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zine 월간 좋은인연 불기 2546(2002)년 12월호 Vol.2,No.23. Date of Issue 1 Dec ISSN:1599-337X 

 

 

 

 

 

 

 

 

 

 

 

 삼과(오온, 십이처 십팔계)

범수

 불교에서는 현상계를 '여러 가지 인연들에 의해 조건 지어진 연기의 세계'로 본다. 그러므로 신 같은 것에 의해 창조되었다든지, 고정된 것, 또는 그 이면에 이를 유지하는 실체 등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여래(如來)가 고안한 것이 아니며, 남이 창안(創案)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의 도리는 여래가 출세하나 안 하나, 법계(法界)에 상주(常住)하는 이치(理致)이다. 이에 여래는 연기의 법을 스스로 깨달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뤘다." <雜阿含經>, 《大正藏》, 卷 2, p.84.中 "云何緣起法 謂此有故彼有 (中略) 若佛出世 若未出世 此法常住 法住法界 彼如來自所覺知 成等正覺"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깨달음은 연기로 표현되며, 또한 연기는 인위적인 이론이 아니라, 현상계를 관통하는 철리(哲理)로 상주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리에 부합하기 위한 극단적인 행동, 맹목적인 믿음, 특별한 지침, 주장, 행동 강령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현상 세계를 있는 그대로를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교도들과의 관계에서도 그 가르침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에 촟점을 맞춰 잘못된 견해만을 지적할 뿐, 그 이상 어떤 물리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굳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 모든 존재 역시 그러하다는 관점을 따르지 않더라도 말이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대부분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우선으로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자기가 섬기는 신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었고 지배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른 신이나 가르침에 대하여 부정적이므로 때에 따라서는 '성전(聖戰,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성전(聖戰 holy war): 7∼8세기에 이교도에 대하여 수행된 이슬람교도의 대정복 전쟁도 유명하지만, 11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로마교황이 성지(聖地) 회복과 이교도 정복을 목표로 십자군을 조직하여 수행한 십자군전쟁(十字軍戰爭:1096∼1270)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출처: 야후 백과사전)
"마녀사냥(witch-hunting) 종교재판소가 마녀사냥을 전담하였지만, 세속법정이 마녀사냥을 주관하게 되면서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은 악마의 주장을 따르고, 다른 사람과 사회를 파괴한다는 마법사와 마녀를 처단하기 위한 지배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출처: 야후 백과사전)
 위에서 인용한 구절 가운데 '종교재판(宗敎裁判 inquisitio)'이란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자(異端者)를 탄압하기 위해 13세기에 전 그리스도교 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제도화한, 비인도적인 혹심한 재판.'(출처: 야후 백과사전)이다. 즉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 자를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가 여기서 역사의 한 단면을 들춰내는 것은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종교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태도는 자기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聖戰 holy war)이라는 이름으로 치뤄지는 전쟁이나 살상을 접하면서 "종교란 무엇인가?" 그리고 "도대체 그 종교들은 어떤 교리를 가졌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단지 '종교(宗敎)'와 종교에 해당하는 영어 'religion' 의 뜻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종교에 해당하는 영어 religion의 뜻을 살펴보면 "belief in one or more gods, ESP. the belief that he/she/ made the world and can control it, 으로 유일신 또는 다신을 믿으며,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신이 그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종교(宗敎)'라는 한문 단어를 풀어보면, '으뜸되는(宗) 가르침(敎)'을 말하는 것으로 ' 성인들의 가르침을 교(敎)라 하고, 그 가운데 진리에 일치하는 것 즉,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종(宗)'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영어 religion과 한문의 '종교(宗敎)'란 그 개념에서부터 다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즉 영어의 religion과 한문의 종교가 모두 종교라는 의미로 혼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개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나 관점 역시 차이가 나는데, 이를 요약하면 영어의 religion은  '신(God)' 개념을 바탕으로 이뤄진 말이며,  종교(宗敎)란 '진리(truth 眞理)'를 밝히려는 가르침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면 한문단어 종교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개념인 진리를 기준으로 영어 religion에 대하여 한 가지 반문해 보자. "자기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간다고 하거나, 종교라는 이름의 재판을 통해 타종교인을 화형시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가르침 즉 religion이라면,  과연 이게 진리인가 아닌가"
 현실세계를 분류하는 방법 가운데 흔히 정신과 물질로 나누는 방법은 고래로부터 여러 종교나 가르침에서 이루어져 왔다. 불교에서도 오온설(五蘊說) 등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알아보자.
 정신과 물질로 대변되는 중생을 다섯가지 범주(五蘊)로 나누어 살피는 것을 오온설(五蘊說)이라고 한다. 오온이란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으로 오온설의 목적은 중생세계 가운데 실재하는 자아나, 불변하는 존재가 없다는 무아(無我, 五蘊假和合說)의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연기설
을 근거로 한다.
 <반야심경>에 "오온개공(五蘊皆空 정신과 물질은 모두 실체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오온이란 현상 세계의 일체를 물질과 정신으로 대분하여 다섯가지로 구분한 것으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색수상행식(色, 受, 想, 行, 識)' 가운데 색(色)은 우리의 육체에 해당하는 물질이 되고, 나머지 수상행식(受, 想, 行, 識)은 우리의 정신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각각을  살펴보자.
색온(色蘊) 물질 일반을 총칭하는 말로 변애(變碍)라고 정의 내린다. 여기서 변(變)이란 변화변천(變化變遷)으로 물질의 시간적인 존재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애(碍)란 질애(窒碍) 즉, 공간적 한 지점을 점령하는 것으로 물질의 공간적 존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온은 물질의 일반적인 총칭인 사대(四大 地水火風)와 그에서 파생된 것들로 이뤄져 있다.
수온(受蘊) 감정, 감각과 같은 고락의 감수(感受)작용으로 눈(眼觸), 귀(耳觸), 코(鼻觸), 혀(舌觸), 신체(身觸), 의식(意觸)의 육수(六受)를 통해 감각하게 된다.
상온(想蘊) 마음에 어떤 심상(心像)을 떠올리는 표상(表象) 작용으로, 외계의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인식할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대상을 우리의  마음(一心)에 받아들여(取入) 그 마음(一心)에 나타난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이 때 감각 기관은 눈(眼想身) 내지 의식(意想身) 등의 육상신(六想身)을 통한다.
행온(行蘊) 수(受), 상(想), 식(識) 이외의 모든 마음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의지 또는 잠재적 형성력이다.
식온(識蘊) 인식 판단의 작용, 식별 작용 또는 인식 주관으로서의 주체적 마음이다. 이 가운데 눈(眼識) 내지 의식(意識)을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그리고 육식은 각각 그 대상에 대하여 요별(了別) 작용을 일으킨다.
 위에서 보듯이 중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안 어디에도 실체라고 여길 만한 것은 없다. 즉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든지, 불변의 실체라는 것은 없다. 단지 여러 요인들이 서로 화합하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원한 자아나 불변의 존재 또는 신적인 존재를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겠지만, 현상세계의 진리이며 이치이다.
 오온설의 분류는 각각의 존재를 실체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제법에 대한 분류일 뿐이며, 궁극에는 모든 존재가 서로 원인과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떠나서,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진리의 본질을 덮어 버린다거나, 또는 형이상학적인 희론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오온설'의 입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에서 논해지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은 각각의 존재를 분석 조합하여, 모두 상호 의존한다는 연기성(緣起性)을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리고 특히 오온설(三科說)의 목적은 일체 제법의 진실상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밝히는데 있다.
고타마 붓다께서는 연기설에 입각한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여러 교설을 폈으며, 실천 방법 역시 이를 기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불교의 교설은 극단(極端)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대립과 차별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상적 근원은 연기설에 입각한 것으로 <아함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전도(顚倒)되어 있는 것은 유무(有無) 이변(二邊)에 의지하기 때문이다…(중략)…여래는 이변을 떠나 중도를 설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雜阿含經>, 《大正藏》, 卷 2, pp.67.下~67.上 "世人顚倒依於二邊 若有若 無…(中略)….如來離於二邊 說於中道 所謂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인간과 우주 사이에는 인과법칙(因果法則)이, 사물(事物)의 생멸 변화에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法則)이 있다. 그리고 존재(存在)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법칙이 있다."
사대(四大)란 일반적으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나눈다. 이것은 모든 물질(色法)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것으로 이해되나, 그 성질(體性)은 인연성(因緣性)이다.

 

 

 

 청계천 그 구수함에 대해서

도난주


(청계천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 입구)


(골목안 중고가전제품 가게들)


(도깨비 시장)


(고미술 가게)


(잡다한 물건을 파는 좌판가게)


(이구아나 등을 파는 동물가게)

 청계천을 복개한지 3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복개의 주인공격인 이명박씨가 다시금 복원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사실을 뒤로 하고 몇 달 전 친구들과 정처없이 돌아다닌 이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청개천 시장은 여느 재래시장처럼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대문 시장과 평화시장 등 여러 시장들이 청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다른 곳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특히 동대문을 지나 청개 고가를 따라 늘어서 있는 중고서적 가게와 고미술품 등 오래된 물건을 파는 가게는 이곳의 명물로 각인 되어있습니다.
1970년대 청개천을 복개하면서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지, 조금은 우중충한 분위기와 함께 좁은 골목들이 많은 곳입니다. 특히 중고서적, 고 미술품들이 있는 곳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서민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가게들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첫 번째 골목은 중고 전자제품을 파는 곳으로 없는게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중고 물품 가운데서도 단연 휴대폰의 중고밧데리와 충전기였습니다. 리어커에 몇 천개가 될 만큼 쌓여 있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오랫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며, 제 휴대폰과 같은 밧데리를 찾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좀 후회가 되는 것은 가격을 물어 보지 못한 점!. ^^
 두 번째 골목길에 들어서면, 소형 기계공장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대부분 용접기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합니다. 9월말이라 그런지 더운 기온과 뜨거운 햇살은 그을린 그들의 얼굴을 더욱 더 찡그리도록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청개천 시장의 또다른 특징은 도깨비 시장에 비해 위생면에선 떨어지지만, 맛으로 승부하는 간이 음식점들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도깨비 시장~ 이름만으로 흥분되지 않나요?
 번쩍번쩍 이리저리 정말 없는 것이 없습니다. 조금전의 청개천 시장의 특징이라고 설명드렸던 부분에 대하여, 이곳에서는 좀더 시원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다이얼을 돌리는 하얀색 전화기에서부터 2002년 다이어트 고무공까지 시대를 초월하는 곳이죠. 특히 간간히 보이는 것 가운데, 마늘 까는 기구와 파 까는 기구를 선전하는 아저씨들의 구수한 목소리, 그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비롯 한 단면이지만 우리 이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장의 대미는 항상 음식점이지요~ 특히 여자들에게는요.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군침이 도는군요. 천막을 지붕삼아 다닥다닥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큰 국자로 멸치 한 국물, 국수 한움큼 그리고 파와 당근을 넣으면 맛있는 국수 요리 끝~
얼마나 맛있는지 그리고 오뎅이 둥둥 떠있는 오뎅탕~ 몸에 좋은 닭 한 마리~ 보통 청개천 복개와 함께 시작된 음식들이라  깊이있는 맛을 느낄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 나오는 길 이곳에서는 특이한 동, 식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름이 기억 나는 것들로는 이구아나, 닭, 잉꼬, 연꽃, 옥잠화, 수련 등입니다. 아마 이런 가게들이 이곳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연출하는 것 일 겁니다.
 이제 지하철역 동대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뻘개진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웃었죠^^ 눈빛으로 통했습니다. 다음은 인사동으로 다시 인사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성주

불교에서 본 인간이란 무엇인가

                                                    -性珠-
Ⅰ.서론
Ⅱ. 석존의 출가 동기와 수행 및 깨달음
Ⅲ. 최초의 설법과 전도의 선언
Ⅳ. 초기 불교의 교육학적 인간관
  1.「苦」의 정의
  2. 불교의 인간관
  3. 고(苦)의 해결
  4.「苦」의 해결에 있어서의 불교적 특징
Ⅴ. 인간이해, 왜 중요한가?
  1.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2.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
  3. 죽음의 실상과 올바른 수행
Ⅵ. 불교의 인간 이해
Ⅶ. 현대적 의의
Ⅷ. 결론

Ⅴ. 인간 이해, 왜 중요한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인간이 의식적 사고를 가진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온 질문이다. 철학의 역사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 또한 인간의 이해를 빼고는 거론하기가 어렵다. 이 질문이 왜 이토록 중요한가? 그것은 이 질문이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 하는 존재의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나의 삶을 규정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실제로 자신을 향해 했을 때 그에 따른 답은 어떤 차원의 것이든 그의 삶을 변혁시키고 규정 지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예컨대, 그 질문에 "내가 누구야, 3남 1녀 중 장남이지" 하는 답을 얻었다고 하자. 별로 고차원적인 답은 아니라 하겠지만, 그 답은 그 사람의 삶을 온통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소중한 답이다. 이러한 답을 통해 그는 "3남 1녀 중 장남인 내가 이래서 되겠는가, 앞으로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삶의 자세가 확립될 수 있다. 이처럼 존재에 대한 물음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 나에 대한 물음과 이해는 중요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도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주석이자 해답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잘못 사는 것은 나의 참 모습을 모르는 무명(無明) 때문이며 따라서 잘 사는 길은 다름 아닌 나의 참 모습, 본래의 나(本來面目)에 눈뜨는 것임을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신다.
 선(禪)에서 '이 뭐꼬?'를 평생의 화두로 참구하는 것도, 나의 정체를 꿰뚫기 위한 정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정진을 통해 얻은 깨침은 바로 나의 참 존재에 대한 확실한 눈뜸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야말로 인간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오직 나의 참 모습에 눈뜨는 일이 불교 공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인간관을 살펴보려는 편집 의도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오늘날처럼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생명과의 관계가 파괴 일로를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는 일은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바른 인간 이해를 통해 인간과 자연, 다른 생명과의 바른 삶의 자세를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유신론(有神論) 숙명론(宿命論) 유물론(唯物論)의 세 가지의 종교 사상이 있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유신론의 경우 인간의 삶이 신(神)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 있고 숙명론의 경우 확정된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지며, 유물론은 물질의 구성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결정론적 인간 해석에 대하여 석가 세존은 단호히 비판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무엇에도 예속될 수 없는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이며 인간을 제약하는 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일 뿐이지 어떤 외적인 결정 요인이 없다고 천명하였다.

 1.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석가 세존은 인간이란 철저히 자유의지에 의한 존재라고 정의하여 인간 구성을 육근(六根)으로 파악한다. 인간의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여섯 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근이라는 말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어떤 것'을 의미하여 육근으로서의 인간은 그 어떤 외적 요인에 결정됨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운영해 나갈 것을 표현한다.
육근은 육경(六境)과 짝을 이룬다. 육경이란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의 여섯 가지 인식 대상을 뜻하는 말이다.
 육근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할 때 힘과 능력이 미치는 대상은 바로 육경이다. 육근과 육경이 함께 쓰이어 십이처(十二處)를 구성하며 "일체 존재란 오직 십이처(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법)"라고 석존은 말씀하셨다. 이는 우주에 온갖 것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존재로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인식하는 것이거나 인식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연물들이 인식 대상인 육경에 존재한다고 볼 때 육경에 절대적인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구성하는 주체인 육근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창조신이나 숙명적 원리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물질 또한 육근인 인간 존재들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십이처의 가르침인 것이다. 우주에는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인간 외적인 것은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삶을 전개해 나가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이다.

 2.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

 불교에서는 마음과 물질을 포함한 일체 존재의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을 밝히는 내용이 십팔계설과 육계설이다.
십팔계설은 십이처에 인식작용인 육식이 참여한 것으로 질적으로 변화된 두 존재 즉, 육식과 육근 육경이 요소로서 참여해 중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육계설은 일체는 몇 개의 기본적인 물질 요소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으로 인도 당시의 사대설을 받아들여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를 기본으로 삼아 이들 네 원소의 입장에서 십팔계를 재 조명함으로써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 공계(空界), 식계(識界)로 구성된 육계의 구조로 일체 존재를 파악한 것이다.
 인간 개체의 성립 과정을 육계설에 설명하면, 지, 수, 화, 풍으로 대표되는 기본 존재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중층구조 속에 배열되어 주변 존재와의 관계 아래 자유로이 위치를 바꾸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어느 순간 집착이 가해져 정지된 일시적 형체를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집이 가해진 형체는 기본 존재들이 일시적으로 멈추어 있는 상황으로, 다시 흩어지려고 하는 매우 불안한 상태라서 아집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바로 이러한 불안한 느낌이 두 번째 단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안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일단 집착된 존재들은 나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불안하지만 '나'라고 재확인하는 세 번째 단계의 생각이 발생한다. 연이어 기본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붙여야 된다는 의도가 일어난다. 실지로 떨어진 기본 존재들을 하나의 존재로 결합시키는 네 번째 단계가 성립한다. 이러한 결합이 마무리되면 기본 존재들은 이전과는 모습이 다른 하나의 개체가 된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전과 비교하여 달라졌다고 파악하는 식별이 생긴다. 형체를 식별하는 기능 등의 다섯 가지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작용이 인간 개체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이렇게 성립된 생물의 한 부류에 불과하며 인간의 생명도 그런 과정 끝에 정규적인 생명 현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 개체의 형성의 근원적인 것은 일시적으로 집착된 물질적 '형체'와 그를 지속하기 위해 연이어 발생하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3. 죽음의 실상과 올바른 수행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 것은 삼세 윤회설(三世輪回說)과 삼법인설(三法印說)이다.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을 부정하고 삼법인설을 통해 영혼불멸론(靈魂不滅論)도 부정한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만일 고의로 지은 업이 있다면 그 과보를 받게 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라고 하여 삼세 윤회설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문구가 있다. 이 내용은 죽은 뒤 내세에서 과보를 받을 존재가 있음을 의미한다.
 삼법인설에서는 영혼 불멸론적인 입장이 아님을 강조한다. 흔히 영혼 불멸론자들은 "사후에도 영속하는 불멸의 마음 주체가 있어 이를 자아라고 부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이러한 주체를 육근 중에 의근(意根)에 포섭하고 있어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라고 단정한다.
 인간 개체의 형성 과정은 일시적인 '형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한다. 인간 존재란 상하 좌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 존재들을 한데 결합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의 핵심적인 원동력은 결합 작용(연기에 의한 인연취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력은 한동안 지탱하다 끝내 한계에 이르면 붕괴해 버린다. 이러한 결합작용의 종식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던 무수한 기본 존재들도 상하 좌우의 본래적인 위치로 주변 존재의 작용에 따라 오르내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죽음의 실상은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 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져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결합하고 흩어짐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윤회(輪廻)라고 한다.
 인간의 괴로움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형체'를 '나'라고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집착하여 괴로움을 야기하는 형체,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오온(五蘊)의 경계를 멸함으로써 괴로움의 극복이 가능하다. 이러한 오온(五蘊)의 벽을 멸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 방편을 필요로 한다. 그 길은 우선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팔정도(八正道)와 사성제의 가르침을 실행하고 궁극적으로 일행삼매에 듦으로써 오온(五蘊)의 경계로부터 자유스러움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영겁의 생사고(生死苦)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생사(生死)의 수레바퀴에서 불사(不死)인 법(法)의 수레바퀴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Ⅵ. 불교의 인간 이해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먼저 부처님 가르침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는 근본불교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는 깨침을 본질로 하는 종교이다. 이 말은 깨침이야말로 불교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 별을 보고 이룬 큰 깨침이야말로 불교의 시원점이다. 불교의 모든 것은 그 깨침의 연역이라 할 수 있다. 경전이나 불상, 교리, 사상 등 모든 것들은 그 깨침으로부터 흘러나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 깨침의 원천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불교야말로 깨침으로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과 같은 깨침을 이루자는 가르침이자 종교이다.
 깨침을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인간 이해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불교의 인간 이해는 깨친 눈에 비친 나의 참 모습에 대한 고찰이기 때문이다. 깨친 눈에 비친 인간의 참 모습은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바탕이다. 이것은 불교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신뢰를 우리는 부처님의 '탄생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사자의 외침(獅子吼)을 하셨다고 한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天上天下唯我獨尊)"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탄생게는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탄생하시자마자 처음으로 외쳤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서는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며,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다름 아닌 인간성의 일깨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인간의 보편적 성품, 본래의 나는 어떻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홀로 높은' 바탕이라는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최고의 찬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최후의 가르침에서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을 의존하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존하라. 그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홀로 높은 거룩한 바탕을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으므로 진리는 먼 곳이 아닌 본래의 나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근본불교의 핵심 내용인 연기(緣起)도 바로 이러한 인간 이해를 담고 있다. 연기란 깨침의 내용으로서 모든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더불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홀로 존재하는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우주와 서로 더불어 있는 큰 바탕이다. 즉, 모든 것과 더불어 존재하는 '하나'인 바탕이란 것이다. 이런 하나인 바탕이 바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홀로 높고 거룩한 바탕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또한 근본불교에서는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五蘊], 즉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한다. 흔히 이 다섯 가지 요소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지만, 오온은 우주적으로 연기적인 관계에 있다. 그래서 오온은 공(空)이며 무아(無我)인 것이다. 불자들이 법회 때마다 독송하는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공하다[五蘊皆空]"고 한 것도 바로 우주와 하나인 인간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온 역시 비좁은 인간이해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큰 바탕에 입각한 인간 이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근본불교에서는 인간에 대한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인간 이해를 연기적 인간관, 우주적 인간관, 하나인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란 홀로 존재하는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깨침의 바탕을 지니고 서로 더불어 존재하는 큰 바탕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에 대한 이러한 신뢰와 높은 평가는 대승불교에서 여래의 씨알[如來藏], 부처의 성품[佛性]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여래장경>에서는 "모든 생명들이 그대로 여래의 씨알"이라고 했으며 <열반경>에서는 "일체의 모든 생명들이 다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화엄경>에 이르러 마침내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는 직언으로 이어진다. 즉,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 중생이 부처라는 선불교(禪佛敎)의 표어들은 이런 불교의 인간이해를 기본으로 확립된 것이다.
 한국불교사상 우뚝한 스승 중의 한 분인 지눌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소개되어 있다. 한 스님이 귀종화상(歸宗和尙)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화상은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화상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네가 바로 부처, 중생이 그대로 부처란 말은 불교의 인간이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부처의 성품, 여래의 씨알, 부처인 나는 어떻다는 것인가? 첫째로 우주와 둘이 아닌 하나인 바탕이라는 것이다. 탄생게에서 말하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홀로 높은' 바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바탕은 나만 홀로 있는, 그래서 우주와 둘인 그런 비좁은 바탕이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큰 바탕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비좁게 살고 있을 뿐이다. 내 육신을 중심으로 울타리를 치고 안에 있는 것을 나로 알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 우주와 둘이 아닌 하나인 생명이다.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이란 말은 인간이란 그렇게 비좁은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인 바탕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다음으로 영원한 생명, 즉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것이다. 우주와 둘이 아닌 나, 참 나는 나고 죽는 것이 없다. '나다' 하는 소아적인 놈은 나고 죽는 것이 있겠지만, 그 비좁은 울타리가 없어져서 우주와 하나되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영원하고 불생불멸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 성철(性徹) 스님께서는 그 소식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열반경>에서는 이런 참 나를 청정하고 기쁨이 넘쳐흐르는 바탕이라고 했다. 소아병적인 내가 멸했으므로 청정할 수밖에 없고 일체의 괴로움이 발붙일 수 없으니 항상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은 바로 이런 참 나에 돌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불교의 신행도 이러한 인간이해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신행이란 다름 아닌 부처의 씨알인 나를 확산시키고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처의 씨알이라면, 그 씨알을 잘 가꾸고 다듬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내가 곧 부처'라는 것도 신행이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허언(虛言)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아미타불을 염하고 좌선을 하는 것도 '내가 곧 부처'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러한 실천과 확인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행을 통해서 한 알의 씨알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면, 그곳에는 새들이 모여들어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줄 것이다. 그곳에는 작은 나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부처인 인간, 우주와 하나인 인간의 모습만이 있을 것이다. 정토란 바로 그런 세계일 것이다.

    Ⅶ. 현대적 의의
 
 불교의 연기적 인간관, 하나인 인간관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오늘날에 알맞게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환경 파괴, 인간성 상실이라는 병으로 앓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간에 대한 비좁은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이해한 인간은 다른 사람과 둘인 나, 자연과 둘인 나, 우주와 둘인 나이다. 이러한 인간이해를 통해서는 대립과 갈등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자연과 둘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고 정복하는 것이 인간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 자연이 파괴됨으로써 오히려 인간에게 많은 폐해가 오지 않았던가! 인간은 골프장을 짓기 위해 산을 파헤치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해쳐왔다. 장마철만 되면 겪게 되는 산사태, 이로 인한 인명피해, 수재민들의 고통, 누구의 탓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탓이다. 자연을 나와 다른 존재로 이해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인간들의 업보이다. 이제 이런 비좁은 인간이해에서 벗어나야 된다. 자연과 둘이 아닌 인간, 우주와 둘이 아닌 인간, 다른 사람과 둘이 아닌 나, 이것이 우리들 본래의 모습이다. 이런 본래의 바탕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교의 인간이해에 담겨진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불교가 이런 인간관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불교는 이런 인간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 불교는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종교로서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서 휴지 한 장 줍는 일,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일, 남을 헤치지 않는 일 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남을 헤쳐서는 안 되는가 하는 점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