면서부터 물듦이 적은 사람도 그냥 죽고 말 것이 아닙니까.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법을 설 하소서.” 하면서 세 차례나 권하였다 한다. 이러한 권청(勸請)을 계기로 석존은 자신이 깨달은 법을 중생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타(佛陀)는 한때 도반이었던 콘다냐 등 5人의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먼 길을 가, 이들에게 역사적인 최초의 설법을 한다. 이 때의 설법은 주로 중도(中道), 연기법(緣起法),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등의 가르침이다. 그 가운데서도 맨 처음의 가르침은 중도와 연기법 및 사성제이다.
 여기에서 중도(中道)는 모든 극단을 버리는 것이다. 이 중도는, 현악기의 연주에서 악기의 줄을 너무 세게 조이거나 너무 느슨하게 하면 바른 소리가 나지 않는 바, 너무 세지도 않고 또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상태가 중도의 상태이며, 이는 바로 가장 바른 상태라고 초기 경전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중도는 균형과 조화의 중심점으로 가장 바른 상태의 길, 즉 정도(正道)를 의미한다.
 연기법(緣起法)이란 모든 것이 상호관계 속에서 생성과 지속 그리고 소멸이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며〔제행무상諸行無常〕. ② 그 어떤 것도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제법무아諸法無我〕. ③ 그러므로, 인간의 현실은 모두 괴로움이라고 한다〔일체개고一切皆苦〕. 이 세 가지가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이다.  이 가운데 ③ 인간의 현실은 모두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불변하고 영원한 실체이기를 바라나 사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불변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데에 인간의 본질적인 괴로움이 야기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나와 너 및 그것이 서로 다른 독립된 실체로 착각하여 각자 자기 중심적인 사고 속에서 탐욕과 분노 및 어리석음 등 번뇌에 속박되어 괴로움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번뇌를 제거한 열반만이 진정한 평화이고 해탈이라고 한다〔열반적정涅槃寂靜〕.
 한편, 최초의 설법에서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거듭 되풀이하여 가르치고 있다. 이 사성제는 ① 인생의 현실은 괴로움이다〔고성제苦聖諦〕. ② 괴로움의 원인은 번뇌의 집합에 의한 것이다〔집성제集聖諦〕. ③ 모든 번뇌가 소멸되면 열반의 평화와 해탈의 자유가 실현된다〔멸성제滅聖諦〕. ④ 번뇌를 소멸하여 열반과 해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실천해야 한다〔도성제道聖諦〕의 네 가지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여덟 가지 바른 길, 즉 팔정도(八正道)는 ① 견해 ② 사유(思惟), ③ 언어 ④ 행위 ⑤ 생활 ⑥ 노력 ⑦ 정신적 조견 ⑧ 정신적 집중을 바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앞에서 중도는 정도라고 했거니와, 이 팔정도는 팔중도라고도 한다. 그리고 연기법의 구체적인 실천은 바로 이 팔정도이기도 하다. 불타는 사성제를 거듭 되풀이하는 가운데, 이 사성제를 가장 훌륭한 의사의 의료 행위에 비유하여 깨우치고 있다.
즉, ① 고성제=병의 증상에 대한 진찰 ② 집성제=병의 원인 진단 ③ 멸성제=치료의 목표 설정 ④ 도성제=치료를 위한 처방이라고 한다. 불타의 이러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콘다냐 등 5인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이루어 성자가 된다. 그리고 부호의 아들 야사와, 그의 여러 친구들이 불타에 출가 귀의하여 모두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가 된다. 그리하여 불타와 60인의 제자에 의한 성자 공동체가 형성된다. 불타는 이를 계기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전도의 선언을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하늘과 사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하늘과 사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간을 가엾게 여기고 사람과 하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유행(遊行)하여라. 하나의 길을 둘이서 함께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아름답고 중간도 아름다우며 마지막도 아름답게, 의미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며, 모두 원만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 태어나면서부터 더러움이 적더라도 법을 듣지 못하고 죽는 중생도 있다. 그들은 법을 잘 알 수 있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장군촌으로 가리라.”

Ⅳ. 초기 불교의 교육학적 인간관

  앞에서 살펴본 바 있거니와,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중도, 연기법, 삼법인, 사성제 등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불타가 깨달았다고 하는 연기법은 모든 것이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가르침으로, 이 가르침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에만 집착하여 절대화하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니라고 한다. 불타는 극단적인 사고를 벗어나 중도에서 깨달았다고 초기설법에서 선언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교육이란 바람직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교육학적 인간관에서는 일방적이고 극단적인 사고를 벗어나 조화를 실현하는 인간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본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의 가르침은, 영원 불변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되겠으나 교육학적인 관점에서는 희망의 복음이기도 하다. 왜일까. 만약 인간 각자가 불변의 존재라면 성장이나 발전 또는 보다 바람직한 변화나 변모가 불가능한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의 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불타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는 보통 명사이다. 누구나 깨달으면 다 불타이다. 불타가 되면 깨달음을 통해 지혜가 충만하고, 이 지혜에 의한 진정한 자비를 구현하게 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스스로 깨닫는 주체적인 인격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 불교의 교육적 인간상은 깨달음을 통해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주체적인 인간이다. 불타의 최초 설법이나 전도 선언은, 각자 깨달음을 통해 이러한 인간이 되어 괴로움에서 해탈하도록 하기 위한 자비심에서였다. 자비심이 밑받침되지 않은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교육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불타의 전도 선언에 의하면, 교육은 인간 그리고 하늘로 대표되는 우주 전체와 관련된 일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교육 또한 인간의 일일뿐만 아니라, 인간이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는 자연 내지 우주와의 상호작용과 관련되고 있다. 교육의 근본적인 방향은 각자 스스로 행복한 삶을 구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모두 아름답게 해야 한다. 여기에서 아름다움은 선이며 진실이기도 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도 있다. 그리고 의미와 표현을 상대방에게 알맞도록 잘 갖추어 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원만하고 청정한 실천적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성제는 의료 행위의 절차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상담이나 학교에서의 수업의 절차와도 원리적으로 일치한다.
 더욱이 최초 설법이나 전도 선언에 의하면, 아무리 타고나면서부터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깨닫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선언은, 초기 불교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교육적인 존재라는 관점, 즉 교육학적 인간관을 뚜렷하게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1.「고苦」의 정의
 불타(佛陀)는「고苦」란 무엇인가? 하는 「고苦」의 문제에 대해, 추상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구체적으로 무엇이「고苦」인가를 밝혔다.
 베나레스(Benares;녹야원(鹿野苑))에서 행한 불타 최초의 설법을 들어보면「형제여, 고(苦)에 관한 성제(聖諦)는 이러하니 생(生)이 고(苦)요, 싫은 것과 결합되는 것이 고(苦)요, 만족치 못한 모든 욕구가 고(苦)로다」하는 식이다.
  이밖에도 「고苦」의 현상은 복잡한 여러 요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고苦」의 정의를 내린다고 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고苦」라고 할 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혹 사회적이든 간에 "괴로운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한다. 

2. 불교의 인간관
  불교에서는 인간은 과거의 혹(惑), 업(業;karma)에 근거한 인연(因緣) 때문에 윤회(輪回;Samsara)되어 세상에 태어나며, 그 인간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영원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 영원한 존재의 주체는 마음(心)이다. 그런데, 그 마음조차 흐려져 있다. 따라서 인간 현존재(現存在)는「고」를 받는다고 말한다.
 업(業)이란 인간 의지의 동작과 언어나 행위의 결과 및 그 세력을 총괄한 것으로 윤회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현실적 인간이 받는 「고」를 과거에서만 찾으려 하지는 않는다. <대승열반경(大乘涅槃경)> 교진여품(橋陳如品)에는"그대는 과거의 업이 저절로 다함으로써 괴로움도 다한다고 설하나, 나는 번뇌가 다하면 업고(業苦)도 다한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의 과거업(過去業)에 집착하는 견해를 책한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즉 업을 과거에만 중점을 둔 숙명론적인 사실로 이해하는 자들을 숙작외도(宿作外道)라고 배척하며, 현재로 부터 미래를 향해 현실을 타개해가는 원동력으로서의 업을 본래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Hetu-Partyaya)에 있어서, 인(因)은 원인의 의미로 해석되며 연(緣)은 조건의 뜻으로 얘기된다. 한 사물이나 사건은 근본 원인과 그 원인을 돕는 조건으로 성립 형성된다. 따라서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계 제법(諸法)의 상의상존(相依相存)관계를 말한다. 즉 연기설(緣起說)은 시간적 또는 공간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유무(有無), 생멸(生滅)의 모든 현상이 야기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얘기한 업사상(業思想)과 인연과(因緣觀)을 볼 때, 불교에서는 인간 현존재의 상태를 실존적으로 보는 듯이도 보인다.
  불교는 유심론(唯心論)이며, 유식론(唯識論)이다. 불교는 심식(心識)의 종교요, 심식의 철학이다. 그래서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다(心爲法本)」라고 말하며,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에서도 "세간은 마음에 의하여 인도되고, 마음에 의해 어지러워지나니, 마음 하나가 모든 것을 종속시키느니라"라고 설하고 있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사물(世俗的, 世上的)과 관념(超越的, 出世間的)등이 그 존재이유를 갖는다.
  신체가 생기게 한 동력은 업이요, 이 신체를 부리는 것이 심식(心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심식이 없어지면 신체는 괴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곧, 일체유심조 삼계유일심(一切唯心造 三界唯一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주장과 맹목과 윤회에 속박되어 있고, 마음은 동요가 있어 고통이 있는 것이다. 또, 공(空;Sunyata)사상에서 보더라도 공은 객관 세계에 있는 실재가 아니라 주관 세계의 관념을 공으로 하는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Nirvana)도 어떤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3. 고(苦)의 해결 
불교에서의 「고苦」의 해결이란 그것의 극복 소멸 내지는 해탈(解脫)을 일컫는 것이다. 즉  "괴로움을 알고(고제苦諦), 괴로음이 일어남을 알며(집제集諦), 괴로음이 소멸되는 저 길(도제道諦)을 아는 자들, 그들은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이루어 윤회를 종결시킬 수 있나니, 그들은 속된 삶과 노쇠함을 누리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불교에서「고苦」의 극복은 그 원인의 제거에 있다고 본다. 근본무지(根本無知)로 말미암아 맹목적인 어두운 행동을 일으키고, 어두운 행동에서 정신작용 등 여러 가지 현상이 벌어져서 생, 노, 병, 사 따위의 변천이 되풀이 된다 하니 무명(無明=根本無知)을 타파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이 길의 취득을 불교에서는 각(覺)이라 하고, 각을 이루어 고통을 넘어서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각覺」이란 붓다(Buddha)라 음역한다. 이 말에는 각오(覺梧)과 각찰(覺察)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각찰은 나쁜 일을 살펴보아 아는 것이요, 각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각覺」의 정황(情況)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청원(靑原;?~740)선사의 설법에 보면 "노승이 삼십년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은 청산이요 물은 녹수였다.(見山是山見水是水). 그 뒤, 이 길에 들어서고 보니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더니(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마침내 깨닫고 보니 산은 의연코 산이요. 물도 의연코 물이더라(見山祗是山 見水祗是水)"고 하였다.
 이것은 대상의식(對象意識)을 끊어 버리고 또, 이 끊었다는 의식마저 끊은 뒤, 이제는 더 끊을래야 끊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해탈이란 온갖 탐욕을 끊고 일체의 상(相), 일체의 집착, 일체의 번뇌, 일체의 생사, 일체의 인연, 일체의 과보(果報)를 끊는 일이다. 즉 각(覺)하는 일이다.  그밖의 「고」의 해결 방법으로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열반의 이상적 경지에 나아가기 위해 닦는 서른 일곱 가지의 수행)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그 가운데 언급된 팔정도(八正道)에 대해서만 소개하겠다.
 팔정도(八正道)는 구체적으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가지를 말한다.
① 정견은 바른 견해이다. 즉 불교적인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으로 연기와 사제의 도리를 올바르게 아는 지혜이다.
② 정사유는 바른 생각이다. 불타의 교법을 바르게 사유하여 이것을 자기가 체득하고자 하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③ 정어는 바른 말이다. 진실을 말하고 바르게 평가하며, 자애롭고 유익한 말로 서로 협조 융화함을 뜻한다.
④ 정업은 바른 행동이다. 신체적 행위에 과오가 없음은 물론 나아가 적극적으로 바른 행위를 실천함을 뜻한다.
⑤ 정명은 바른 생활이다. 불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뜻으로는 바른 생각을, 입으로는 바른 마음을, 몸으로는 바른     행위를 행하여 일상생활에서 정견을 구현해 가는 것이다.
⑥ 정정진은 바른 노력이다. 팔정도의 나머지 일곱가지를 실현키 위한 부단한 노력을 말한다.
⑦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정견 따위의 불교도로서의 필요한 것을 마음 속에 두어 잊지 않는 것이다.
⑧ 정정은 바른 명상이다. 모든 욕심과 산란한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선定)에 들어감을 말한다.
 이상에서 설명한 팔정도의 하나하나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고 도움을 주고 받으며 동시에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苦」를 해결한 궁극적인 상태는"지자(智者)는 열반(涅槃)에 도달하나니, 그것을 속박에서의 해방이요. 제일 높은 것이다."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모든 개념 뒤에 있는 실제인 열반에 이르게 된다. 

4.「고苦」의 해결에 있어서의 불교적 특징
 불교에서는 어느 누구나 최상의 경지를 노력에 의해서 다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보편적 입장을 취하며, 「고苦」의 해결의 궁극적인 상태가 최고의 완성적 인격자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불교는 철저한 인본주의(人本主義)요, 인간중심의 종교다. 불교적 의미로 본다면, 절대자는 허무맹랑한 가설이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과학에서 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과 마찬가지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하겠다. 더욱이 선종(선宗)같은 경우에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하여, 진리가 이렇느니 저렇느니 하고 가르치신 불타까지도 안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의 피나는 참구에 의해서만 진정한 자아발견(自我發見)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20일간의 실크로드 여행기

강혜원

전날의 여독과 긴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투어를 준비하였습니다.
 9시부터 시작될 투어가 저를 들뜨게 하였다면, 호텔 서비스는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여행 객들의 마음을 아는지 매우 친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파키스탄에 대한 느낌마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상술일지라도 "친절이란 역시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구나" 하며, 오늘 갈 곳을 미리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바드샤히 모스크(Bad Shahi Mosque)' '라호르 성(Lahor Fort)', '라호르 박물관(Lahore Museum)', '샬리마르 가든(Shalima Garden)', '아나드깔리 바자르(Anarkali Bazzar)' 이 모두 파키스탄의 라호르(Pakistan, Lahor)에 있는 것들로 우리가 오늘 둘러 볼 곳들이기도 합니다.

파키스탄 가이드 '수하일' 아저씨와 함께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지나, 처음 내린 곳은 바드샤히 모스크였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674년 아우랑제브 황제가 축조한 것으로, 옛 무굴제국의 단면을 잘 나타내는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구조와 장식은 모두 페르시아 양식으로 붉은 사암 벽과 흰 대리석 돔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곳은 코란을 공부하고 집필하는 여러 개의 방과 거대한 정원이 있기도 하답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으려고 할 때 "안녕하세요"하며, 반기는 이가 있어 쳐다보았더니, 어떻게 배웠는지 한국 말을 몇 마디 더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현지인이었습니다. 순간 일행은 기분 좋은 놀라움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답니다.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사원 안으로 들어섰는데, 모두 우릴 쳐다보는 것 같아 조금 머쓱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눈길에 빨리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중  아버지께서는 인도의 타지마할과 비교하셨지만, 저는 그저 그곳의 아름다움에만 관심이 갔습니다.
 가이드인 수하일 아저씨에게서 사원에 들어설 때 '씻는 법', '공부 법' 등을 전해 듣고서는 사진으로 기억을 대신하려고 연거푸 쎠터를 눌러댔습니다.^^
 사진기의 기억력을 믿으며, 우리는 바드샤히 모스크와 곧바로 이어져 있는 라호르성으로 발 길을 옮겼습니다.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1566년에 세웠다는 이곳 기둥 가운데, 홈을 파고 다시 그 안에 돌을 맞춰 넣은 '상감기법'의 문양을 보았는데, 정교함과 아울러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찬란한 천연색에 그저 놀랍기만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호화찬란하게 꾸며져 있는 성을 보며, 한편으론 왕족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또 한편으론 그것을 유지케 하기 위한 백성들의 노고가 동시에 떠올라 혼란스럽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대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그리고 유심히 살피기로 하였습니다.
 "권력에서 나오는 욕심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화려한 '거울의 방', '공연장' 등을 지나 여왕이 독서를 즐기던 전망대에서 솔솔 부는 바람을 맞으며 라호르 시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앞으로는 레버강이 유유히 흐르고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독서를 즐겼을 여왕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한 순간 시간의 벽을 뛰어 넘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라호르성을 나와 파키스탄에서 제일 크다는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시설과 규모면에서는 약간 실망스러웠습니다. 전시장 안에는 소장품의 안전을 위해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군데군데 틀어 놓았는데 완전히 40도의 찜질방 수준이었습니다만, '
간다라(Gandara)관'에서 본 '고뇌하는 부처님(Fasting Buddha 또는 고행苦行 abstinence)상'에 압도되어 덥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하시면서 참선을 오랫동안 한 결과, 눈과 배가 움푹 들어가고 가슴뼈만 앙상하게 튀어나와, 정말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어 버린 수행하는 부처님 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앞에 다소곳이 서서 인류의 행복을 위해 위대한 가르침을 펴시던 부처님을 연상하며, 다시 한 번 숙연한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 외에 이슬람관,  제네럴관 등 6개의 주제로 꾸며진 방을 둘러보았지만, 제일 관심 있게 본 것은 세계사 책에서 보았던 간다라 양식의 최초 불상이었습니다. 책에서 본 대로 긴 장발에 주름 무늬가 특이하고 키가 큰 전신상이었습니다.
 여러 유물을 감상하고 나와 점심을 먹은 뒤 간 곳은 '샬리마르가든'인데 이 역시 옛  무굴제국 시대의 거대한 정원으로 1642년 샤 자한이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모두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왕이 백성을 만나던 곳, 그리고 관료들의 정원, 나머지는 왕족들만의 정원이라고 합니다. 정원 가운데엔 대략 400개 정도의 분수대가 길게 늘어서 있는데 역시 예상대로 왕족들의 정원이 제일 화려하였습니다. 도중에 파키스탄 여자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다음 '아나드깔리 바자르'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함께 하는 삶

문옥선

   몸은 눕고 싶었지만, 마음은 이미 가을들녘을 달리고 있던 터라 대문을 나서기로 했다. 즐겨 가는 곳 중의 하나인 강변을 향하던 중 기사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는 문중회의 겸 식사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그들은 "직접 해 온 떡..."이라면서 다른 분들한테도 한 접시씩 내놓았다. 날랑날랑한 절편을 좋아하지만, 팥고물이 묻은 시루떡도 먹음직스럽게 보여 맛보았더니만, 예상대로 찰 지고 맛있었다. "식사 후 남은 떡을 가져 가고 싶네요"하고 주인 아저씨에게 말하였더니, 씽긋 웃으면서 봉지가 묵직하도록 담아주신다. "설마 오해하신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는 주위를 살폈더니 떡이 맛있었는지 봉지를 달라면서 담아가시는 분도 더러 보였다.  휴우~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그러나 한편으론 왜 갑자기 떡은 싸가고 싶었는지, 평소 안하던 행동인데....하여튼 좀 묘한 기분이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도로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익숙하고 눈에 익은 길이지만 나에겐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기만 하다. 그러나 두어 시간 계속해서 쉬지 않고 운전하였더니만 피로하기도 해서, 차를 마실 겸 이동 찻집에다 주차시켰다.
 원탁 주위로 의자가 있고 그 아래에는 강이 흐르며, 길 건너에는 흐린 날 산 안개가 피어오를 법한 평화스러운 그런 풍경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때 맞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서야 나타나는 주인을 보고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찻값을 깎아야 할 것 같네요. 여기 온지 한참 되었거든요.”, 미안한 듯 “그러게요. 어제 나오지 못했더니 쓰레기가 많이 쌓여서요.저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느라 미쳐 못 보았어요” 후덕하게 생긴 젊은 엄마다. 몇 번을 다녀갔지만 농담을 건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찻값을 미리 받으세요. 올 때처럼 주인이 없으면 이번엔 그냥 가는 수가 있어요.”하고 농담해도 그녀는 웃기만 한다. “이곳의 관리를 맡고 계시는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면서, 이곳에서 장사를 하되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간이 화장실 치우는 일을 대신한다고 했다. 말하는 도중에도 기다란 호스를 꺼내 꼬인 부분을 손으로 펴고 죽죽 늘어뜨리면서 손놀림을 쉬지 않았다. 아마도 저 아래 간이화장실을 치울 모양인가 보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아주머니 같다. 그러니 환경 미화원은 이곳까지 올 필요가 없고, 덕분에 아주머니는 그분 말마따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어 서로에게 좋은 셈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쓰레기를 치우기는 해도, 쓰레기 봉투에 담지 않고 그냥 한 곳에다 모아만 두고 간답니다. 그러나 등산객들은 자신의 쓰레기를 되가져가지요.”하는 아주머니의 말에 "자연을 즐기고 사랑하는 차이일까..." 한편으론 "그나마 흩트려 놓고 가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라면만 끓여줄게 아니고 수제비도 하시고 부침개도 만들어 파시면 수입이 늘 것 아닌가요?” , “요즘은 다들 싸가지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수제비를 하려면 반죽도 해야 하고 국물을 맛있게 해야 하는데...” 하는 폼이 영 자신 없는 눈치다. 외모로 보아서는 간장 된장만으로도 진국을 우려 낼 것 같건만. “밀가루 반죽을 해서 일인분씩 랩에 싸고 국물은 미리 우려서 담아 내오면 되잖아요.” 이걸 모를까마는 정작 난 하지도 못하면서 아주 쉬운 마냥 늘어놓았다. "아주머니, 그런데 용기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전 숫기가 없어서 이 일을 할 자신이 없거든요.” 아주머니 가게는 1톤 트럭에 라면과 커피 간단한 음료, 그리고 조금만 냉동고에 아이스크림 또, 철 따라 옥수수며 고구마를 쪄서 팔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아주머니는 “저도 처음에는 말도 못했어요. 그런데 어떡해요. 애들 학비에 보탤 생각을 하니 용기는 오래지 않아 생기더군요.” "예 그렇군요." “아이들이 많은가요? 얘들이 몇인데요?” 물었더니, “많아요.” “네 명인가요?” 사실 요즈음 네 명의 자녀를 둔  젊은 부부를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많아요"라는 말에 그렇게 되 물어본 것이다. 그녀는 “아뇨, 세 명이예요. 유치원 한명, 초등학생 둘 그래요.” “하긴 요즘 아이가 한 명인 집이 많아서 세 명이면 많은 편에 속하네요. 아직은 학비가 그리 많이 들진 않지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그렇지도 않네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니 시간을 조절하느라 학원을 한 군데 더 보내야 하고, 그러니 결국 세 곳이나 보내고 있어요. 촌이라 학원비는 많지 않다지만...” 딴은 그렇겠다 싶다.
 “요즘 단풍 철이니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아르바이트 경제를 살릴 수 있게요. 그런데 집안 경제는 어떻게 하세요?” 라고 물었지만, 한 눈에도 알뜰한 주부임을 알 수 있었다. “그야 당연히 제가 쥐고 있지요.”라며 그녀는 활짝 웃는다. “아저씨가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것 아닌가요?” 했더니 일 년에 두 번은 그렇단다. 봄철 한 번, 가을철 한 번...그러면서 봄철 벚꽃 필 때 오면 고생한다고 일러준다. 차들이 너무 많아 구경할 수가 없다면서....
 "아줌마 그런 걱정일랑 저 강물에 흘려 보내도 된답니다. 남들 바쁜 시간에 한가한 사람이 있으니까요."라고 속으로 말하며, “그럼 퇴근하실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라고 물어 보았다. 혹 단풍 철이라 늦게 나오면 정작 관리인인 아주머니의 차를 댈 곳이 없을까 염려되어서 그렇게 물어 본 것이다.. “그냥 이곳에 두고 다닐 때가 많아요. 난 읍에 살지만 저 건너에 큰집, 요 안쪽에 형님네가 살고 있어서 별 걱정은 안하고 있어요.”라며 저 건너 큰집과 요 안쪽 형님네 집을 가리키기 위해 열심히 손으로 방향을 긋는다. “아, 그래서 언제나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었네요.” 사실 그 차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럼 아저씨가 퇴근 후 모시러 오나요?” 하였더니, 수줍게 웃으면서 “그렇게 자상하지가 못해요. 그냥 써금써금한 것 하나 몰고 다니네요.” 한다. 오래된 사람이 정겹듯이 오래된 물건을 나타내는 그 표현 또한 정겹게 들린다.
 “참, 아줌마 떡 좋아하세요?” 갑자기 봉지에 담아온 떡 생각이 났다. “떡이요?” 정말 웬 떡이냐 싶은 표정이다. 하긴 내가 점심을 늦게 먹었지. “난 떡을 무지 좋아해요. 옛날에 내 별명이 떡보였어요. 떡만 먹었거든요.” 입덧할 때 떡만 먹었단 얘기일까. “잘 되었네요. 점심 먹을 때 식당에서 떡이 나왔는데 맛있어서 싸왔거든요. 드릴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떡보 아줌마”
 떡보 아줌마는 빙그레 웃고 있다. 돌처럼 강물에 씻겨져 둥그래졌을까? 그러는 사이 이제는 내 차례인가. 아주머니의 질문이 들린다. “뭐 하시는 분이기에 이렇게 경치 좋은 곳 찾아 그것도 혼자서 할랑할랑 다닐 수가 있나요?” 뒤 돌아서서 가는 나에게 그녀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좋아 보였을까...." 아주 가끔은 당신도 그러고 싶지 않나요? 나처럼......" 난 다시 그녀에게 소리 없이 물으며 발길을 옮겼다.

 

 

 

 맹인 안내견을 만났을 때

장남지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다가 시각장애인을 돕고 있는 맹인 안내견을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시민이 많다.
맹인 안내견은 버스나 택시 등 대중교통 수단에 탑승할 수 있도록 법률에 명시되어 있다. 맹인 안내견은 버스는 물론 승용차에 탑승할 때도 주인의 발과 의자 사이에 얌전이 엎드려 있기 때문에 택시 이용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통 맹인 안내견을 처음 대했을 때 어린이 등의 경우 겁내기도 하지만, 이는 짖지 않으므로 안심해도 된다. 그리고 개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은 좋지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함부로 만지는 것은 금물이다. 이유는 안내견의 반응이 달라지므로 영문을 모르는 주인이 당황하기 때문이다. 또 맹인 안내견에게 먹을 것을 주는 행동은 해서 안된다. 정해진 먹이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받아 먹지도 않을 뿐더러, 만약 먹이를 따라 개가 움직일 경우 시각장애우인 주인이 겪게 될 곤란을 고려하지 않은 경솔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70년전 미국에서 첫 선을 보인 맹인 안내견은 훈련에 평균 2년의 기간과 1800여만원의 비용이 소요되며, 훈련기간중 시각장애인의 위험을 예방하고 일상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도울 수 있도록 집중적인 교육을 받는다. 미국에는 두 곳의 비 영리 단체가 맹인 안내견 훈련을 전담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상성 맹인 안내견 학교가 유일한 훈련기관이다.
(Tip) 매년 4월30일은 세계 맹인 안내견의 날~  국 내외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현재 유명호텔과 상점, 고통시설 등 1000여곳이 맹인 안내견 환영 스티커를 붙이고 출입을 허용하고 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이러한 곳이 더욱 확대 되야 한다는 것이 장애우들의 한결같은 바램이다......

 실제로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맹인 안내견을 데리고 다니는 시각장애우인 오빠가 있다. 우리과 오빠이기 때문에 같이 다니면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나누게 된다.
 강토(개 이름)를 데리고 다니면, 실제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냐라고 물어 봤는데, 대체적으로 아직 우리나라의 인식이 그다지 긍정적이진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지난주에 우리과는 창녕으로 MT를 간 적이 있다. 가는 길, 오는 길에 시외버스를 이용했는데, 기사분이나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짖지 않도록 주의받은 개에게 다른 손님들이 싫어한다는 둥, 청결치 못하다는 둥,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개를 보고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애완견을 가진 주인들의 나쁜 습관과 행동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반드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최소한의 장애우에 대한 배려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애우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낯선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우리보다 조금 불편한 부분을 가졌을 뿐이다. 어쩌면 장애인들에게 지나치게 도우려고 하는 행동보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해주는 것이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트리플X

조혜숙

 어디에 소속되는 것도 구속당하는 것도 싫어하는 익스트림 스포츠(스포츠카, 오토바이, 패더글라이딩등)의 프로인 젠더 케이지(빈 디젤)는 범죄자를 범죄조직에 침투시키자는 NSA요원 기븐스(새뮤얼L.잭슨)의 주장에 의해 첩보원이 되여 정부를 위해 일을 하든지, 아니면 그동안 부린 말썽으로 익스트럼 스포츠를 포기하고 독방에 갇히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첩보원을 선택한 젠더는 임무를 가지고 프라하로 갑니다. 비록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타협을 한 스파이이지만, 젠더는 임무에 목숨을 걸만큼 위험할지라도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그것은 일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놀고 즐긴다는 개념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젠더가 생각하기에 적합하다 싶지 않으면 상부의 명령은 따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기븐스는 젠더의 이러한 특성을 도리어 이용합니다. 그러니까 기븐스와 젠더는 일종의 두뇌게임을 벌이면서 서로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어 내는 거지요.
영화 트리플X는 신세대판 007 입니다. 신세대 첩보원의 특징을 분명하고 화끈하고 빠르게 잡아 냅니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하일라이트는 젠더가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스카이 다이빙을 즐기다가 눈 덮힌 산 위에서 거대한 산사태를 뒤로 하며 스노우 보드를 즐기는 아찔한 장면입니다. 물론 그 장면을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영화를 보면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빠르고 경쾌하고 흥미 진진하고 아찔하고... 영화 내내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눈요기하면서 보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너무나 의식적인 성조기의 출현은 실소를 나오게 했습니다. 미국은 대단하다.미국 만만세!를 외치고 있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작금의 미국의 태도에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닌데 영화에서조차 의도적인 것 같아 뒷맛이 쓰더군요. 그러나 허리욷의 영화가 다 그렇겠지요?^^ 영화를 영화로만 보면 충분히 속편을 기대하고 싶은 군살 없는 영화였습니다.

 

 

 

 칠불암

편집부

 가을비가 내리는 경주 남산, 그 속 어딘가에 위치했을 칠불암을 향해 통일전에서부터 걷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걷자 민가는 사라지고 알싸한 소나무 향기 가득한 산길이 나왔다.
잎사귀에 빗방울이 맺혔다가 바람이 불 때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즐기며, 한 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어두워 앞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 길을 약간 조급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인위적인 약수터가 나왔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신 뒤 절이 가까워졌을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비도 내리고 배도 고팠지만, 무엇보다 옷이 젖어 체온이 내려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초행길이라 혹 길을 잘못 들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앞서는 상태에서 몇 발자국 더 내디딜 무렵 갑자기 경쾌한 금속음이 들렸다. 그것은 가마솥 뚜껑을 여는 소리였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에선 "구미호가 산길을 지나 다니는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물을 끓이다가, 날 보고는 뚜껑을 여는구나" 하고는 냅다 "걸음아 살려라" 하고 도망치는 뭐 그런 이야기가 이어질 상황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그 짧은 소리에 일순간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곧 이어 사람소리도 들렸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날 본 누군가가 전등으로 길을 비추며 "스님이세요?"하며 맞이한다. 곧장 부처님께 참배한 뒤, 그곳 스님께 인사를 하려고 방에 들어서자 촛불을 밝혀둔 채 저녁 공양 준비 중이었다.
 서로 인사를 한 뒤, 같이 공양을 하면서 "혹 정전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주지스님 왈 "오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러자 같이 공양중이던 신도분들께서 웃으시길래, 곁눈질로 혹 전기 시설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여기는 전기가 없어요"라며, 누군가가 궁금증을 풀어준다.
 공양 내내 입심 좋은 공양주의 재담 덕분에 모두 웃었다. 안동 출신이라고 스스로를 밝히는 공양주의 말이 보통 수준은 넘어선 것 같아 이렇게 보았더니,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모습이다. 생 머리카락에 동글 동글한 모습이었는데, 절에 살면서 '거량'을 배웠는지 말할 때는 상대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수준이 보통 아니다. 행여 성격 급한 사람은 제 풀에 넘어갈 그런 말투였다.
 공양을 마친 뒤 장작 불을 때는 온돌방 특유의 아늑함과 포만감의 상태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객으로서 한 자리를 지켰다. 가끔 저 멀리 보이는 불빛에 눈길을 주다가도 천장에서 요동 치는 서생원을 보고는 "천장 바닥에 압정을 쫘악 깔아 놓으면 못 다닌다"고 하는 우스개 소리를 떠올리며 혼자 웃음 짖기도 하였다.
 방이 두 개인 까닭에 오늘 하루만 신도들 방과 스님 방을 바꾸기로 하였다. 신도분들께서 묶는 큰 방과 주지스님의 작은 방을 바꾸기로 한 것이었다. 난 잠자리에 들기 전 스님들께 "스님 오늘 제가 피곤해서 아마 코를 좀 골 것 같습니다." 하고 미리 이야기하였더니 "괜찮습니다"라고 한다. 내심 도반 스님한테 들은 나의 코 고는 수준을 알기에 걱정이 되었지만, 여분의 방이 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새벽 간간이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천수경으로 남산에 '도량석'을 올렸다. 곧 이어 주지스님의 '종성' 그리고 주지스님의 사제이기도 하신 부주지 스님의 예불, 그런 다음 참선시간이 이어졌다.
 아침 공양 뒤 이어진 차담 시간에 "서생원 때문에 잠을 못잤다"는 부주지 스님의 이야기에 "스님 혹시 저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지는 않으셨는지요" 하며, 두 스님의 얼굴을 살폈더니, "아뇨"라고는 하였지만, 얼굴에는 "예" 라고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심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아무 말 없이 보냈던 어제와는 달리 먼저 말을 꺼냈다. "스님 혹시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 보셨는지요"하였더니,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혹 누군가가 그 영화에 나오는 배우와 닮았다고 하지 않던가요?" 하였더니, 부주지 스님 왈 "아니 누구하고요...."하며 날 쳐다보는데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에서 해병대 출신 스님 역으로 나오는 이와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완전히 똑 같았다. 난 얼른 "예 그 해병대 스님하고요....", 그러자 "그렇게 비슷합니까" 하며, 아닌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난 조심스럽게 "스님, 저는 그 배우가 그 때 그 영화 찍고 그대로 절에 남은걸로 착각했을 정도입니다." 하자 방안에는 한 바탕 웃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남산에서 맞는 첫 아침은 밝아왔다.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길을 떠나야만 했다. 공양주께서 정성스럽게 주먹밥을 준비하는 가운데, 이번 산행겸 참배의 또 따른 이유 중 하나인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대중스님께 인사를 한 뒤 남산 속으로 발 길을 옮겼다.
 (TIP) 경주 남산은 서라벌 남쪽 주봉인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에서 흘러내린 등성이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형적으로는 남북으로 8km, 동서로 4km에 걸쳐 길게 늘어서서 동서로 평야를 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따르면, 신라 건국과 몰락을 상징하는 나정(蘿井)과 포석정(鮑石亭) 등을 비롯해 650여개소의 유적유물이 분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50여개에 달하는 계곡을 따라 140여개소에 이르는 사지(寺址), 80여구의 불상, 80여기의 석탑 외에 13기의 왕릉, 4개소의 산성, 다수의 선사유적 등 다종다양한 문화재가 밀집 분포하고 있는 민족문화유산의 보고입니다.

 

 

 

CANADA Victoria

도난영

I checked the weather at first to take ferry as soon as I got up. I went out of home in thirty minute after prepareing quickly. In the morning, the breeze was a little bit chilly even though it's on May. when I arrived at the bus station, Hyun-Ji had waited with coffee in her hands. actually, I was excited a little when I saw the cute ferry which was coming and going. After paying for it, I got on the ferry having high expectation. I prayed to be able to see dolphins.. but unfortunately, i could not see these. It took around half and one hours to get Victoria. when I arrived in Victoria Melisa who seonim(priest) BUMSOO introduced me to her was waiting for us. (CANADA Victoria)

 she looked warm . First of all I made a itinerary to travel.. There was really good scenery. I felt as if here's British. Especially the National Assembly building was fantastic.

More it's getting dark more beautiful. After having dinner we said good bye to Mellisa. I really thanked for guiding.
The next day my friend and I rent a car to go around in Victoria and go long beach. Because I heard it's most famous beach in Victoria, I wondered what was different. To rent a car, i needed more money, So I persuaded Akico who I met in Youth hostel to rent a car together. Finally she decided to rent together. Actually the destination where she wanted to go was on the way to go my destination.
After I drove her off at Dunkun, we got there after driving for 5 hour. when we arrived there it's pretty dark. we stayed in a car all night through with fear But it was really good experience. So I'm sometimes used to remind of old days. (CANADA Victoria)

 

 

 

 이미 알고 있는 신비 - 월링(Whirling)

이정미

  얼마 전 인도에 다녀온 친구 편에 월링(whirling)을 할 때 입는 치마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대학시절 인도에서 만난 미국인 할아버지가 아쉬람(사원)에서 커다란 접시치마를 입고 아무 의미의 선을 갖지 않고 뱅글뱅글 돌고만 있는 모습에 감격을 한지 긴 시간이 지난 이즈음 그 옷이 저의 수중에 들어온 것은 정말 뜻 깊었습니다.
 월링은 수피즘(sufism)이라는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의 명상법 중 하나로 회전을 하면서 자신을 침잠시키는 방법입니다. 회전을 하는 동안 주위의 모든 것들은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가 되고 돌고 있는 자신은 명확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초보자들은 손바닥을 얼굴 가까이에 두고 시선을 집중하면 회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기준이 되어 쉽게 회전할 수 있답니다. 그 회전과 더불어 이 접시치마는 마치 우주선처럼 펼쳐져서 명상자가 외계로 자신을 펼쳐낸 듯이 느껴진답니다.
 인도의 한 아쉬람에서 만났던 그 미국인은 이미 일흔이 훨씬 넘은 고령이었으나, 어린아이처럼 가벼워 보였습니다.
 인간은 유희적 동물이라고 명명하였던 A.호이징가의 말처럼 회전 속의 자신을 즐기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떤 목적에 의해서 달음질치고 있는 현대인이 잊고 있었던 순수한 형태의 움직임에 대해 각성케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를 다시 떠올렸던 것은 방콕의 어느 대학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였습니다. 태국무용을 배우러 갔던 저는 오후가 되면 시장에 나와서 물건을 팔았습니다. 도로에 광목을 깔고 몇 안되는 물건을 늘어놓고 목욕탕에서 쓰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물건을 팔고 있는 외국인을 신기하게 생각했는지 반짝이는 물건들에 관심이 있어서 인지 아이들이 모여들곤 했습니다. 한 날은 모여든 아이 중 한 아이가 맨발로 두 팔을 벌린 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아이들도 두 팔을 벌리고 돌기 시작했습니다. 바람개비처럼...아, 작고 귀여운 신들... 숨이 목까지 차오른 아이들은 비틀거리며 거리에서 쓰러져 깔깔 거렸습니다. 어지러움증이 그들의 유희였고 시장은 멋진 무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몸짓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건만 아이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화창한 늦가을 해지는 강변에 나가 저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즐거운 어지러움증이 일어나고 아이들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땅에 쓰러질 겁니다. 지구가 어떻게 회전하고 있는지 알게 되겠지요. 이미 우리가 해온 일들입니다. 이 모든 신비로움이 말입니다.

 

 

절기
풍속

 

 대설, 둥지

편집부

 대설(大雪 24절기의 스물 한 번째. 음력으로는 10월 중이다.)
 소설과 동지 가운데에 있는 절기로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대설(大雪)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음력은 중국 화북지방의 기상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한 달 가량 늦다고 보면 될 것이다.

동지(冬至 24절기의 스물 두 번 째, 음력으로는 11월 중기이다.)
 밤이 가장 긴 날이기도 한 이 날은 예로부터 '작은 설'이라고 불렀다. 이 날은 축귀(逐鬼)와 팥죽을 빼 놓을 수 없다. 팥죽을 쑤어 사당 등에서 차례를 지낸 다음 방, 마루, 부엌, 광 등에 한 그릇씩 올리고 대문이나 벽에다 뿌려 악귀를 쫓는 풍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음력 11월 초순에 동지가 들면 '애동지', 중순이면 '중동지', 그믐(하순)이면 '노동지'라 하는데,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팥 시루떡을 찐다.
동지부적(冬至符籍) - 이 날 부적으로는 뱀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여 악귀를 막는다.
동지헌말(冬至獻襪) - 손위 사람이나 부모님께 버선을 지어 바쳐 효를 표하였다.
하선동력(夏扇冬曆)  옛날 왕실에서는 동짓날에 새해 달력을 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것을 다시 친지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를 여름(단오)에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함께 묶어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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