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6(2002)년 12월호 Vol.2,No.23. Date of Issue 1 Dec ISSN:1599-337X 

 

 

 

 

 

 

 

 

 

 

 

 삼과(오온, 십이처 십팔계)

범수

 불교에서는 현상계를 '여러 가지 인연들에 의해 조건 지어진 연기의 세계'로 본다. 그러므로 신 같은 것에 의해 창조되었다든지, 고정된 것, 또는 그 이면에 이를 유지하는 실체 등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여래(如來)가 고안한 것이 아니며, 남이 창안(創案)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의 도리는 여래가 출세하나 안 하나, 법계(法界)에 상주(常住)하는 이치(理致)이다. 이에 여래는 연기의 법을 스스로 깨달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뤘다." <雜阿含經>, 《大正藏》, 卷 2, p.84.中 "云何緣起法 謂此有故彼有 (中略) 若佛出世 若未出世 此法常住 法住法界 彼如來自所覺知 成等正覺"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깨달음은 연기로 표현되며, 또한 연기는 인위적인 이론이 아니라, 현상계를 관통하는 철리(哲理)로 상주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리에 부합하기 위한 극단적인 행동, 맹목적인 믿음, 특별한 지침, 주장, 행동 강령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현상 세계를 있는 그대로를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교도들과의 관계에서도 그 가르침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에 촟점을 맞춰 잘못된 견해만을 지적할 뿐, 그 이상 어떤 물리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굳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 모든 존재 역시 그러하다는 관점을 따르지 않더라도 말이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대부분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우선으로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자기가 섬기는 신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었고 지배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른 신이나 가르침에 대하여 부정적이므로 때에 따라서는 '성전(聖戰,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성전(聖戰 holy war): 7∼8세기에 이교도에 대하여 수행된 이슬람교도의 대정복 전쟁도 유명하지만, 11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로마교황이 성지(聖地) 회복과 이교도 정복을 목표로 십자군을 조직하여 수행한 십자군전쟁(十字軍戰爭:1096∼1270)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출처: 야후 백과사전)
"마녀사냥(witch-hunting) 종교재판소가 마녀사냥을 전담하였지만, 세속법정이 마녀사냥을 주관하게 되면서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은 악마의 주장을 따르고, 다른 사람과 사회를 파괴한다는 마법사와 마녀를 처단하기 위한 지배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출처: 야후 백과사전)
 위에서 인용한 구절 가운데 '종교재판(宗敎裁判 inquisitio)'이란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자(異端者)를 탄압하기 위해 13세기에 전 그리스도교 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제도화한, 비인도적인 혹심한 재판.'(출처: 야후 백과사전)이다. 즉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 자를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가 여기서 역사의 한 단면을 들춰내는 것은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종교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태도는 자기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聖戰 holy war)이라는 이름으로 치뤄지는 전쟁이나 살상을 접하면서 "종교란 무엇인가?" 그리고 "도대체 그 종교들은 어떤 교리를 가졌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단지 '종교(宗敎)'와 종교에 해당하는 영어 'religion' 의 뜻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종교에 해당하는 영어 religion의 뜻을 살펴보면 "belief in one or more gods, ESP. the belief that he/she/ made the world and can control it, 으로 유일신 또는 다신을 믿으며,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신이 그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종교(宗敎)'라는 한문 단어를 풀어보면, '으뜸되는(宗) 가르침(敎)'을 말하는 것으로 ' 성인들의 가르침을 교(敎)라 하고, 그 가운데 진리에 일치하는 것 즉,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종(宗)'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영어 religion과 한문의 '종교(宗敎)'란 그 개념에서부터 다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즉 영어의 religion과 한문의 종교가 모두 종교라는 의미로 혼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개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나 관점 역시 차이가 나는데, 이를 요약하면 영어의 religion은  '신(God)' 개념을 바탕으로 이뤄진 말이며,  종교(宗敎)란 '진리(truth 眞理)'를 밝히려는 가르침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면 한문단어 종교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개념인 진리를 기준으로 영어 religion에 대하여 한 가지 반문해 보자.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간다고 하거나, 종교라는 이름의 재판을 통해 타종교인을 화형시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가르침 즉 religion이라면,  과연 이게 진리인가 아닌가"
 현실세계를 분류하는 방법 가운데 흔히 정신과 물질로 나누는 방법은 고래로부터 여러 종교나 가르침에서 이루어져 왔다. 불교에서도 오온설(五蘊說) 등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알아보자.
 정신과 물질로 대변되는 중생을 다섯가지 범주(五蘊)로 나누어 살피는 것을 오온설(五蘊說)이라고 한다. 오온이란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으로 오온설의 목적은 중생세계 가운데 실재하는 자아나, 불변하는 존재가 없다는 무아(無我, 五蘊假和合說)의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연기설
을 근거로 한다.
 <반야심경>에 "오온개공(五蘊皆空 정신과 물질은 모두 실체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오온이란 현상 세계의 일체를 물질과 정신으로 대분하여 다섯가지로 구분한 것으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색수상행식(色, 受, 想, 行, 識)' 가운데 색(色)은 우리의 육체에 해당하는 물질이 되고, 나머지 수상행식(受, 想, 行, 識)은 우리의 정신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각각을  살펴보자.
색온(色蘊) 물질 일반을 총칭하는 말로 변애(變碍)라고 정의 내린다. 여기서 변(變)이란 변화변천(變化變遷)으로 물질의 시간적인 존재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애(碍)란 질애(窒碍) 즉, 공간적 한 지점을 점령하는 것으로 물질의 공간적 존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온은 물질의 일반적인 총칭인 사대(四大 地水火風)와 그에서 파생된 것들로 이뤄져 있다.
수온(受蘊) 감정, 감각과 같은 고락의 감수(感受)작용으로 눈(眼觸), 귀(耳觸), 코(鼻觸), 혀(舌觸), 신체(身觸), 의식(意觸)의 육수(六受)를 통해 감각하게 된다.
상온(想蘊) 마음에 어떤 심상(心像)을 떠올리는 표상(表象) 작용으로, 외계의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인식할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대상을 우리의  마음(一心)에 받아들여(取入) 그 마음(一心)에 나타난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이 때 감각 기관은 눈(眼想身) 내지 의식(意想身) 등의 육상신(六想身)을 통한다.
행온(行蘊) 수(受), 상(想), 식(識) 이외의 모든 마음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의지 또는 잠재적 형성력이다.
식온(識蘊) 인식 판단의 작용, 식별 작용 또는 인식 주관으로서의 주체적 마음이다. 이 가운데 눈(眼識) 내지 의식(意識)을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그리고 육식은 각각 그 대상에 대하여 요별(了別) 작용을 일으킨다.
 위에서 보듯이 중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안 어디에도 실체라고 여길 만한 것은 없다. 즉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든지, 불변의 실체라는 것은 없다. 단지 여러 요인들이 서로 화합하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원한 자아나 불변의 존재 또는 신적인 존재를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겠지만, 현상세계의 진리이며 이치이다.
 오온설의 분류는 각각의 존재를 실체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제법에 대한 분류일 뿐이며, 궁극에는 모든 존재가 서로 원인과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떠나서,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진리의 본질을 덮어 버린다거나, 또는 형이상학적인 희론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오온설'의 입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에서 논해지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은 각각의 존재를 분석 조합하여, 모두 상호 의존한다는 연기성(緣起性)을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리고 특히 오온설(三科說)의 목적은 일체 제법의 진실상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밝히는데 있다.
고타마 붓다께서는 연기설에 입각한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여러 교설을 폈으며, 실천 방법 역시 이를 기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불교의 교설은 극단(極端)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대립과 차별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상적 근원은 연기설에 입각한 것으로 <아함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전도(顚倒)되어 있는 것은 유무(有無) 이변(二邊)에 의지하기 때문이다…(중략)…여래는 이변을 떠나 중도를 설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雜阿含經>, 《大正藏》, 卷 2, pp.67.下~67.上 "世人顚倒依於二邊 若有若 無…(中略)….如來離於二邊 說於中道 所謂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인간과 우주 사이에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이, 사물(事物)의 생멸 변화에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法則)이 있다. 그리고 존재(存在)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법칙이 있다."
사대(四大)란 일반적으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나눈다. 이것은 모든 물질(色法)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것으로 이해되나, 그 성질(體性)은 인연성(因緣性)이다.

 

 

 

 청계천 그 구수함에 대해서

도난주


(청계천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 입구)


(골목안 중고가전제품 가게들)


(도깨비 시장)


(고미술 가게)


(잡다한 물건을 파는 좌판가게)


(이구아나 등을 파는 동물가게)

 청계천을 복개한지 3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복개의 주인공격인 이명박씨가 다시금 복원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사실을 뒤로 하고 몇 달 전 친구들과 정처없이 돌아다닌 이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청개천 시장은 여느 재래시장처럼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대문 시장과 평화시장 등 여러 시장들이 청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다른 곳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특히 동대문을 지나 청개 고가를 따라 늘어서 있는 중고서적 가게와 고미술품 등 오래된 물건을 파는 가게는 이곳의 명물로 각인 되어있습니다.
1970년대 청개천을 복개하면서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지, 조금은 우중충한 분위기와 함께 좁은 골목들이 많은 곳입니다. 특히 중고서적, 고 미술품들이 있는 곳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서민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가게들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첫 번째 골목은 중고 전자제품을 파는 곳으로 없는게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중고 물품 가운데서도 단연 휴대폰의 중고밧데리와 충전기였습니다. 리어커에 몇 천개가 될 만큼 쌓여 있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오랫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며, 제 휴대폰과 같은 밧데리를 찾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좀 후회가 되는 것은 가격을 물어 보지 못한 점!. ^^
 두 번째 골목길에 들어서면, 소형 기계공장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대부분 용접기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합니다. 9월말이라 그런지 더운 기온과 뜨거운 햇살은 그을린 그들의 얼굴을 더욱 더 찡그리도록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청개천 시장의 또다른 특징은 도깨비 시장에 비해 위생면에선 떨어지지만, 맛으로 승부하는 간이 음식점들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도깨비 시장~ 이름만으로 흥분되지 않나요?
 번쩍번쩍 이리저리 정말 없는 것이 없습니다. 조금전의 청개천 시장의 특징이라고 설명드렸던 부분에 대하여, 이곳에서는 좀더 시원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다이얼을 돌리는 하얀색 전화기에서부터 2002년 다이어트 고무공까지 시대를 초월하는 곳이죠. 특히 간간히 보이는 것 가운데, 마늘 까는 기구와 파 까는 기구를 선전하는 아저씨들의 구수한 목소리, 그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비롯 한 단면이지만 우리 이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장의 대미는 항상 음식점이지요~ 특히 여자들에게는요.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군침이 도는군요. 천막을 지붕삼아 다닥다닥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큰 국자로 멸치 한 국물, 국수 한움큼 그리고 파와 당근을 넣으면 맛있는 국수 요리 끝~
얼마나 맛있는지 그리고 오뎅이 둥둥 떠있는 오뎅탕~ 몸에 좋은 닭 한 마리~ 보통 청개천 복개와 함께 시작된 음식들이라  깊이있는 맛을 느낄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 나오는 길 이곳에서는 특이한 동, 식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름이 기억 나는 것들로는 이구아나, 닭, 잉꼬, 연꽃, 옥잠화, 수련 등입니다. 아마 이런 가게들이 이곳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연출하는 것 일 겁니다.
 이제 지하철역 동대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뻘개진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웃었죠^^ 눈빛으로 통했습니다. 다음은 인사동으로 다시 인사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성주

불교에서 본 인간이란 무엇인가

                                                    -性珠-
Ⅰ.서론
Ⅱ. 석존의 출가 동기와 수행 및 깨달음
Ⅲ. 최초의 설법과 전도의 선언
Ⅳ. 초기 불교의 교육학적 인간관
  1.「苦」의 정의
  2. 불교의 인간관
  3. 고(苦)의 해결
  4.「苦」의 해결에 있어서의 불교적 특징
Ⅴ. 인간이해, 왜 중요한가?
  1.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2.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
  3. 죽음의 실상과 올바른 수행
Ⅵ. 불교의 인간 이해
Ⅶ. 현대적 의의
Ⅷ. 결론

Ⅴ. 인간 이해, 왜 중요한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인간이 의식적 사고를 가진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온 질문이다. 철학의 역사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 또한 인간의 이해를 빼고는 거론하기가 어렵다. 이 질문이 왜 이토록 중요한가? 그것은 이 질문이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 하는 존재의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나의 삶을 규정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실제로 자신을 향해 했을 때 그에 따른 답은 어떤 차원의 것이든 그의 삶을 변혁시키고 규정 지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예컨대, 그 질문에 "내가 누구야, 3남 1녀 중 장남이지" 하는 답을 얻었다고 하자. 별로 고차원적인 답은 아니라 하겠지만, 그 답은 그 사람의 삶을 온통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소중한 답이다. 이러한 답을 통해 그는 "3남 1녀 중 장남인 내가 이래서 되겠는가, 앞으로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삶의 자세가 확립될 수 있다. 이처럼 존재에 대한 물음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 나에 대한 물음과 이해는 중요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도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주석이자 해답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잘못 사는 것은 나의 참 모습을 모르는 무명(無明) 때문이며 따라서 잘 사는 길은 다름 아닌 나의 참 모습, 본래의 나(本來面目)에 눈뜨는 것임을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신다.
 선(禪)에서 '이 뭐꼬?'를 평생의 화두로 참구하는 것도, 나의 정체를 꿰뚫기 위한 정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정진을 통해 얻은 깨침은 바로 나의 참 존재에 대한 확실한 눈뜸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야말로 인간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오직 나의 참 모습에 눈뜨는 일이 불교 공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인간관을 살펴보려는 편집 의도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오늘날처럼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생명과의 관계가 파괴 일로를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는 일은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바른 인간 이해를 통해 인간과 자연, 다른 생명과의 바른 삶의 자세를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유신론(有神論) 숙명론(宿命論) 유물론(唯物論)의 세 가지의 종교 사상이 있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유신론의 경우 인간의 삶이 신(神)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 있고 숙명론의 경우 확정된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지며, 유물론은 물질의 구성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결정론적 인간 해석에 대하여 석가 세존은 단호히 비판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무엇에도 예속될 수 없는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이며 인간을 제약하는 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일 뿐이지 어떤 외적인 결정 요인이 없다고 천명하였다.

 1.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석가 세존은 인간이란 철저히 자유의지에 의한 존재라고 정의하여 인간 구성을 육근(六根)으로 파악한다. 인간의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여섯 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근이라는 말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어떤 것'을 의미하여 육근으로서의 인간은 그 어떤 외적 요인에 결정됨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운영해 나갈 것을 표현한다.
육근은 육경(六境)과 짝을 이룬다. 육경이란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의 여섯 가지 인식 대상을 뜻하는 말이다.
 육근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할 때 힘과 능력이 미치는 대상은 바로 육경이다. 육근과 육경이 함께 쓰이어 십이처(十二處)를 구성하며 "일체 존재란 오직 십이처(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법)"라고 석존은 말씀하셨다. 이는 우주에 온갖 것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존재로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인식하는 것이거나 인식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연물들이 인식 대상인 육경에 존재한다고 볼 때 육경에 절대적인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구성하는 주체인 육근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창조신이나 숙명적 원리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물질 또한 육근인 인간 존재들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십이처의 가르침인 것이다. 우주에는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인간 외적인 것은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삶을 전개해 나가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이다.

 2.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

 불교에서는 마음과 물질을 포함한 일체 존재의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을 밝히는 내용이 십팔계설과 육계설이다.
십팔계설은 십이처에 인식작용인 육식이 참여한 것으로 질적으로 변화된 두 존재 즉, 육식과 육근 육경이 요소로서 참여해 중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육계설은 일체는 몇 개의 기본적인 물질 요소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으로 인도 당시의 사대설을 받아들여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를 기본으로 삼아 이들 네 원소의 입장에서 십팔계를 재 조명함으로써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 공계(空界), 식계(識界)로 구성된 육계의 구조로 일체 존재를 파악한 것이다.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을 육계설에 설명하면, 지, 수, 화, 풍으로 대표되는 기본 존재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중층구조 속에 배열되어 주변 존재와의 관계 아래 자유로이 위치를 바꾸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어느 순간 집착이 가해져 정지된 일시적 형체를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집이 가해진 형체는 기본 존재들이 일시적으로 멈추어 있는 상황으로, 다시 흩어지려고 하는 매우 불안한 상태라서 아집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바로 이러한 불안한 느낌이 두 번째 단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안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일단 집착된 존재들은 나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불안하지만 '나'라고 재확인하는 세 번째 단계의 생각이 발생한다. 연이어 기본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붙여야 된다는 의도가 일어난다. 실지로 떨어진 기본 존재들을 하나의 존재로 결합시키는 네 번째 단계가 성립한다. 이러한 결합이 마무리되면 기본 존재들은 이전과는 모습이 다른 하나의 개체가 된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전과 비교하여 달라졌다고 파악하는 식별이 생긴다. 형체를 식별하는 기능 등의 다섯 가지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작용이 인간 개체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이렇게 성립된 생물의 한 부류에 불과하며 인간의 생명도 그런 과정 끝에 정규적인 생명 현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 개체의 형성의 근원적인 것은 일시적으로 집착된 물질적 '형체'와 그를 지속하기 위해 연이어 발생하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3. 죽음의 실상과 올바른 수행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 것은 삼세 윤회설(三世輪回說)과 삼법인설(三法印說)이다.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을 부정하고 삼법인설을 통해 영혼불멸론(靈魂不滅論)도 부정한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만일 고의로 지은 업이 있다면 그 과보를 받게 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라고 하여 삼세 윤회설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문구가 있다. 이 내용은 죽은 뒤 내세에서 과보를 받을 존재가 있음을 의미한다.
 삼법인설에서는 영혼 불멸론적인 입장이 아님을 강조한다. 흔히 영혼 불멸론자들은 "사후에도 영속하는 불멸의 마음 주체가 있어 이를 자아라고 부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이러한 주체를 육근 중에 의근(意根)에 포섭하고 있어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라고 단정한다.
 인간 개체의 형성 과정은 일시적인 '형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한다. 인간 존재란 상하 좌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 존재들을 한데 결합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의 핵심적인 원동력은 결합 작용(연기에 의한 인연취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력은 한동안 지탱하다 끝내 한계에 이르면 붕괴해 버린다. 이러한 결합작용의 종식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던 무수한 기본 존재들도 상하 좌우의 본래적인 위치로 주변 존재의 작용에 따라 오르내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죽음의 실상은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 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져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결합하고 흩어짐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인간의 괴로움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형체'를 '나'라고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집착하여 괴로움을 야기하는 형체,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오온(五蘊)의 경계를 멸함으로써 괴로움의 극복이 가능하다. 이러한 오온(五蘊)의 벽을 멸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 방편을 필요로 한다. 그 길은 우선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팔정도(八正道)와 사성제의 가르침을 실행하고 궁극적으로 일행삼매에 듦으로써 오온(五蘊)의 경계로부터 자유스러움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영겁의 생사고(生死苦)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생사(生死)의 수레바퀴에서 불사(不死)인 법(法)의 수레바퀴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Ⅵ. 불교의 인간 이해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먼저 부처님 가르침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는 근본불교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는 깨침을 본질로 하는 종교이다. 이 말은 깨침이야말로 불교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 별을 보고 이룬 큰 깨침이야말로 불교의 시원점이다. 불교의 모든 것은 그 깨침의 연역이라 할 수 있다. 경전이나 불상, 교리, 사상 등 모든 것들은 그 깨침으로부터 흘러나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 깨침의 원천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불교야말로 깨침으로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과 같은 깨침을 이루자는 가르침이자 종교이다.
 깨침을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인간 이해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불교의 인간 이해는 깨친 눈에 비친 나의 참 모습에 대한 고찰이기 때문이다. 깨친 눈에 비친 인간의 참 모습은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바탕이다. 이것은 불교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신뢰를 우리는 부처님의 '탄생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사자의 외침(獅子吼)을 하셨다고 한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天上天下唯我獨尊)"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탄생게는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탄생하시자마자 처음으로 외쳤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서는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다름 아닌 인간성의 일깨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인간의 보편적 성품, 본래의 나는 어떻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홀로 높은' 바탕이라는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최고의 찬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최후의 가르침에서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을 의존하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존하라. 그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홀로 높은 거룩한 바탕을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으므로 진리는 먼 곳이 아닌 본래의 나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근본불교의 핵심 내용인 연기(緣起)도 바로 이러한 인간 이해를 담고 있다. 연기란 깨침의 내용으로서 모든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더불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홀로 존재하는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우주와 서로 더불어 있는 큰 바탕이다. 즉, 모든 것과 더불어 존재하는 '하나'인 바탕이란 것이다. 이런 하나인 바탕이 바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홀로 높고 거룩한 바탕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또한 근본불교에서는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五蘊], 즉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흔히 이 다섯 가지 요소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오온은 우주적으로 연기적인 관계에 있다. 그래서 오온은 공(空)이며 무아(無我)인 것이다. 불자들이 법회 때마다 독송하는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五蘊皆空]"고 한 것도 바로 우주와 하나인 인간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온 역시 비좁은 인간이해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큰 바탕에 입각한 인간 이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근본불교에서는 인간에 대한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인간 이해를 연기적 인간관, 우주적 인간관, 하나인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란 홀로 존재하는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깨침의 바탕을 지니고 서로 더불어 존재하는 큰 바탕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에 대한 이러한 신뢰와 높은 평가는 대승불교에서 여래의 씨알[如來藏], 부처의 성품[佛性]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여래장경>에서는 "모든 생명들이 그대로 여래의 씨알"이라고 했으며 <열반경>에서는 "일체의 모든 생명들이 다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화엄경>에 이르러 마침내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는 직언으로 이어진다. 즉,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 중생이 부처라는 선불교(禪佛敎)의 표어들은 이런 불교의 인간이해를 기본으로 확립된 것이다.
 한국불교사상 우뚝한 스승 중의 한 분인 지눌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소개되어 있다. 한 스님이 귀종화상(歸宗和尙)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은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화상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네가 바로 부처, 중생이 그대로 부처란 말은 불교의 인간이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부처의 성품, 여래의 씨알, 부처인 나는 어떻다는 것인가? 첫째로 우주와 둘이 아닌 하나인 바탕이라는 것이다. 탄생게에서 말하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홀로 높은' 바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바탕은 나만 홀로 있는, 그래서 우주와 둘인 그런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큰 바탕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비좁게 살고 있을 뿐이다. 내 육신을 중심으로 울타리를 치고 안에 있는 것을 나로 알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 우주와 둘이 아닌 하나인 생명이다.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이란 말은 인간이란 그렇게 비좁은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바탕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다음으로 영원한 생명, 즉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것이다. 우주와 둘이 아닌 나, 참 나는 나고 죽는 것이 없다. '나다' 하는 소아적인 놈은 나고 죽는 것이 있겠지만, 그 비좁은 울타리가 없어져서 우주와 하나되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영원하고 불생불멸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 성철(性徹) 스님께서는 그 소식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열반경>에서는 이런 참 나를 청정하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바탕이라고 했다. 소아병적인 내가 멸했으므로 청정할 수밖에 없고 일체의 괴로움이 발붙일 수 없으니 항상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은 바로 이런 참 나에 돌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불교의 신행도 이러한 인간이해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신행이란 다름 아닌 부처의 씨알인 나를 확산시키고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처의 씨알이라면, 그 씨알을 잘 가꾸고 다듬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내가 곧 부처'라는 것도 신행이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허언(虛言)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아미타불을 염하고 좌선을 하는 것도 '내가 곧 부처'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러한 실천과 확인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행을 통해서 한 알의 씨알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면, 그곳에는 새들이 모여들어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줄 것이다. 그곳에는 작은 나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부처인 인간, 우주와 하나인 인간의 모습만이 있을 것이다. 정토란 바로 그런 세계일 것이다.

    Ⅶ. 현대적 의의
 
 불교의 연기적 인간관, 하나인 인간관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오늘날에 알맞게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환경 파괴, 인간성 상실이라는 병으로 앓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간에 대한 비좁은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이해한 인간은 다른 사람과 둘인 나, 자연과 둘인 나, 우주와 둘인 나이다. 이러한 인간이해를 통해서는 대립과 갈등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자연과 둘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정복하는 것이 인간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 자연이 파괴됨으로써 오히려 인간에게 많은 폐해가 오지 않았던가! 인간은 골프장을 짓기 위해 산을 파헤치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해쳐왔다. 장마철만 되면 겪게 되는 산사태, 이로 인한 인명피해, 수재민들의 고통, 누구의 탓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탓이다. 자연을 나와 다른 존재로 이해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인간들의 업보이다. 이제 이런 비좁은 인간이해에서 벗어나야 된다. 자연과 둘이 아닌 인간, 우주와 둘이 아닌 인간, 다른 사람과 둘이 아닌 나, 이것이 우리들 본래의 모습이다. 이런 본래의 바탕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교의 인간이해에 담겨진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불교가 이런 인간관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불교는 이런 인간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 불교는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종교로서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서 휴지 한 장 줍는 일,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일, 남을 헤치지 않는 일 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남을 헤쳐서는 안 되는가 하는 점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다.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내 몸처럼 아껴야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이런 연기적 인간관, 우주적 인간관, 하나인 인간관이 오늘날 더욱더 요청되는 것도 내가 사는 이곳이 곧 부처님의 세계이며,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들이기 때문이다.

     Ⅷ. 결론

 「고」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영원히 지속될 숙제이다. 앞에서 대강 살펴본 대로 불교에서 이「고」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충분히 주목되어져야 하리라고 믿는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불교의 합리성, 과학성이 만족을 주는 한 요인이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함프레이는 불교가 서양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는 몇 가지 이유를 "첫째, 불교에서는 아무런 독단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에 공히 만족을 주고 자신감을 주며, 과학,종교,철학,심리학, 논리학,예술 등도 포함해 있으며, 또한 불교에서는 바로 인간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며 조종한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세계적으로「고」의 피난처는 불교일 수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의 뜻에 부응키 위해서라도, 불교는 좀더 심오한 사상적 종교적 입장을 전개해 나가고,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는 종교여야 하리라고 믿는다.
 불교는 인간을 철저히 자유의지적 존재(自由意志的存在)로 규정하는 절대적 인간존중 사상(人間尊重思想)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참뜻과 함께 하는 마음수행을 통하여 죽음 및 윤회의 고리에서 풀려 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대 자유의 삶을 구가할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完>

 

 

 

 나비란

장득자

 도시 한 가운데 햇빛이 차단된 상가 건물 안에서 2000원으로 나비란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종일 있어도 바람 한번 쐴 수 없는 곳이지만, 하얗고 가느린 꽃을 피었습니다. 그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였지만,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치 우리들 모습처럼.....


 

나비란에 꽃이 피었습니다.
그 여린 모습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풍요를 축복하는 태양 빛 그러나 당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단절된 연(緣)
그것이 숙명이기에 삶의 희망을 꿈꾸며 내민 속살은
살아 있음을 몸부림치며 수주웁게 내민 모정입니다.
(사진: 나비란)

 

 

 

 소리 없는 메아리

문옥선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이 말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어디에서건 통용되는 말일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학교, 그리고 사회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사는 곳에는 여러 문제가 생기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견일치도 있겠으나 이견(異見)도 생기게 마련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하고 상대를 배려한다면 대립과 갈등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손해를 볼 수 없고 봐서도 안돼는 것이고 늘 양보의 몫은 타인으로 돌릴 때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동료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양보를 하고 배려를 하면 상대는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며 그 자신 타인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우리는 지금 그런 것을 베푸는 것을 기다리는데도 인색하기만 하다. 나 역시나 예외일수 없어서 한동안도 그랬었고 지금도 풀지 못한 문제로 맘 고생을 하고 있다.
 내가 겪고 있는 갈등은 말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다. 정작 내 자신은 큰 문제 거리로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기에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는데 상대는 그렇지가 않다는 데서 문제된 것이다. 사근사근하지 못한 성격이니 뚱하다면 뚱하고 달리 표현하고 거만해 보이고 그런가 보다.
 늘 묻고 지시를 받아서 일 처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난 혼자서 일 처리를 하는 편이고 묻기보다는 뭐든 내 스스로 알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묻지 않고 한 일들이 어긋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또 조금 어긋나면 어떤가. 경험을 쌓고 알아지는 계기가 되는 것을. 그런데 문제는 처음부터 묻고 지시를 받으면 그런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데 있다. 결국 사소한 문제였건만 대화를 미루다 보니 급기야 상대를 무시했다는 오해를 받고, 풀려고 노력 또한 하지 않으니 오해의 골은 더더욱 깊어지고 있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고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를 일이야 꼭 그렇게 따져야 한다지만, 그냥 말없는 사이에 알아질 수 있는 일도 많지 않던가.
 보여 지는 부분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기에 행간을 읽는 여유를 가진다면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지련만, 그러기엔 너무나 바쁜 세상인가.... 시간을 갖고 좀 기다려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만이 꼭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대화란 것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흘러나와야지 어떤 의무감에서 사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나를 너무나 힘겹게 한다. 남들은 쉽게 여기는 문제를 왜 난 이렇게 어렵게 느끼는 것일까.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어쩌다 마주친 타인과는 예의를 갖춰서 배려를 하면서 왜 가까운 사람들끼리 더 아픔을 주고 당해야만 하는 걸까.
 모든 문제는 시작이 있었고 그 시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각자의 주장은 다르게 되어있다. 내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과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 일치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 나에게 좀더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내리고 상대가 내 의견에 따라주어야만 한다는 당연한 맘 가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처음부터 아는 자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남의 비난과 두려움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하기도 하고 참아내기도 한다. 또한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아 겪게 되는 비난도 있을 수 있다.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때론 좋은 소리 좋은 말만을 듣고 싶고 또 하고 싶으며, 비난을 받을 때면 나 역시 괴롭고 슬프다.
 사람마다의 차이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서 맘은 더 아프다. 정말이지 상처는 주기도 싫고 받기도 싫은데...말이 굳이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은 것이 큰 잘못인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것이 꼭 잘못인 걸까? 때론 말하기도 힘들만큼 지칠 때도 있고. 나에게 열심히 말을 하더라도 난 쉬고 싶을 때도 많건만, 들어주고 있는 고충을 그들은 알기나 하는 걸까? 얼마나 나를 잘 알기에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일까. 말을 왜 잘 안하는지 묻기 이전에 말이 없는 것만이 마땅치 않은 일일까. 결코 남을 무시해서가 아니건만 서둘러 변명하려 들지 않는 태도가 그들에겐 오히려 소외감을 주었을까. 그래서 필요 없는 말도 때로는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가 보다. 그러나 결국 뭐든지 나 스스로 알아가야 하고 스스로 해야 하는 일들이지 않는가.
 나긋나긋하지 못한 내 성격처럼 내 말투 역시나 정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말수도 적다. 그러나 진실하고 싶고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같은 말도 정말 맛나게 잘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말을 많이 그리고 잘 하는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내 의사전달만은 분명하게 하려고 한다. 표현해서 아름다운 것은 그림과 글만이 아니라 말이기도 하다는 것 누가 모를까. 아쉽게도 그 세 가지가 나에게는 부족하기만 하다. 나도 때로는 전화기를 붙잡고 수다를 떨고도 싶다. 한없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은 그런 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말이지 말은 하고 싶을 때만 했으면 하고 혼자서 푸념도 해보지만, 요즘은 억지로라도 묻고 답하려고 애쓰고 있다. 어차피 더불어 사는 세상인데 내가 불편하지 않다고 내 방법대로만 살아서는 잘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웬만큼 배짱도 생기고 변죽도 늘어서 더러 묻기고 하고 답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어딜 가게 되면 내가 먼저 말을 건네며 아는 척을 한다. 남의 이해를 바라서라기보다는 내가 남을 이해하는 편이 훨씬 덜 지치고 덜 아프게 하는 나를 위한 길이기에. 노력해서 안돼는 것은 없는가보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엊그제 첫눈 내리는 날 CD를 하나 사기 위해서 음악사에 들렸다. 계절도 바뀌고 해도 바뀌어 가건만 음악은 예전에 들었던 곡들만 찾게 된다. 내가 원하는 곡의 CD가 없어서 듣기 편안한 곡으로 하나 추천을 해 달라고 했더니, 주인아저씨 흘끗 쳐다보면서 포크송 CD를 권해준다. 요즘 들어서 잔글씨 읽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곡목을 읽는데도 글씨가 흐릿해 돋보기를 써야 하나 속 말을 했더니, “그렇지요, 세월을 막을 수가 없지요.” 하기에. “아저씬 읽는데 전혀 불편해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러시나요?.” 했더니 “웬걸요, 이렇게 찡그려야만 보이는걸요.” 한다. 다른 테이프를 보면서 팔을 쭉 세우고 실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사모님께서는 어딜 가신모양이군요. 아주 멋있는 분이시던데요. 외조를 잘해주시는가 봅니다.” 말을 건넸다.
 음악사 옆에는 언제나 빨간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고, 검은 옷을 즐겨 입는 단아하게 생긴 중년의 여인은 입을 꼭 다문 채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기에 건넨 말이었다. "멋지긴요. 서울에서 지인이 내려와서 목포에 갔습니다." 하면서, 지인은 악단 장을 하셨던 분인데 그곳에서 열리는 가요제에 참석하러 내려왔고, 화포에 갔었다는 얘기며, 며칠 후에는 제주도에 가야할 거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 정말 그래요. 화포의 경관이 근사하지요. 그곳 식당에 요즘은 쭈꾸미 볶음으로 메뉴가 바뀌었더군요.“ 라고 거들었다. 그 말을 하고 나니 불현듯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지난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지 아저씨는 예전에 공직에 있었고 지병으로 퇴직한 후 서울 근교에서 카페를 운영하다 이곳에서 음악사를 운영하고 있노라고 얘기를 해주었다. 이곳도 예외 없이 불황이리라 생각하고 물었더니, 정직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살기가 힘든 세상이라며, "옛날 우리 선조들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요즘 세상에 이 말이 딱 들어맞아요." 한다. 음반판매시장의 어려운 실정을 그렇게 표현하면서 컴퓨터의 보급으로 음악 사이트를 통해 좋아하는 곡들을 쉽게 다운받아 들을 수 있어 마니아들이 아니고서는 음반이나 테이프를 거의 사지 않는 세상이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물론 업종을 바꾸는 방법이 있겠으나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이렇게 울고 싶으리만치 고통 겪는 반면에, 쉽게 좋은 음악을 듣고 접할 수 있어서 고마워하는 분들도 또한 많을 것이다.
 말을 하는데 있어서 일상의 잡다한 일들을 소소하게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다. 어느 한 쪽에만 가치를 부여할 일이 아닐 것이다.
울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고, 큰 소리를 쳐야만 쳐다보는 세상, 목소리 큰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라지만 세상은 그런 자 만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몇 마리의 새만이 하늘을 날뿐이다. 남을 배려하면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잘 산다고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들 한다. 말없이 견뎌가는 사람들은 못났고 부족하게 되어가는 세상사,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자기주장을 펴고 자기 뜻을 관철시켜야만 살 수 있는 것마냥 모질어 져버린 세상이다.
 울지 않는 아이, 울 수도 없는 아이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는 요즘 세상에 정말 사치스러운 감정일까? 그런데 나는 이런 사치를 부리고 싶다. 그것도 사치라면 즐기고 싶으리만치...그래서 말없는 거만함이 주는 불편을 감수하고 싶다.

 

 

 

 터키의 지하도시 카파도키아(Cappadocia)

채선화


(Cappadocia에서 동생과 함께)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12시간을 달리면 신비로운 자연경관을 가진 카파도키아가 있다. 카파도키아에 들어서기 전에 터키의 교통 수단 중 우리가 주로 이용했던 버스를 잠깐 둘러보자.  
 경쟁 업체들 때문인지 서비스가 좋은 편인 고속버스에서 두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데, 하나는 중간에 두어 번 정도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스킨을 나눠준다.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손바닥이며 손등에 스며들도록 도닥도닥거리고 있었다.

 도중에 음료와 과자를 나눠주는데 아마도 그런 것들 때문에 끈적해지거나 더러워진 손을 위한 배려인 듯했다. 또 하나는 난방이 잘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승객이 원하면 담요를 나눠주기도 했다. 생각지도 않은 서비스 덕분에 12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


 새벽에야 도착한 곳은 카파도키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괴레메 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는 이들이 있었는데 근처 숙소 주인들이었다. 인상 좋은 아저씨를 따라서 간 곳은 동굴을 약간 개조해서 만든 집이었다. 그리고 보니 주위엔 온통 깔때기를 엎어놓은 듯한 수백만 개의 기암괴석들이 갖가지 형태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Cappadocia) 

 좀 자고 움직여야지 하는 마음은 그 신비로운 경관을 대하자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암굴 속에 웅장한 대도시와 역사가 숨어 있는 이 곳  카파도키아의 땅을 빨리 밟아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 절대자의 존재를 생각케 되는 위대한 자연의 조화 앞에 서게 되면 다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약 300만년 전 화산 폭발로 인근 수백 킬로미터에는 거대한 용암층이 형성되었고 비바람과 홍수로 끊임없이 깎이고 닳아진 용암층은 물결의 방향에 따라 바람이 부는 대로 온갖 모양이 생겨났다. 보는 방향과 상상과 기분에 따라 끝없는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뾰족 솟은 응회암 바위를 깎고 뚫어서 거주 공간을 만들었다. 공기에 노출된 응회암은 단단한 연장에 쉽게 깎이는 이점이 있었다. 여러 개의 방은 물론이거니와 창고와 부엌, 소와 노새를 위한 우리도 있었다.


 (Cappadocia 내부)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화된 그들은 암굴을 파서 교회를 짓고, 벽면과 천장에 프레스코화를 그려 자신들의 신앙을 마음껏 표현했다.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다다를 수도 없는 가파른 절벽 가운데 바위를 파서 교회를 지었다.
가족 단위의 주거 공간에서 이번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깊은 웅덩이'라는 이름의 데린쿠유 마을, 거대한 지하 도시의 이름이다. 사람 머리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 속에 2만 명을 수용하는 어마어마한 지하 도시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허리를 숙이고 화살표를 따라 지하 세계의 탐험을 시작했고 표시된 방향 이외의 길로는 절대 가지 말라는 가이드의 거듭된 경고는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수많은 통로에 상하 좌우가 수십 갈래의 미로를 통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하 도시에서 종종 길을 잃고 헤맸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검게 그을린 부엌, 공동 우물,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지하 7층에서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은 주거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듯 하다.
로마 초기에는 주거 공간의 기능을 뛰어 넘어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또한 13세기에는 칭기즈칸이 이곳까지 진격해 왔을 때, 입구를 봉쇄한 지하 도시 속에서 완벽한 저항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불가사의한 지하 도시는 보존되어 있는 상태에 비해 현재로선 정확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인근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30여 개의 지하 도시가 더 있다는 것으로 봐서 앞으로도 관광객과 관련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미사어구로도 치장할 수 없는 위대한 자연경관 앞에서 인간의 겸손함은 당연한 듯 하다. 비할 바는 못되지만 자연의 파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환경 운동가들이 자연을 대하는 마음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I am sam

조혜숙

 "좋은 부모는 한결 같아야 하며, 인내를 가져야 하며, 비록 같이 있지 않더라도 늘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7살의 지능이어서 사회적 능력은 턱없이 모자라지만 아빠이기 때문에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샘의 이야기입니다.
 성인이지만 7살의 지능을 가진 정신지체 장애인인 샘(숀 펜)에게 이 세상에서 너무나 소중한 딸 루시(다코타 패닝)가 있습니다.

 비록 그 딸이 갈 곳 없는 어느 여인과 관계로 전혀 원하지 않았던 아이 였지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너무나 행복한 아빠입니다.
 병원 문을 나서면서 애 엄마는 도망쳐 버렸고, 혼자 남겨진 샘은 너무나 힘들게 루시를 키웁니다. 광장공포증이 있는 옆집에 사는 피아니스트 애니(다이앤 위스트)와, 다섯명의 장애인 친구들의 관심과 보살핌과 사랑 속에서 루시는 예쁘게 커 갑니다.
 루시가 8살이 되는 생일파티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7살지능의 샘이 8살이 되는 루시를 키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루시는 아동 보호소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루시는 양부모에게 양육을 받게 됩니다. 법정에서 루시를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되는 샘은 전화번호부의 광고를 보고 변호사 리타(미셸 파이퍼)를 찾아 갑니다.
 리타는 지금껏 패배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성질 급하고 잘난 척 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유명한 변호사입니다. 리타는 일부러 허세를 부리기 위해 샘의 무료변호를 맡습니다. 이제부터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이나 가슴 뭉클하게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던 장면들이 계속 되여 집니다.......
 샘이 루시를 되찾지 못하게 되는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리타가 샘을 찾아가 다그칩니다. 그때 샘이 "나는 할 수 없다"며 더 절망스러워 하자 리타는 샘에게 소리 칩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나는 행복하고 불안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보이냐고? 나도 아침에 일어나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모두 잘들 사는데, 나만 불행한거 같고, 항상 몇 배의 노력을 해도 자신없어 불안하고, 남편에게 버림 받았으며, 아이를 사랑할 줄 도 모른다, 사실은 내가 더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며....
 샘이 우는 리타를 달랩니다. 가장 따뜻한 감정의 체온으로. "당신은 잘할 수 있다고." 과연 행복의 기준이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또 법정에서 부모로서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딸이라 해도 양육할 권한이 없다고 증인이 말하자, 리타는 반문합니다. "당신의 아이가 만약 탈선을 했다면, 당신은 부모로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생각해 보지 않았겠냐고" 능력의 여부를 떠나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과 인내만이, 부모가 갖춰야 할 첫번째 덕목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 아이 엠 샘은 비틀즈의 노래로 융단폭격을 해댑니다. 영화 곳곳에 삽입시켜 대비시킨 비틀즈의 에피소드와 노래는, 영화의 매력을 한층 더해 줍니다. 숀 펜의 정신지체 장애인의 완벽한 연기는 그에 깃든 고결한 영혼의 느낌마저도 전달합니다. 더구나 아빠의 슬픔을 이해하는 듯한 총명한 눈빛과 아이의 표정을, 기막히게 연기한 다코다 패닝의 연기는, 영화의 늪 속에 행복하게 빠질 수 있게 했습니다.

 

 

 

 20일간의 실크로드 여행기

강혜원

파키스탄의 실제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했다. '아나드깔리 바자르'에서 복숭아를 루피로 직접 사먹고, 콜라도 먹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닮은 콜라 파는 총각은 계산을 잘 못하는 상인이었다.얼굴만 잘 생겨 가지고는...짧은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저녁을 먹으러 숙소에 돌아왔고 맛있는 식사후 로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는데, 왠지 상류층의 아름다운 남녀가 많이 오는 것 같아 행사가 있나 싶어서 물어보니 밤12시 정각에 지하 연회장에서 결혼식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말 너무나 예뻤다. 또 내가 그런 곳에 빠질 수 있나??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룸메이트 언니와 지하로 내려갔다. 음료수도 주고 웃으며 대우를 잘해주었다.
밤새도록 한다는 결혼식.우리는 한시간정도 있다가 내일을 위해 나왔다.아름다운 신부 이면엔, 우리나라 조선시대만큼이나 보수적으로 여자가 밖에 나다닐 수 없고 얼굴에 천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하며, 여자가 불리한 여러 상황이나 조건들을 평생의 숙명으로 살아야하는 운명이었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다시 느꼈다.
 내 방이 있는 호텔 3층을 총 전담하는 파키스탄어로 '아줌마'라는 이름을 가진 자칭 "sweety" 직원이랑 예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영어를 좀더 잘했으면 좋았을걸...'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황홀했던 결혼식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다음날은 6.7.8시간이었다. 6시에 일어나 7시에 식사하고 8시에 출발한다는 말이다.오늘은 라호르에서 라왈핀디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 서두르는 것이다.

이동 중 얄라모사 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짜빠티와 콜라를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오늘 갈 곳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파이샬모스크'부터 해서 대통령궁, 라왈핀디호수, 다마니꼬 전망대 ,바자르 등이었다. 여러 개의 라왈핀디 중 파키스탄의 수도인 계획도시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파이샬모스크는 어제 보았던 바드샤히 모스크보다 훨씬 크고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모스크 전경)

 연필 모양으로 여러개 솟은 탑은 정말 어떻게 세웠을지...거대한 모스크 내부를 감상하고 나와 대통령궁을 지나 전망대에 올랐는데,(일명,북악스카이) 가는 길이 미시령 고개와 흡사했다.
 다마니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이슬라마바드 시내는 바둑판처럼 잘 짜여져 있었고 깨끗했다.시내 전경을 감상하고서 내려와 라왈핀디 호수로 갔는데 더운 날씨에 남자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이 부러웠지만,호수가 나에게 어떤 감동이나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우리는 잠시 쉬다가 라자바자르에 들렀다. 사람들 속에 부대껴 망고랑 참외 맛나는 메론을 사고 이것저것 구경했다.여기서 아버지와 남 동생은 파키스탄의 전통의상인 '펀잡드레스'를 사 입었다. 사람들이 모두 잘 어울린다고 동생과 아버지께 '딱'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지 그후로 계속 입고 다니셨다.숙소는 전날과 같은 체인인 '펄 콘티넨탈'이었다. 내일은 또 '탁실라'로 이동하기 때문에 푹 자두어야 했다 벌써부터 몸이 지쳐온다.
 

 

 

 

특수학교 보조 교사를 지내며

장남지


 (2-2반 아이들과 함께)

 제가 2학기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2-2반 아이들은 특수 학에서 진단하는 정서장애를 가진 아이들입니다. 한 반에 7명으로 구성된 우리 반은 공부 잘하는 먹보 상현이, 컴퓨터 잘하는 재원이 퍼즐 잘하는 용희, 비디오를 좋아하는 지수, 뛰기 선수인 민영이, 안아 주기 좋아하는 준호, 식물을 좋아하는 진영이, 이렇게 7명입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함께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저는 그 동안 이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생활하며, 이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저의 많은 편견들은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서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자기 세계가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위치나 물건이 가장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반 지수는 빨간 사탕을 싫어하고, 김치를 제일 좋아합니다. 다만 그 정도가 조금 심각해서 그렇죠..^^ 또 어떤 지식이나 내용을 받아들이는 방법 또한 다양합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각각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을 잘 이해하고 교육할 수 있도록 따로 특수 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들의 교육 수준은 아주 낮은 편입니다. 하지만, 학교를 통해 조금씩 우리들의 수용 방식이나 의사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면서 점차 사회와 대화하는 방식을 알아 나가죠. 그런 면에서 우리 반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하는 말을 하실 때에는 단호하고 엄한 명령조로 말하십니다. 이를테면 "앉자", "이리와", "담아". 같이 말입니다. 저는 처음에 "너무하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더 다정하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기 가서 장난감 담아라"..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긴말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항상 엄하게 아이들을 가르치시지만 그 크신 손으로 아이들의 사탕을 까서 먹이시는 모습을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에서 조금씩 우리가 사는 사회와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받아들이지 못함에 떼를 쓰면서 투정도 부립니다. 하지만... 거북이가 표나지는 않지만, 다른 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듯이.. 그렇게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봤을 땐 앉아 있는 것도 어렵던 진영이가 이젠 혼자 일어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도 있게 되었고, 지수도 처음엔 그림 속의 물건을 말해도 구분하지 못했는데 이젠 제법 잘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분명히 일반 학급에 다니는 아이들과는 달랐습니다. 말도 잘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사 표현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똑같은 아이들입니다. 우리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은 언젠가 그 아이들이 길을 잘 모르는 어른에게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는 아이가 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대

조장우

그대 느끼다
너를 잊어 버렸네
 
이미
시간속으로
멀어져 간 슬픔을
다시 꺼내어
그대를 느끼다
너를 잊어버렸네
 
난 잊어버렸네
그대가 너 였음을

 

 

절기
풍속

 

 소한, 대한

편집부

 소한(小寒 24절기 중 스물셋째. 음력 12월, 양력 1월 5일, 6일 쯤이다.)
 절후의 이름으로 보아 대한(大寒) 때가 가장 추울 것 같지만,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소한(小寒) 때가 가장 춥다고 한다.

대한(大寒 24절기의 마지막. 음력 12월 중기(中氣), 양력 1월 20일, 21일 쯤이다.)
겨울을 매듭 짖는 절후로 보아, 대한의 마지막 날을 절분(節分)이라 하였으며, 계절적으로는 연말일(年末日)로 여겼다. 풍속에서는 이 날 밤을 '해넘이'라  부르고, 콩을 방 등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았다. 절분 다음날은 정월절(正月節)인 입춘의 시작일로, 이 날을 절월력(節月曆)의 연초로 여겼다.

 

 내년은 불기(佛紀) 2547년, 단기(檀君紀元) 4336년인 계미년(癸未年)입니다. 다음 해 1월호는 원고 대신 신년 연하장(年賀狀)으로 갈음할 예정이오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올 한해 동안 바쁘신 가운데서도 나눔과 어울림이라는 마음으로 전자잡지 월간 좋은인연에 원고를 보내주셨던 모든 님, 그리고 구독해주신 모든 분들께 자비광명이 가득하시길 불 보살님전에 발원하며, 다음해에도 좋은인연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전자잡지 월간 좋은인연의 원만한 발행과 지속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관심과 후원금을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후원금은 전자잡지 월간 좋은인연의 발행과 유지관리에만 쓰여지고 있습니다. 거래 내역은 모두 영수처리하고 있으니, 열람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전자잡지 월간 좋은인연 통장에 성금을 보내실 때 사용하신 성함으로 전자 메일을 보내주시면 정성껏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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