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6(2002)년 9월호 Vo2.1,No.20. Date of Issue 1 Sept ISSN:1599-337X 

 

 

 

 

 

 

 

 

 

 

 사음수성독 우음수성유(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범수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는 뜻인 '사음수성독 우음수성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래 이 말은 지눌스님(知訥1158~1210)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 나오는 말로써 똑 같이 불교에 귀의하여도 '어떤 사람은 생사 문제에나 매달리지만, 현명한 이는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뒷문장과 연결되어 있다.
 불교를 믿는다는 말은 글이나 배우고 맹목적인 신행을 하는게 아니다. 그리고 경전을 배운다는 말은 믿고 따른다는 말로 실천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 불교 본래의 길인 깨달음과 자비의 실천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똑같이 불교라는 물을 마시지만 그 나아가는 방향은 너무나 다르다. 이를 현실에서 이야기하면 이럴 것이다.
 똑같이 법을 배우지만 어떤 이는 이것을 악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또 어떤 이는 막힌 곳을 뚫고 맺힌 곳을 풀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또 재물을 가지고 투기나 악한 곳에 사용하는 반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의로운 곳에 사용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약을 독으로 또 어떤 이는 독을 약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처럼 똑 같은 것을 가지고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인 '시비(是非 옳고 그름)'의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불교에서 '시비'를 논할 때 주로 '진리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즉 이 가르침은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누군가를 두고 '옳니, 그르니' 하는 식의 '시시비비'를 통해 감정적인 '다툼'으로 이어지는 '시비'와는 거리가 멀다.
 불교에서  '시와 비'는 논서에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를 '시와 비'라고 하지 않고 '파사현정*(破邪顯正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힌 것을 타파하고, 옳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즉 진리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근래에 이런 종류의 책을 본적이 있다. 어떤 이가 학벌이라는 권위와 대중의 인기를 내세워 '설'을 풀다가 뒷덜미가 잡혔는데, 여기서 논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 하는 시각에서 그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의 과격함은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문제를 바로 잡는 노력까지 흐릴 만큼 큰 오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보통 사람사이의 시비는 '그 일이 합당한가?'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가?' 등, 사리(事理)를 따라 정(正)과 사(邪)를 나누는 방식으로 문제를 헤아리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감정이나 성향등으로 판단했다가, 그것을 드러낼 때는 시비쪼로 다툼이라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감정적인 '폭로성' 내지 '비난성' 발언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또 상대 역시 감정적인 '맞불성' 발언으로 방어와 공격이 이루어지는 양상을 띠며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필자가 가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성숙한 비판 보다는 "저 사람은 어떻고.......", "그 곳은 어떻 고...."하는 식의 '시비'를 자주 듣게 된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는 먼저 일어나면 곤란해진다는게 필자의 경험이다. 이유는 미루어 짐작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옇튼 이럴 때 마다 생각나는 것은 <계초심학인문>에 '대객언담 불득양어가추 단찬원문불사(對客言談 不得揚於家醜 但讚院門佛事)'라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과 이야기할 때, 집안의 나쁜 점을 드러내기보다는 좋은 점을 찬탄하라'는 뜻으로 비난성의 시비 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왜 힘써 좋은 점은 찬탄하지 못하는가" 하고 반문해보고 싶다.
 오늘도 투쟁적인 '시비 (是非)'의 화살들이 난무할 것이다. 그 화살은 결국 자신을 향해 되돌아 온다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엄청난 양을 쏘아댈 것이다. 그러다 그 화살이 자신을 향해 되돌아 올 때 '다툼'이라는 방패로 막으려 들것이다. 이런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이 하는 일은 옳고 남이 하는 것은 틀렸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는게 보통이므로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려다 보니 어느 한 구석 마음에 드는게 없다. 결국 '시비'라는 독 화살을 꺼내 들고 무차별 공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이는 자신을 향해 '파사현정'이라는 '시비'의 화살을 과감히 쏠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견해나 독선, 아집 등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 蛇(뱀 사) 飮(마실 음) 水(물 수) 成(이룰 성) 毒(독 독) 牛(소 우) 飮(마실 음) 水(물 수) 成(이룰 성) 乳(젖 유)
* 破(깨뜨릴 파 ) 邪(삿될 사) 顯(나타낼 현) 正(바를 정)

 

 

 

 

지미연

 

 

<2002년 여름 사진 스케치 중에서>

 

 

 

 오아시스

조혜숙

 홍종두(설경구)는 전과 3범입니다. 뺑소니로 여름에 들어가 2년6 개월을 살고 나오니 한겨울이지만 여름 옷 차림입니다. 그래도 집을 찾아 가면서 엄마 선물까지 챙길 정도로 표정은 밝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집은 이사를 가버렸고 연락처도 막연합니다.
 저녁이 되어 배고프고 추워서 무조건 식당에 들어가 무전취식을 하다 출감한 날 다시 경찰서에 잡혀가고 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집을 찾아 가게 되지만 가족들은 모두 종두를 반겨하지 않습니다.
 종두는 뺑소니 사고 때 죽은 피해자의 집을 찾아 갔다가 피해자의 딸인 공주(문소리)를 보게 됩니다. 공주는 뇌성마비 장애인 입니다. 공주의 오빠와 올케는 공주를 낡은 서민아파트에 홀로 남겨둔 채 두 사람만 장애자 특혜아파트로 이사를 갑니다.

 옆 집 사람에게 공주의 식사를 부탁하는 댓가로 얼마의 돈을 준다는 것만을 내세우면서..........
 종두는 혼자 남겨진 공주가 안쓰러워서, 그 다음엔 호기심으로, 그렇게 만남은 계속되어집니다. 도저히 사회적응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종두와 눈에 띄면 손가락질 당하고 외면 당하는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의 보편적이지 못해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질기디 질긴 생명력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이란 사회에 적응을 잘하여 자신의 이익도 챙길 수 있고, 남들에게 피해도 주지 않으며, 남들에게 인정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두는 정상과 바보의 경계에 있습니다.
 어찌보면 영악한데, 어찌보면 너무나 한심합니다. 그러나 장애인 공주와 바보인 홍두의 눈맟춤으로 보면 두 사람의 영혼은 너무나 맑고 순수합니다.
 영화 오아시스는 멜로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멜로가 아닙니다. 우리의 상식이나 관습 속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사랑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엔 마치 가슴속에 습기 찬 바람이 가득 몰려와 축축하게 적셔 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창동감독은 소외된 인간들의 사랑이라 해서 별난 사랑으로 그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감히 욕심을 부리자면 누구나 다 해보는데 가장 본질에 가까운 사랑을 그리려고 했고, 사랑이 본질에 가장 가까워지면 가장 흉하고 추한 사람들의 사랑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의 만남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합니다.
 훌륭한 감독과 몸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두 배우(설경구, 문소리)의 연기가 기가 막히게 호흡이 잘 맞추어진 참으로 괜찮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밥상이라는 사원

이정미

  몇 년 전 저는 우연히 만난 일본 스님과 벨지움에 있는 그의 식이요법 센터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자취생활을 해오던 저는 식사라 하면 배고프지 않을 만큼이면 되었고, 그나마 그것도 불규칙하여 어떨 때에는 차라리 그런 알약이 있다면 식사를 기꺼이 대신하고 싶을 만큼 먹고 마시는 일이 귀찮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이 우연한 방문은 일대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 센터를 담당하고 있던 영양사 미사꼬는 저에게 '당신은 당신이 먹는 바로 그것이예요.'라고 영어속담을 인용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저에게 결핍된 영양소와 건강상태를 체크해 주고 필요한 식품들을 권해주었습니다.
 그녀와의 만남으로 저는 음식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역사를 가지고 식탁까지 오게 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음식이 부드러운 위장을 거쳐 온몸으로 흡수되고 배설되어 다시 자연으로 환원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존재들이 음식물로서 인간의 몸에서 용해된다는 것은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가 생각할 때 당신이 무얼 먹고 마시냐는 아주 진지한 물음일 것입니다.
 건강을 생각한다는 명목아래 폭력적으로 음식을 취하지는 않았는지, 급한 마음으로 음식을 몰아치며 먹지는 않았는지, 필요한 음식의 양보다 과하게 먹지는 않았는지 나에게 스스로 묻습니다.
 무엇을 먹느냐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음식을 맞이하는 식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당신은 식사에 앞서 어떤 감사의 인사를 하시나요? 얼마 전 저의 선생님께 들은 공양게 하나를 적어 보렵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들어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주림을 달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하 대중을 위하여 봉사하겠습니다.

주림을 달랠 만큼의 소박한 밥상에 앉아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성스러운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에게 이토록 귀한 음식을 준비해 주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잊지 마세요. 이 땅에 밥을 짓고 상을 차린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륜(年輪)

문옥선

 자동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지요. 눅눅한 날씨에 빨래 말리기가 고역이었는데 차에 습기가 유난히 많이 끼는 바람에 얼마간 이중으로 고통을 겪었답니다. 차가 전과는 다르게 희뿌옇게 습기가 차오르는 겁니다. 몰지 않고 세워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차들을 둘러보아도 차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물론 짙게 선팅을 한 차는 예외가 되겠지만) 유독 내 차안은 안개 속이었습니다.
 차가 오래되어서 그런가, 언제나 문을 꽉꽉 닫아두어서 그런가, 물기가 있어서 그러나 별별 생각을 다하며 문도 조금씩 열어보고, 신문지도 펼쳐놓고 습기 제거제도 사다 넣어보고...몇몇 가지를 시도해보았건만 습기는 걷히질 않더군요.
 차를 오래 다루어본 사람이 내 차를 몰아보더니 바닥에 습기가 꽉 차있다면서 볕 좋은 날 창문 열고 모두 걷어내 말려야겠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시트아래에 왜 그렇게 습기가 차 있단 말인가. 문 열어놓고 비 맞은 적이 한번도 없는데...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