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연기론 법계연기(法界緣起)

-梵水-




 진여란 사물의 참된 상태로 정적인 의미일 때, 시공(時空), 형체(形體), 시종(始終)의 구별이 없지만, 동적(動的)일 땐 외적인 생멸의 상태를 취한다. 따라서 세 가지의 연기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12인연에서 논해진 것과 같은 업감연기이며, 둘째는 아뢰야식연기로 업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기원을 밝히는 진여연기가 그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물의 생성에 미치는 상호 연관성, 즉 보편적인 연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런 물음에 진실의 세계에는 독립된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이 있다.
 법계(法界)란 모든 존재의 총칭으로 존재의 종류, 본성 등 다양한 뜻을 지녔다.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세계 또는 우주 전체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 자체인 진여(眞如)이다. 이 가운데 인과론적인 입장에 법계를 논할 땐,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인 우주를 가리킨다.
 연기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단독으로 생기하거나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계 연기설 역시, 만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 의존하여 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연기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즉 모든 차별적인 존재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함으로 모든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일체즉일(一切卽一))라는 뜻에서 연화장(蓮華藏) 세계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상적 우주 속에서 모든 존재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의 실존과 활동에 아무런 장애를 유발하지 않는다. 즉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성을 가지며 존재하므로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으로 대표되는 존재 역시 서로 의존하여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고 동시적으로 흥기(興起)한다는 생각이 보편적 인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생 철학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총합 철학이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우주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① 사법계(事法界)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이며,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법계란 모든 사물을 개별적으로 차별하여 보는 세계이다. 즉 여러 사물 가운데 통일성은 보지 않고 다양한 차별만을 보는 것이다.

② 이법계(理法界)

 사법계의 무한한 다양성도 그 본성에서 말한다면 모두가 동일성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동일성을 이법계에서 논하고 있다. 이것은 통일성의 측면으로서, 통일성이란 모든 사물의 무차별 동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사물이 무실체(無實體)라는 점에서 무차별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진공(眞空, 無我)이며, 이법계의 주된 내용이다. 또 사물이 무실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의타적(依他的)이라는 말로 진공의 이법계는 무실체성(無我)이라는 부정의 면과 의타성(依他性, 緣起)이라는 긍정의 면을 모두 가졌다. 그리고 의타연기(依他緣起)의 이(理)는 만상을 일관하는 이치이므로 이법계(理法界)라 한다.

경험적 분별 세계의 사물이 각기 고립된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

③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이(理)와 사(事), 즉 무차별 동일의 세계인 본 체계와, 차별의 세계인 현상계는 따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 속에 있다. 곧 이(理)는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연을 따라 사(事)로 드러나고, 사(事)이므로 그 본체는 무자성이다. 따라서 이와 사는 서로 융합(融合)하여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법계는 사법계의 모든 현상에 공통된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사법계에서 독립된 이법계란 없으며 이법계를 떠난 사법계도 없다. 이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는 고래로 수파불리(水波不離)로 설명되고 있다. 물은 본체인 이(理)로, 파도는 현상인 사(事)에 비유된다. 즉 파도와 물은 서로 다르나 체성(體性)은 하나라는 상즉(相卽)의 원리로 설명되고 있다.

 이사무애(理事無碍)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이(理)의 전체는 일체의 사(事)에 고루 미치고 있음과 동시에 각각의 사(事)에도 이(理)의 전체가 내재하고 있다는 설명이 있다. 이것은 사의 전체에 편재해 있는 이가 동시에 개개의 사에 내재함으로 전체가 부분 속에 있고, 부분이 전체 속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의 보편성과 사의 개념성이 서로 뒷받침하여 보편성 전체 속에 개별성이 있고 개개의 개별성 속에 보편성의 전체가 갖추어져 있다.

④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모든 존재들이 서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그대로 진리의 세계라고 한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는 외형상 차별적인 존재이지만, 이사무애(理事無碍)에서 살펴보았듯이, 개체는 전체 속에 있고, 전체는 개체 속에 있으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물 속에 동일한 이의 전체가 있다면, 모든 개개의 사물은 서로 동일한 구조 속에 있게 되므로 개체와 개체는 일대 일로 대응하여 서로 타를 함용하고, 또 함용 된다(주편함용(周遍含容)). 이것을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무애 없이는 사사무애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이사무애에 그쳐서는 사사무애가 될 수 없다.

 이상 사종법계(四種法界)를 구별하여 설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여법성(眞如法性)에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수연(隨緣)하여 만법이 되는 방면에서 사법계를 세우고, 불변(不變)하는 만법의 체에서는 이법계를 세운다. 그리고 불변과 수연의 교섭 관계에 대해서는 이사무애법계를 세우며, 수연의 법이 상호 교섭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세운다. 이 말은 각각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보는 사법계(事法界)와, 차별적인 개개의 사물에서 동일성 또는 공통성을 보는 이법계(理法界), 그리고 전체 속에 개체가 있고, 개체 속에 전체가 있다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은 서로를 포함하고 포함되어 조화를 이룬다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진여의 수연과 불변에 관련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법계의 모든 사물은 차별적 관계를 가지지만, 서로 인과관계 속에 있음으로 어느 것 하나라도 독립적이거나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   서 만유를 모두 진공(眞空, 無實體)의 관점에서 볼 때, 대립하던 차별적인 존재들은 실제로는 동등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관계를 원융무애(圓融無碍)라 하며,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로 나타낸다. 이런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 볼 때, 그것은 단독의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 전 우주가 되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이야기하면, 위와 같은 사실에 입각한 하나의 사물을 연기의 법으로 보고 이것을 우주 성립의 체(體)인 동시에 전 우주를 말미암아 성립된 것으로 본다면, 우주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하여 있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法界) 무진연기(無盡緣起)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