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참뜻

[불교신문 2825호/ 6월20일]  기획연재: 산사에서 온 편지 - 마산 광산사 주지 범수스님

 일반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불교술어에 대해서 서로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의 단어에 대해서도 개념 정의가 차이 나다보니 사고와 표현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오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비’이다. 간혹 일반인이 말하는 자비의 개념을 들어보면 ‘방관’, ‘외면’, ‘회피’와 같이 자비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자비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특히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만큼은 지적하지 않거나 모르는 척 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면 대단히 자비롭다고 여기거나 말한다. 이것은 중생심의 한 단면일 것이다. 실제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교육적인 지적을 할 때 수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는 “스님도 화를 내십니까.” 라든지 “자비가 없으시네요.”하며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는 자비의 개념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곡해하기 때문에 잘못 말하는 경우일 것이다.
 잠깐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려서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수행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겠지만, 출가자는 중생의 원이 이루어지길 축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하여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등의 집착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약 어느 한 쪽에 치우쳐 누군가를 예뻐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평등하게 중생의 행복을 축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정당하게 하는 분에게는 격려를 하고, 부당하게 하는 분에게는 충고를 할 뿐이다. 이것이 곧 평등에 바탕을 둔 ‘자비’의 올바른 개념이다. 그러므로 자기 종교의 지도자이고 스승인 스님으로부터 듣기 좋은 소리를 들었다고 우쭐거리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악한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자비’와 ‘무자비’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국어사전에 자비란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 같은 단편적인 해설 때문에 자비의 개념이 와전되기도 할 것 같다.
 물론 자비의 개념을 올바르게 알고 있겠지만, 혼동을 겪는 분들을 위해 불교사전에서는 ‘자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자비(慈悲)에서 자(慈)란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것(與樂)이고, 비(悲)란 고통에서 구제(拔苦)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착한 행위를 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慈)이고, 나쁜 행위를 하는 이에게 더 이상 그것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비(悲)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고통을 보고 듣고 구원한다.’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에게도 중생의 잘못에 대해서는 찡그리는 모습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평등한 입장에서 중생에게 ‘자비’를 보이는 것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경전에 따르면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은 꽃과 불상(佛面)으로 장식된 화관(모자)을 쓰고 있는데, 그 중 앞쪽은 미소(慈:前三面慈相 見善衆生 而生慈心 大慈與樂)를 짓는 모습이고, 왼쪽은 눈을 부릅뜬(悲:左三面瞋相 見惡衆生 而生悲心 大悲拔苦) 형상이다. 그런데 모든 중생에게 항상 온화한 자비의 미소만 지을 것 같은 관세음 보살님한테서 ‘눈을 부릅뜨고 성(瞋)내는 모습’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처음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엄연히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시며, 그 모습은 입을 벌리고 얼굴을 찡그린다. 그 의미는 잘못을 저질러 고통 받는 중생을 악의 굴레에서 구제하기 위한 것으로 악행을 일삼는 자에게 먼저 비(悲)로 제도 한 후, 자(慈)로 구호하겠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어 잘못과 고통으로 점철되는 중생을 보고서도 연민히 여겨 구제해주지 않거나 외면하는 것이 ‘무자비’이고, 선악을 구분할 줄 몰라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고통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중생을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과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자비’이다. 그러나 중생심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잘못된 것이라도 자신한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옳은 것이라도 자신한테 피해가 생기면 싫어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