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6(2002)년 10월호 Vol.2,No.21. Date of Issue 1 Oct ISSN:1599-337X 

 

 

 

 

 

 

 

 

 

 

  우주(宇宙)

범수

 관찰자의 입장이나 견해에 따른 대상의 분석적 방법이나 평가는 다양하다. 똑 같은 사물이나 사건일지라도 어떤 관계,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람 수만큼 차이 나는게 보통이다. 그것은 그 본질적인 면은 차치하더라도 외면적인 쓰임이나 모습에 대한 견해마저도 다르기 때문인데, 이유는 업(業 견해, 습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여기에 가늘고 둥근 모양의 순금 막대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보는 사람의 성향(업)에 따라 지휘봉, 비녀, 장식품 등 외면적인 '쓰임(用)', '모양(相)'에 따른 평가나 이용 또는, 내면적인 성질(體)에 관한 관찰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어떤 용도나 가치를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듯 삼라만상에 대한 견해는 그 수 이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기준에 따른 분류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 전 우주를 정신과 물질로 나눠 묶는 방법이 있다.
 정신과 물질이 실재한다는 이들의 주장을 따를 것 같으면, 불변하는 자아(自我 ego 지속성과 동일성을 지니는 감각의 통일 주체)나, 영혼( 靈魂 soul 육체와 달리 영원한 성격을 지닌 실체)과 함께 영원(永遠 eternity 작용이나 시간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양상)한 물질(物質 matter 정신精神 mind에 대응되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단히 전자를 아(我)라 하고, 후자를 상(常)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아(我)나 상(常)에 대하여 '모든 존재는 여러 가지 인연들이 잠시 화합해 있다'는 연기설로 설명한다. 때문에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에 대하여 무아(無我)를, 그리고 물질의 영원성에 대하여 무상(無常)의 입장을 취함으로 그런 존재나 견해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이에 대한 불교의 분석적 방법은 다음 호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하여튼 이 외에도 여러 목적이나 가치, 견해에 따른 다양한 분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고래로 종교, 철학, 과학 등에서 전 우주에 대한 다양한 분류나 평가는 이루어져왔다. 그리고 그 다양성만큼이나 분쟁과 투쟁으로 얼룩진 역사도 함께 이어왔다. 지금도 이와 같은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더라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를 먼저 살펴보자.
 전변설(轉變說)의 입장을 취하는 힌두교의 우주론에 따르면 태초에 유일한 유(有)가 있어서 그것이 욕심을 일으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요소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화합하여 복합물을 만들고, 이 속에 그 유(有)가 명아(命我)의 상태로 들어가, 명색(名色)이 되고 일체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견지에서 자아(自我)와 범(梵)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지(智)에 의해 선정(禪定)을 닦음으로써 괴로운 생사의 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修定主義). 이것은 하나(一)가 전변(轉變)하여 많은 것(多)이 되고, 그 하나가 또 많은 것 속에 들어가 본질이 되었다는 것으로 원인(一)속에 결과(多)가 이미 존재한다는 뜻에서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이며, 일원론적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신과 전 우주를 동일시함)이다.
 역사상 고타마 부처님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외부의 어떤 힘이나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인지할 수 없고, 불가항력적인 현상이나 존재에 대해 '신(神)'이란 개념을 만들어 자신의 보호와 보존을 염원하였던 것으로 이런 형태의 종교는 다양한 모습으로 오늘 날까지 전하고 있다. 그러면 그 가운데 하나를 살펴 보자.
 창조신(創造神)이란 세계, 인간, 동식물 등 전 우주를 창조한 신으로서 두 분류가 있다. 먼저 기존의 물질로 세계와 인간을 만든 경우와 허무상태에서 전 우주를 만든 경우이다. 그러면 허무상태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신의 속성 가운데 그들의 주장대로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 모든 것을 알고 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함과, 전 우주에 대한 '사랑'(God loves you), 그리고 '자존(自存 self existence)'의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자존(自存 self-existence)이란 '스스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마치 63빌딩 가운데 62층 까지는 없고 오직 63층만 존재한다는 뜻과 같다. 전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상대 또는 유사한 개념이나 개체를 통해 구별되고 확정된다. 따라서 구별되는 어떤 개념이란 곧 다른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마치 여러 날실과 씨실을 통해 옷감이 되듯 여러 조건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며, 구별되는 것으로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제1원인(第一原因) 즉 창조신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한다. '제1원인' 가운데서 원인(原因cause)이라는 말은 결과(結果 effect)를 전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원인은 곧 결과의 상대어이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는 모두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원인이란 결과가 있기 때문에 결과에 상대해서 원인이라 하고,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원인에 상대해서 결과라고 한다. 따라서 원인이나 결과는 모두 잠정적으로 상대되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는 바로 인과 법칙에 속한다. 인과법칙은 간단히 말해서 원인과 결과임으로 발생과 소멸의 과정을 겪게 된다. 따라서 제일원인 즉 창조신 역시 발생과 소멸의 과정을 겪게 됨으로 그로부터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말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 역시 그에 선행하는 원인이나 다른 조건에 의한 하나의 결과이며, 또 그로 인한 다른 결과의 원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체를 사랑(God loves you)하고 또, 전능(全能 omnipotent 행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한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당연히 전쟁, 재해, 재난, 기아, 질병, 등을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를 사랑(agape란 주는 사랑giving love으로 상대방의 행복을 돕기 위한 사랑해 주는 사랑이다.)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전능(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하므로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온갖 종류의 전쟁 특히, 작년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난 '살상'이나, 올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태풍' 루사와 같은 재해, 이 외에도 갖가지의 질병 등 크고 작은 여러 요인들로 우리들은 고통 받고 있다. 혹자는 이를 창조자의 심판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창조자에겐 사랑이라는 속성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속성과 위배되기 때문에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전능'을 가진 창조자가 있다는 외침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우주에 대한 불교의 분류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대성리

지미연

 70세 할머니께서 사진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TV에서 접했습니다. 순간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겨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내용인즉 50평생 자녀들을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특히 그 열정에, 그리고 사진을 찍는 저로서는 너무 창피해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분의 사진은 한 마디로 가족의 역사이며 개인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전동차가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에서 첫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그 앞에서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동물원에서 코끼리를 좀더 자세히 찍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가 찍은 사진 등을 보는 순간 전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애기의 태어남과 함께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기록한 정성에 또 한 번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렇다 사진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특히 자기의 소중한 추억을 담은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니까 .."이런 생각과 함께 이 번 일을 계기로 웹 메거진 월간 좋은인연에 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을 소개하려 합니다.
 눈 덮인 겨울의 대성리. 아마 이곳은 여러 사람들의 추억 속에 함께 자리하는 곳일 것입니다. 많은 대학에서 MT를 가는 MT촌으로 유명하니까. 하여튼 우린 선배들과 그곳으로 MT를 갔었는데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2명을 제외하곤 모두 30을 넘겼고, 나 또한 풋풋한 학부 신입생은 아니고.^^ 그래도 우리는 그런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싸움을 하고 또 눈사람도 만들었습니다. 아마 그 광경을 본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마냥 즐거웠습니다. 역 앞에서 70년대 포즈를 취하고 모두 멋지게 한방 박기도 하고.^^
 지금 지난 일을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마 사진이 있었기에 더욱더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분들에게도 추억이 담긴 사진을 많이 가지시기를 바라며, 필름 한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XP2'라는 필름으로 찍은 것입니다. 필름 구입시 "흑백 느낌 나는 칼라필름 주세요" 하면 아마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사진을 가지고 싶으시다면 한 번 찍어 보세요.

 

 

 

 

성주

불교에서 본 인간이란 무엇인가

                                                    -性珠-
Ⅰ.서론
Ⅱ. 석존의 출가 동기와 수행 및 깨달음
Ⅲ. 최초의 설법과 전도의 선언
Ⅳ. 초기 불교의 교육학적 인간관
  1.「苦」의 정의
  2. 불교의 인간관
  3. 고(苦)의 해결
  4.「苦」의 해결에 있어서의 불교적 특징
Ⅴ. 인간이해, 왜 중요한가?
  1.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2.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
  3. 죽음의 실상과 올바른 수행
Ⅵ. 불교의 인간 이해
Ⅶ. 현대적 의의
Ⅷ. 결론

 

Ⅰ.서론   
 인간의 공동 운명 중에서 고통보다 더 보편적인 것은 없다. 고통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며 원초적인 경험이다. 확실히 인간에게 있어서 고(苦)는 낙(樂)보다 강하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고」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아니면 고해(苦海)속에서 투쟁하는 상태이다.
 인간의 영혼에 내재된 많은 문제 가운데 인간의 실존 속으로 파고든 문제는 바로 이 고통의 문제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예 생(生) 그 자체를 「고(苦)」(Dahkasatya)로 보아, 「생즉고(生卽苦)」며,「고(苦)」는 중생(衆生)의 현상이라고 한다. 「고(苦)」가 바로 생(生)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토인비(Toynbee)박사가 말한 대로 「고통에 대한 태도는 과학적인 신조의 근거를 이루는 태도이며, 그것은 동시에 행위와 실천의 근거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행위와 실천을 결정 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석존의 가르침을 통해「고(苦)」의 문제를 불교의 교리를 통해 두루 고찰해 보고 불교와 인간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Ⅱ. 석존의 출가 동기와 수행 및 깨달음
   이 글에서 초기 불교란 역사적 존재로서의 불타(佛陀)가 이 세상에 생존하고 있을 때의 불교를 뜻한다. 불교는 이른바 세계적인 종교(宗敎)들 가운데 가장 교육적인 성격을 지닌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바람직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넘어선 절대자를 신앙하는 유일신교의 경우, 인간의 교육은 신의 존재를 이해하여 예배하는 곳으로 가게 하는 데에는 유효할 수 있으나,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은 인간에 의한 교육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인간 각자가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 자신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타는 인간 각자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본질적인 불행으로부터 해탈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쳤다. 석존의 일생은 이와 같은 가르침의 일생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 인간으로서 불타의 일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자의 생애였다고 하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석존은 서기 전 6세기경에 현재 네팔 지역의 카필라국의 태자로 탄생하였으며, 그의 어려서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였다. 비록 작은 왕국이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태자로서 호화로운 환경 속에서 각별한 보살핌과 당시로서는 가장 수준 높은 학문과 기예의 교육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태자는 당시의 그 누구보다도 부족함이 없는 쾌락을 경험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출중하게 학예를 닦은 지성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어난 자는 누구나 늙고 병들며 죽게 된다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괴로움에 대하여 실존적인 눈을 뜨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인생의 본질적인 괴로움을 해탈하기 위하여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가(出家)를 결행한다.
 한편, 당시의 인도에 널리 퍼져 있던 종교적 수행으로는, 주로 수정주의(修定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가 있었다. 수정주의는, 괴로움은 욕망의 충족이 안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욕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일체의 의식(意識)이나 사념(思念)이 없도록 하는 정(定)의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행주의도 욕망의 충족되지 않음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고, 이 욕망은 주로 육체적 유혹이나 자극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 고행의 수련을 통하여 모든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태자는 당시 수정주의의 대표적인 권위자에게 의식이나 사념이 없도록 하는 수행을 닦아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확실히 일체의 사념이나 의식이 없는 정(定)의 상태에서는 그 어떤 욕망이나 고통도 없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정(定)’의 상태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역시 사념이나 의식이 다시 일어난다. 다시 말해, 괴로움으로부터의 영원한 해탈이란 인간이 영원히 사념이나 의식이 전혀 없어야 하며, 이러한 상태는 결국 죽음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그리하여 이곳을 떠나, 나이란자나 강(尼連禪河)을 건너 숲 속으로 들어가 고행의 수행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부친 슛도다나왕(淨飯王)은 콘다냐(橋陳如) 등 가까운 신하 5인을 태자에게 보내어 함께 수행하도록 했다.
 이 기간, 태자는 먹고 자는 것을 거의 잊으면서 6년간 계속된 철저한 고행으로 신체는 극도로 쇠약하고 의식마저 혼미해졌다. 마침내, 육체를 극도로 학대하는 고행은 괴로움의 해탈이 아니라 죽음에의 길임을 깨닫고, 수행의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수척한 몸을 옮겨 나이란자나 강의 물에 6년간 묵은 때를 씻고 강가 언덕의 풀에 지친 몸을 뉘였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수자타가 이를 보고 우유죽을 바쳤다. 점차 기분도 상쾌해지고, 원기도 조금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콘다냐 등 함께 고행의 수도를 하던 5인의 도반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당시로서는, 고행자가 목욕을 하고 우유죽을 먹는 것은 타락이었다. 결국 이들 5인은 태자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태자는 붓다가야의 낮은 언덕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풀 자리를 깔고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혀, 명상의 수행에 들어갔다. 불교의 명상에는 위빠싸나(正念)와 사마디(三昧)의 두 가지가 있다.
 위빠싸나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그 하는 일을 그대로 고요히 조견(照見)하는 명상이며, 사마디는 정신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여 관조(觀照)하는 명상이다. 태자는 이 보리수 아래에서 위빠싸나의 명상을 통하여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특히 그는 호흡의 조절을 통하여 정신적 평정을 이루어, 모든 것이 끊임없는 상호관계에 의한 것이라는 연기법(緣起法)의 조견을 통하여 정각(正覺)을 성취한다.(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창경궁

도난주

서울 강북 소재 창경궁에 오시는 길은 지하철을 탈 경우 1호선 종로 3가역에서 종묘를 통해 후문으로 들어오는 방법, 그리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려 서울대학병원의 후문을 통해 정문으로 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창경궁의 입장료는 25세 이하는 300+원, 25세 이상은 700원이며 매주 화요일은 휴관됩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겨레 문화답사에서 10:00, 1:00, 2:00, 3:00 일요일은 궁궐 길라잡이에서 1:30분 3:00에 무료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참고 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먼저 그림상으로 입궐해 볼까요? 아마 우리의 시선이 처음으로 닿는 곳은 정문 홍화문일 것입니다.

홍화문은 2층으로 되어있으며, 다른 궁궐이 모두 남향인 것과는 달리 동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궁궐에 몇 개 남지 않은 복원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건물이기도 합니다.. 색이 바래서 은은한 느낌마저 들죠.
사진 1 (홍화문 부분)

정문을 지나면 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옥천교라고 하는 이 다리의 아래에는 두개의 홍예가 있습니다. 홍예의 모양은 아치형으로 둥글게 만들어졌으며, 중심에는 귀면(鬼面)을 두어 물이 세차게 흐를 때 압을 적게 받도록 되어있습니다.
사진 2 (옥천교)

홍화문, 옥천교를 지나면 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법전으로 들어가는 명전문이 보입니다. 문의 천정을 보시면 녹색 그물로 막아 둔게 보이는데, 이것은 새들의 배설물 등을 막기 위해 설치해 둔 것입니다.
사진 3 (명정문)

명전문 안으로 들어와 앞을 보면 법전인 명전전과 조정이 보입니다. 법전이란 궁궐에서 임금이 공식적인 행사를 할 때 계시던 건물입니다. 그러면 조정은 공식적인 행사를 하던 너른 마당이 되는 셈이겠죠. 공식적인 행사는 5가지의 *국조 5례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예외가 있는데 길례 만큼은 구별되어 종묘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사진 4 (명정전과 조정)  

조정을 자세히 알아볼까요? 조정은 박석(울퉁불퉁한 검은 돌)이라는 돌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것은 행사가 있을 경우 신하들이 그곳에 오랫동안 서있어야 합니다. 오전에는 문제가 없지만, 오후가 되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잘 다듬어진 돌이라면 모두 반사되어 서있기가 힘들겠지요. 또한 훨씬 뜨거울 테니까요. 이런 사정을 보완하기 위해 박석의 돌은 울툴 불퉁한 검은 돌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주위는 회랑(지붕이 있는 복도)으로 둘러져 있어서 비가 오더라도 피할 수 있습니다.


박석


회랑


답도(가운데 계단)


답도 문양

조정에서 바라보는 명정전은 3단 정도의 차이로 높이 올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단을 높이 올리고 앞으로 내는 것을 월대라고 하는데 이러한 양식은 궁궐의 고급건물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니까 계단이 있겠죠?
 조정에서 명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크게 3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계단의 중간에는 답도라고 하여 봉황과 식물줄기가 뻗어 있는 조각이 새겨 있는데, 이것은 왕조의 영원을 기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답도란 무엇일까요? 글자 그대로 본다면 '밟고 간다'는 의미...
 여기서 우리는 임금이 어떻게 이곳을 지나 명정전으로 가는지 상상해 볼까요? 우선 임금이 조정의 중심부까지는 큰 가마를 타고 옵니다. 중간부분에서 작은 가마를 갈아타고 양쪽 신하의 도움을 받으며 답도를 지나가게 됩니다. 그럼 이제 명전전이 궁금하시죠?^^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국조5례 : (두산백과사전 참고)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등의 제사에 관한 길례(吉禮), 본국(本國) 및 이웃나라의 국상(國喪)이나 국장(國葬)에 관한 흉례(凶禮), 출정(出征) 및 반사(班師)에 관한 군례(軍禮), 국빈(國賓)을 맞이하고 보내는 빈례(賓禮), 즉위, 책봉, 국혼(國婚), 사연(賜宴), 노부(鹵簿) 등에 관한 가례(嘉禮) 등을 말한다.

 

 

 

 산을 오르며

윤숭봉

  아침부터 보슬비가 겨울의 끝 자락을 아쉬워하듯 창문을 적신다. 간단한 차림으로 산사의 아침을 맞으며, 토함산을 오르고 있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마음속에 약간의 긴장과 뭔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반쯤 오른 산 중턱의 약수터에서 목 한번 축이고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펴 본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여느 때처럼 나의 옷은 땀으로 젖어 있다.

   4년 전 처음 토함산을 오르던 때가 생각난다. 아니 처음은 아니듯, (처음은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른 것 같다.) 2년 후 두 번째쯤 혼자 산에 오르던 때인 것 같다.
 
사진 (경주 보문단지에서)

 군대 문제로 학교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름대로 바쁘게 살면서도 가슴 한 구석엔 왠지 모를 허무함에 모든 것들이 귀찮게 느껴지던 중의 어느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경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그렇게 경주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른 아침인지라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시장에서 김밥 한 줄 사 들고, 토함산 가는 버스에 올랐다.
불국사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 무렵 산 자락의 매서운 바람은 뺨을 얼얼하게 했지만, 등줄기엔 땀이 흐른다. 그렇게 대략 사오십 분 숨을 헐떡이며,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도 걸음을 재촉하여 계속 올라갔다. 무엇을 찾고자 오른 건 아니었지만, 올라가면 뭔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뭔지  모를 설레임을 앉고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섰지만, 보이는 건 싸늘한 토함산 자락의 푸른 소나무들과 가지만 남은 이름 모를 나무들뿐이었다.
 "이런 것이 공허함일까?" 하면서 속으로 외쳐 보았다. " 나는 무엇을 찾으려고 여기 왔는가."
 산 자락이 보이는 돌담에 앉아 한참을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고 앉아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부터 부모님, 친구들,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글을 쓰듯 내 머릿속을 스쳐가며, 그 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었고, 나도 모르게 산을 오르기 전의 공허함은 사라지고 왠지 모를 편안함이 마음속에 깃 드는 듯 했다.
"아! 이런 기분 때문에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구나!" 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약간의 희열을 느끼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기분을 나름대로 이해할 것 같았다.
 영국의 산악인 조지 멜러리는 왜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가? 라는 질문에 "Because it is there"이라고 대답했다지만, 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때 이후부터 나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시간 날 때마다 산에 올랐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며, "산에 가서 뭐하냐"고 농담조로 말하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의 이 행위에 친구들이 결코 동참하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나 자신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다르기에 나의 행위가 결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의 산행은 계속되었고, 그 장소는 항상 토함산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인 것 같다. 내려오면서 친구들에게 연락해 작별인사나 해야겠다. 이틀 후 나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왔고, 그 이후로 토함산은 오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나의 산행은 나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봉사

장남지

 "...▲의령=정곡면 4개 마을은 월현제방이 무너지면서 농경지 192㏊가 침수되고 한때 고립되기도 했다. 정곡면 예동마을 46가구 96명, 무곡마을 26가구 47명 등 92가구 주민 198명이 4일 오전까지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침수돼 외부와 두절됐다. 예동마을 이장 서유진(65)씨는 “힘들여 지은 농작물의 95% 이상이 물에 잠겨 살아갈 의욕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02.09.02 조선일보中

 학교측 내의 주체로 50명 남짓한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의 무곡마을이었다. 도중에 잘 익은 벼들과 아담한 마을들을 볼 수 있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진흙이 잔뜩 묻어 말라 버린 검푸른 회색 논만 보였다.
 윗마을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이곳은 제방이 무너져  물에 며칠째 잠겨 어떠한 수확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제법 잠자리도 날아다니고, 논에서는 수확을 위해 분주할 때지만, 논에는 한 사람도 볼 수 없었고, 그 대신 남루한 차림의 허수아비만 겨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곧 우리는 이장님(?)의 말씀을 따라 썩은 벼를 베어 내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모두들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남학생들은 벼를 배어 내고, 여학생들은 밴 벼를 가장자리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진흙 뻘로 범벅이 된 벼를 추스려 옮기는 작업에서 두어 번만 옮기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드팩으로 온몸을 둘러 버린 진흙 인간처럼 변해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대며 웃었을 뿐, 아무도 옷을 버렸다고 짜증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행복한 걸... 하는 얼굴들로~~

  한 세네 시간이 지났을 무렵 태어나 처음으로 '새참'이라는 것을 먹었다. 평소엔 관심도 없었던 생 두부에 잘 양념된 간장의 조화란,... 그 맛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도 먹고, 휴식도 가지기 위해 큰 평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할머니 몇 분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너무 힘을 뺀 탓인지 좀처럼 밥이 넘어가질 않아, 이럴 바엔 할머님 말동무나 되어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할머님들이 앉아 계신 틈에 살짝 끼어 들었다. 모두들 일흔 살은 훨씬 넘기신 분 같았다. 다들 얼굴은 조금 어두워 보였지만, 다가서는 우리들에게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할머니들을 보니 모두들 밤을 까시거나 콩을 고르고 계셨다." 조금 도와드릴까요" 하고 여쭤 봤더니 할머니께서는 이것은 정부에서 생계 지원을 위한 일종의 부업이라시며, 잘해야 되는데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밤은 1㎏을 까면 7000원, 콩도 그 정도..
 나는 평소에 닦아 오던 실력으로 할머니께 "자신 있습니다." 하고는 칼과 밤을 건네 받았다. 손가락을 다치신 할머니께 밴드와 약을 발라 드리고 밤을 까는데.. 왜 그렇게 앞이 잘 보이질 않는지...그렇게 휴식 시간을 할머님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보냈다.
  2시부터 다시 볏짚 나르기를 시작했는데,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몸이 따라주질 않아 무척 속상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고 같이 나르며 우리는 그 넓은 논에 있는 벼들을 말끔히 정리했다.
 가까운 집에 들러 씻기 위해 기다리는데, 모두들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장화가 불편해 벗고 일을 한 사람들 멋도 모르고 하얀 옷을 입고 온 사람들, 모두들 모습이 엉망이었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우리 모두는 그런 와중에서도 그 속에서 묻어 나는 보람을 느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배어 나는 기쁨도 보았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텔레비젼에서 밥먹듯이 접한 '수해', 어쩌면 나는 단지 브라운관을 통한 한편의 드라마처럼 여겼지 않았나 싶다. 그냥 그렇게, "아.. 불쌍하다." 하고 말만하며, 채널을 돌려버렸던 내가 떠올랐다.
 하얀 시멘트가 발라져 있는 집 벽에서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물에 잠겼던 흙 자국을 보며, 태풍이 지나갈 때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12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짜증 부렸던 내가 부끄러웠다.
 "힘들다, 힘들어 죽겠다." 일하는 내내 입에 달고 다니며, "다시는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선뜻 친구에게 말했지만, 만약 또 기회가 생긴다면, 당장 일어나 소매를 걷을 작정이다.
 채소 값이 올라서, 또는 과일 값이 올라서 속상해 하고, 짜증내는 것 보다, 자그마한 도움으로 그들에게 큰 힘이 되는 인심이 세상에 가득하길 바란다.

 

 

 

 20일간의 실크로드 여행기 ( 2002년 7월 24일~8월 12일)

강혜원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중국 서안까지 ☆ 첫째 날 ★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기다려온 실크로드여행. 내가 그토록 동경해오던 실크로드 여행이었지만, 평생 한번 가보기도 힘든 곳의 전 구간을 종주한다는 것에 왠지 부담 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왕 떠나는 여행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 나름대로 조금씩 준비를 하기로 했다.
 여행에 앞서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여행할 곳의 유적지 등에 대한 정보와 그곳의 지리적 위치 그리고 그 나라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며, 나름대로 조사를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미흡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2002년 7월24일 우리는 창원 역에서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미리 대기했어야만 했다. 다음날 9시까지 인천국제공항 K카운터 앞에서 집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에서 엄마와 언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예비 여행격인 기차 여행의 첫 발을 내딛었다.
 밤 기차 속에서 "과연 내가 20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걱정도 되고 떨리기도 하고...한 마디로 표현하면 설레임 반, 기대 반으로 들뜬 기분이었다.
 25일 새벽 3시 48분. 우리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지금부터 공항에 모여야 할 9시까지는 무려 5시간이나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아침을 먹기로 하고 알싸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식당에서 우거지국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였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기 위해 역 앞에서 기다리던 중, 주변에 잠들어 있는 노숙자들이 불쌍하게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멀쩡한 사람이 뭐든지 시도해 보려 하지 않고, 무능력하게 앉아있거나 잠을 자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다들 남 모를 개인사정들이 있겠지만 말이다. 공항 리무진 버스는 이른 아침 서울시내를 여유롭게 빠져나가, 서서히 영종도로 향해 갔다. 1시간쯤 뒤 '인천 영종도 국제공항'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는 맞이했다. 과연 최신식 공항답게 깔끔했으며, 규모도 엄청컸다. "역시 세계수준의 아시아 허브공항은 달라..." 라며,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9시 공항은 붐볐고 우리는 가이드를 만나기 위해 K카운터 앞 쪽으로 갔다. 그리고 출국까지 총 네 곳을 거쳐야 했는데, 먼저 출국 납부권을 내고 여권심사를 거쳐, 아주 철저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다음, 출국확인서와 여권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탑승 전 탑승권 확인을 했다. 이런 과정들이 지루하기도 했었지만, 하여튼 나는 "지금 즐거운 해외여행을 간다"는 마음이 앞섰다.
우리는 출국 전 검사를 모두 잘 마무리 한 뒤, 면세점을 지나 방콕행 비행기를 타러 갔다. "이제 슬슬~ 해외로 가는구나!" 실감이 나고 있었다.
 여행 일정에 따르면 우리는 11시40분 인천발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저녁 5시 10분에 도착한 뒤, 다시 7시50분에 파키스탄의 라호르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음.....밤 10시 30분에 파키스탄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비행기안의 내 자리는 창가 쪽. 이륙 한 뒤, 밑을 내려다본 우리나라, 그리고 그 안의 인천과 서해바다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고도 5000pt 이상의 구름 속을 날아가는 기분은 그 자체만으로도 해외 여행을 실감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중국 대륙을 지나 파키스탄으로 가기 전 우리는 홍콩에서 잠시 내려 구경하다가 방콕으로 가는 타이항공을 다시 탔다. 방콕은 우리나라보다 2시간 느렸다. 시계를 현지 시간으로 맞추고 방콕 공항 내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23번 케이트에서 타이항공 tg505로 바꿔 타고 파키스탄 라호르로 출발하면, 드디어 파키스탄으로 가는 것이다.
 공항 대기실엔 거의 파키스탄인 들이었는데, 모두들 펀잡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비행기안의 느낌도 지금까지와는 많이 달랐다. 영어는 거의 들리지 않고, 처음 듣는 언어, 파키스탄 특유의 사람냄새(?), 외국인이라곤, 우리 일행 몇몇 뿐, 이런 것들이 나를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비행기가 홍콩을 경유하는 바람에 우리의 일정은 조금 늦어졌고, 결국 새벽 1시가 되어서야 파키스탄의 수도 라호르에 도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시각으로 새벽 4시. 그 사이 기내식인 양고기를 먹지 못해 배도 고프고 잠도 몰려왔지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 내렸을 때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알~싸한 냄새와 함께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는 텁텁한 향기를 맡으며 공항에서 다시 입국확인 도장을 받았다. 드디어 라호르땅에 공식적으로 도착한 것이다.^^
  길을 가고 오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파키스탄인들의 모습에서 '동물원의 동물'이 된 기분이 틀기도 하고, 하여튼 좀 특이한 느낌이었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하면서 "우리를 쳐다보는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사이, 오늘 우리가 묵을 펄 콘티멘탈호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20일간 여행을 함께 하게 될 일행들이 처음으로 다 모인 것이다. 서로 인사하고, 여행의 기대감을 나눈 뒤, 룸 메이트를 정해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부터 시작될 투어의 기대감에 부풀며 파키스탄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만학(晩學)의 길

문옥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는 저녁 시간대, 보금자리가 아닌 배움의 터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뒤늦은 나이 심신이 피로할 그들이다보니 "학습에 대한 열의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하고 염려도 되지만,  그것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배우고 싶은 열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고단함도, 나이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는 진지한 눈빛은 마치 "우리는 이 시간이 기다려지고 또 지나고 나면 아쉬워진다." 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배움의 때를 놓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 가운데 지금은 여건이 허락되면서 늦게 나마, 다시 학업을 이어가는 분들도 더러 계신다. 그러다 보니 자식뻘의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진지하게 학업에 열중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 들을 보면서 "나라면 과연 지금 그 자리에서 배움을 향해 저렇게 진지한 눈빛을 보이며, 학구열을 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아마 지치고 힘들어 포기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절 탓에, 부모님 때문에 그러나 결국 내 탓이기도 할, 혹은 부모님을 위해, 형제들을 위해, 배움의 때를 포기했던 그들이기에 오늘이 더욱 값지고 소중하리라. 책장 한 장 한 장을 소중하게 넘기며, 이따금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분들의 열의에 나도 모르게 그들과 함께 앉고 싶어진다.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들과 시간들이 흘렸는지 잊은 채......
 얼마나 앉고 싶던 자리였겠는가?, 얼마나 펼쳐보고 싶었던 책이었겠는가? 젊은이들은 젊음이 있기에 세월은 멈추지 않을것 처럼, 마구 퍼내어도 줄지 않을것 마냥, 더러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는 그냥 흘러 보내는 것을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기억할 수 있는 한, 다 담아내려는 듯 귀와 눈 그리고 손에 의지한 채 흐르는 시간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연필을 잡은 그들의 손에 삶의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간간히 "아! 그랬었구나, 이런 거였구나" 하면서, 의문이 풀리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얼마나 아리고 쓰라렸겠는가? 배움의 갈증을 스스로 잠재우고 살아왔을 많은 시간, 그러면서 삼켰을 속 울음에 생각이 미치자 콧잔등이 찡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삼 그들의 용기에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들은 존경을 받아야 할 이 나라, 이 사회의 역군들이 아닌가.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헌신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삶이 윤택해진 것, 살기 좋은 사회 환경이 이룩된 것이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 그들은 자신을 위해 살찌우는 대신 가족을 위하고. 사회를 위해 열심히 땀 흘려, 오늘의 터전을 일궈온 산업의 역군 아니었던가.
 얼마 전 30대 후반의 주부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털어놓았을 때 난 기어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말해주던 그 주부의 이야기 중에 친정어머니가 그녀의 남편인 사위를 찾아와서
“여보게 고맙네, 내가 가르쳤어야 했는데, 자네가 대신해주네 그래. 에미가 내 대신으로 형제간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는데....자네가 내한을 풀어주네 그려 고맙네.”
이렇게 사위한테 말하며, 그동안 자식들이 드렸던 용돈을 모은 오 백만원을 학비에 보태라며 사위 손에 쥐어주었다는 것이다. 울먹이며, 그간의 얘기를 털어놓은 그녀의 얘기를 듣는 순간 마치 살아온 세월을 보는 것처럼 한편으론 벅찬 눈물이 번져왔다.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얘기했다. “그래서 옛말에 고생은 끝이 있다고 했나 보네요. 이제는 웃고 사는 날이 더 많을 거예요.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과 당신을 어머니로 둔 새 희망인 아이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했잖아요. 이제는 울지 말아요....”
 배움의 때를 놓친 이들 가운데는 공연히 기죽고 주눅 들어 살았을 시간들과, 내 의지대로 살 수없었던 삶이었기에 더 안타깝고 한스러웠을 것을 생각하면.......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다시 배움의 문을 두드리는 이 들도 있다. 지나간 시간의 아픔을 뒤로 한 채 새롭게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위해서 그들은 용기 있게 두 팔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새 희망을 안기 위한 것일 것이다.
 아이들한테 말한다. "너희가 성공하거든 이제는 부모님들께 기회를 드리도록 하라고. 놓쳐버렸을 시간들을 너희들이 찾아드리라고...", "환경이 밑천이니 열악한 환경일수록 더 희망을 갖자"고 말해본다. 힘든 만큼 일어서려는 의지가 굳건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어섰을 때 기쁨은 배가되지 않던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그 때란 하려고 하는 의지를 갖는 때라고 말할라치면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그 때가 아닐까?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가....
 만학도 분들의 용기와 희망에 갈채를 보내며, 그동안 여러분으로 인해 받았을 수많은 혜택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쿠지로의 여름

조혜숙

 아홉살 꼬마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는 할머니와 단 두 식구뿐입니다. 아빠는 일찍 돌아 가셨고 멀리 일하러 가셨다는 엄마에게는 단지 가끔 씩 소포만이 부쳐 올 따름 입니다.
마사오 이웃에는 한마디로 백수건달인 전직 야쿠자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와 비록 남자같은 무뚝뚝한 말투를 가졌지만 마음씨 착한 그의 아내 미키(기시모토 고요코)가 삽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친구들은 모두들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고 혼자 남은 마사오는 너무 심심해 합니다. 그는 마침 택배로 보내온 엄마의 소포를 받고 그 주소 속의 엄마를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집을 나서자마자 동네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마침 지나가다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된 미키는 기쿠지로에게 마사오와 동행하여 그를 안전하게 데려다 주도록 시킵니다. 하지만 기쿠지로는 여행경비로 받은 돈을 도박과 술로 다 날려버려 무일푼의 히치 하이크로 이어지는 어이없는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참으로 여러 사건을 거친 뒤에 엄마가 살고 있는 그 주소를 찾긴 했지만, 엄마가 이미 다른 가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울며 돌아서며 마사오에게 기쿠지는 거짓말로 달랩니다.
영화는 마사오의 엄마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대단원이 아니라 반환점을 만듭니다. 호랑이 아내에게 등 떠밀려 할 수 없이 아홉 살 꼬마의 보호자가 되긴 했지만, 어른으로서의 기쿠지로 점수는 마이너스입니다. 기쿠지는 매사에 기대도 별로 없고 말수도 극히 적은 왼손잡이 소년 마사오 보다도 오히려 사회적 행동규범이나 타인과의 접촉이 더 미숙합니다.
 아이 속에 어른이 들어있고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있는 것 같은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여행 속에서 두 사람의 성장을 이룹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인격적 성장이나 성격의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냥 보통 때 지냈듯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게 살아가겠지만, 슬프고 힘들 때 곁에 있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젠 외롭지 않게 된 것입니다.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가 1998년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자신의 다음 영화에선 폭력을 전혀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  처럼 이 영화에선 폭력장면 부분에 이르러 카메라가 아주 멀찍이 떨어져 딴청을 부리고, 다케시 특유의 개그로 아주 황당하고 엉뚱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의 내용은 특별하지 않지만, 기타노 다케시 스타일의 특별한 로드무비입니다.

 

 

 

 이집트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Egypt Library of Alexandria

채선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2시간 정도 달리면 지중해의 꽃이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다. 지금은 중동지역에서 최상으로 꼽히는 여름휴양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사막투어를 위해 시와로 가는 길에 하룻밤 머물렀던 알렉산드리아. 그 곳에서 보고 느낀 것은 지중해가 펼쳐진 유럽풍 도시의 휴양지다운 모습이 전부였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자 마자 신문기사를 통해 다시 접하게 되는 순간 나의 무지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고대 서양 학문의 요람이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역사의 미스터리 속으로 사라진지 2000년여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사실을 그 역사적인 도시에서 아침을 맞으면서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던 도시였는데, 다시 방문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B.C. 3세기 초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당시 세계 최대 도서관을 알렉산드리아에 건립하여 지중해와 중동, 인도 지역 문헌을 모았다. 약 50만개의 파피루스(서양종이의 원조) 두루마리를 소장했던 이 도서관은 각국에서 온 학자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도서관은 3세기 말 파괴돼 기록만 남아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역사 속에서 적어도 450년은 넘게 존재하였던 것이며,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다시 태어났다. 공사책임자인 모세 자란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을 재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인류 공동의 이상적인 도서관을 짓는 일일뿐 아니라 전설로 전해오는 고대 도서관을 되살리려는 취지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집트라는 한 나라만의 문화유산으로 재현된 것이 아닌 세계인의 것이며, 유네스코와 선진 각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사업을 주도한 이집트 정부가 5헥타르 부지를 제공하고, 아랍 산유국들이 6,500만 달러를 기부했으며, 88년 출범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공동기구'가 나머지 비용을 모금했다. 또한 일본은 시청각 시설, 노르웨이는 열람실 집기, 독일은 자료 자동 운송기기를 각각 기증하고, 프랑스는 도서관 직원 정보처리 교육을 맡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나머지 나라들은 분명 장서의 수를 늘리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역사의 미스터리 속으로 사라진 도서관의 형상이 궁금해졌다. 지금에 와서 재현하려니 설계도면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난감했을 것이다.  유네스코는 도서관 설계를 공모했고, 노르웨이 건축가 스노헤타를 뽑았다. 높이 32m, 10층 건물의 이 도서관은 지중해를 마주 본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고대 이집트 해시계를 연상케 하는 형상이며, 도서관 벽은 고대 이집트 문자들로 치장했다.

  건물의 형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400만 권의 장서가 목표지만, 현재까지 확보된 책은 50만 권이고, 이중에서 과거 알렉산드리아에 산재했던 지역 도서관들에서 수집된 고서들과, 5000여권에 이르는 10~18세기의 중요 과학도서들이 포함돼 있다.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제국의 힘은 바로 이 엄청난 도서관 아카데미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눈앞에 이익을 창출해내는 곳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 도서관의 실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한 예로, 미국 하버드대 장서 수는 학생 1인당 4백 74권, 버클리 대학도 1인당 2백 40권이나 되는데 반해 국내 최고 명문대라는 서울대는 1인당 62권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들이 세계랭킹 5백위 진입도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무리 학생들의 자질이 뛰어나도 방대한 자료를 손쉽게 찾아보고 연구할 수 없다면 자기 개발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복원하여 인류의 지적산실로 다시 태어나는 현장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때인 것 같다.

 

 

 

귀성길

이정숙

  남들이나 경험하는 줄 알았던 일을 나도 하게 되었다. 명절 날 고향으로 가는 귀성길이 그것이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에서 마련한 버스가 있다는 사실.
 귀성 버스를 타는 날 아침 준비를 하다보니, 마무리 짓지 않은 일이 생각났다. 하는 수 없이 큰 가방을 끌고서는 연구실로 갔다. 교내는 아침부터 고향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컴퓨터를 켜고 앉아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전 10시 버스를 탈려면 빨리 끝내야 하는데 생각대로 되질 않았지만, 간신히 10시쯤 마치고 버스 타는 곳으로 갔다.

 포도상자 6박스를 들고...같이 가기로 한 언니가 수업 때문에 늦게 온다고 하길래 대신 포도상자를 버스에 실은 것이다. 마침 연구실 오빠 차로 버스 정류장까지 포도상자를 싣고 갈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류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무질서하게 주차된 차들, 많은 사람들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우선 포도상자를 버스 짐 칸에 싣고 언니를 기다렸지만, 10시가 넘어서야 왔다. 그리고 작은 문제 하나가 버스 내에서 일어났다. 우리 좌석은 13과 14번인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게 아닌가?  난 그들에게 우리 자리임을 말했지만, 상대는 "자신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여기에 앉았다"고 얘기하는게 아닌가? 물론 그 사람 입장도 이해가 가지만 난 이해가 안갔다. 그래서 난 책임자에게 가서 "지정된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했더니만, 그 사람 말이 "따로 가면 안돼냐"고 하는게 아닌가. 같이 가려고 시간내서 함께 예약했는데...... . 좀 기분이 나빴다.
 난 "버스에서 모두 내려서 각자 지정된 자리에 앉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표정이란....... 나만 이상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나중에서야 우리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아침의 좋은 기분은 사라지고 언잖은 기분만 들었다.
 집에 간다니 너무 좋고 부모님을 뵐 생각을 하니 빨리 가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다행히 길은 막히지 않았다. 대구 근처까지 왔을 쯤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얼마나 맛있던지...... . 아침도 못 먹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인지, 아니면 가을 햇살 아래서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맛은 꿀 맛이었다. 꼭 소풍 나와서 먹는 기분^^.
 생각보다 늦은 오후 4시 30분쯤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린 종착지가 명륜동 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노포동이 아닌가. (참고로 노포동은 부산 외곽이라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와는 정반대의 곳이다.) 또 그것말고도 문제가 있었다. 바로 '포도'였다.  같이 간 언니의 포도 3박스, 부탁 받은 포도 3박스. 그 가운데 부탁받은 포도를 전해주기 위해 큰 길가에 서서 기다렸는데, 아마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포도 장사꾼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길가에 좌판을 벌여 놓은것 처럼 기다린지 20분쯤 뒤에야 포도를 전해 줄 수 있었다.
 이젠 포도도 전해줬고 해서 남은 포도 3박스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서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둘 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는데 그 바람에 집으로 가는 기쁨은 조금 미루었다.
 지하철역에 내려 물품 보관소를  찾았다. 둘 다 친구를 만나기 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언니의 포도 3박스는  그 속에 넣을 수 있었지만, 나의 큰 가방은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큰 가방을 끌며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가볍게 몸만 움직이는 언니가 어찌나 부럽던지.....  명절에 고향 집으로 향하던 나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난했었다.

 

 

 

 아름다운 헐벗음

이정숙

  며칠 사이에 찬바람이 불고 아침에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나 대기의 색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계절이 변하는 것이 이렇게 감쪽같고 때가 되면 모든 일이 스스로 일어나서 이름하여 자연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뜨거운 한낮에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그토록 곤욕스러운 여름이었는데 기온이 얼마나 내려갔는지 서늘한 기운에 살갗이 뾰족뾰족 서는군요. 계절이 변하는 것은 여자의 옷차림에서 제일 먼저 느낀다고 한다는데 거리엔 가을 빛과 차가워진 아침 저녁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한 멋진 사람들로 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저도 추석 명절에 청주 집에 내려가서 가을 옷들을 챙겨보려고 옥상에 있는 창고에서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낭 하나를 달랑 매고 낯선 곳을 이리저리 다니던 것도 벌써 6,7년이 되다보니 오래동안 입지 않은 채 상자 안에 넣어 두었던 옷들이 곰팡이가 쓸어 있었습니다. 유행은 지났지만 세탁을 잘 하면 모두가 입을만한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들이 좀 많더군요. 

 아주 요긴하고 정말 소중한 물건이라는 것도 막상 배낭에서 꺼내보면 대수롭지 않거나 없어도 어찌 되었든 살 수 있기 마련인데 그 많은 짐을 어깨에 붉은 피 멍이 생기도록 지고 다닌 것을 생각하면 정말 미련하고 신기합니다. 오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맘에 드는 옷을 보아도 그것을 짊어지고 다닐 것이 겁이 나서 사지 않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쉽게 건네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거창한 무소유 정신이라든지 박애정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짐을 좀 덜겠다는 요량 아니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 배낭만한 종교도 없습니다.
  물론 낯선 곳에서도 하루이틀 그것이 길어지다보면 머물 숙소도 생기고 다람쥐가 도토리 물어 나르듯 밖에서 하루에 하나씩만 들고 와도 한 두달이면 엄청난 살림이 되곤 했습니다. 떠날 때가 되면 그것들을 배낭에 다 넣어보려고 애쓰다가 가당치 않음을 알게 되고 천성인지 습관인지 무언가를 버리는 일에 아주 미숙한 저는 떠나는 일이 엄청난 곤욕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일종의 폐품증후군도 있어서 빈 병을 보면 꽃병을 만들까, 낡은 옷을 보면 천을 뜯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볼까 고심하여 숙소의 한 구석에는 그런 종류의 물건들이 또 한 꾸러미 쌓이기 마련이었지요.
  지난 4월 한국에 들어와 시작한 자취 살림으로 치자면 이젠 도저히 한 배낭으로는 옷가지도 싸기 어렵고 남의 살림을 얻어 온 것이긴 하나 가구까지 합치면 작은 트럭 하나는 불러야 할 상황이 되었답니다. 그래도 없으면 아쉬운지라 세탁해서 입을만한 옷들과 함께 읽을만한 책도 몇 권 더 챙겼답니다.
  서울 자취 집에 돌아와서 짐을 풀고 가져온 책을 꺼내보니 마침 헬렌 니어링이 그의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의 삶에 대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도 함께 있었습니다. 내키는대로 책장을 펼치니, 스코트 니어링이 양복을 선물로 보낸 친구에게 보낸 답장의 편지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대체로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이 품게 마련인, 남보다 우월한 느낌이 들게 지나치게 몸과 마음을 가꾸는 습관을 받아들이지 않네......덧붙여 말하자면 (작업복을 제외하고)구두 한 켤레, (추운 겨울에만 쓰는) 모자 하나, 외투 한 벌, 넥타이 한 두개, 허리띠 하나면 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네...."
 그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혼자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너무 족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족합니다....."
이제 단풍이 들고 나무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게 헐벗겠습니까?  하늘은 드높고 푸르르며, 산들은 여전히 높고 비탈지고....계절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절기
풍속

 

 입동, 소설

편집부

입동(立冬 24절기의 열 아홉 번째, 음력 10월, 양력 11월 7일, 8일쯤이다.)
상강(霜降)과 소설(小雪) 사이, 입동은 '겨울(冬)에 들어선다(立)'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다. 이 때쯤 한 해의 노고와 집안의 무사안녕을 위해 보통 고사를 지낸다.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쪄 두루 고사를 지낸 후, 이웃뿐만 아니라 농사에 애쓴 소까지 신경을 쓴다. 그리고 치계미(雉鷄米)라고 하여 봄 가을(春秋)로 양로잔치를 베풀었는데, 특히 입동(立冬), 동지(冬至), 제석(除夕)에 일정 연령이상 노인들에게는 치계미(雉鷄米)라 하여 선물을 드리는 관례가 보편화돼 있었다고 한다.

소설(小雪 24절기의 스무 번째. 음력 10월, 양력 11월 22일, 23일 쯤이다.)
입동에 물이 얼기 시작하여 소설에 이르면 눈(雪)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때는 무지개가 나타나지 않고, 천기(天氣)가 올라가고 지기(地氣)가 내려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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